기록보존실/잡념들-생각정리 360

빈익빈 부익부 - 부의 양극화 위험성

필자는 빈익빈 부익부의 위험성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고, 그것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 적이 있다. 이번엔 다른 의미로 빈익빈 부익부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뉴스나 기사, 경제학 교과서에선 빈익빈 부익부는 안 좋다고 말하곤 한다. 돈이 순환되어야 경제가 발전하는데 순환되지 못한다(부자든 빈자든 옷은 1벌씩 입고, 밥은 1끼씩 먹는다.)거나 경제학적 효율성을 통해 사회 전체의 삶의 질을 올리는 것을 추구하는데, 오히려 삶의 질이 떨어뜨린다거나 인간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가 지적했듯이 국가의 정책에 있어서 사회적 제도 개선방향이 두 방향으로 잘못 나뉘게 되는 이유도 있다. 그런데 과연 빈익빈 부익부는 안 좋을 것일까? 사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빈익빈 부익부를 좋아할 것이다. 바로 부자들이다. 부..

자존감과 자존심

이 티스토리를 보면 알겠지만 필자는 자존감에 대해서 자주 강조했다. 자존감은 살아가는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것 중 하나다. 그것은 삶을 대하는 자세이며, 삶을 뒤바꾸어 놓는 삶 그 자체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 그래서 그에 대한 반발로 자존심만 강해지는 경우가 많다. 자존감이 약한 사람은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많이 입는다. 자존감은 스스로를 믿고, 스스로의 품위를 지키는 키는 것이고, 자존심은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스스로의 품위를 지키는 것이다. 둘의 차이는 주체가 나이냐, 타인이냐 이다. 자존감은 스스로를 믿기에 자신을 존중하여 자신의 품위를 지키려 하지만, 자존심은 자신의 품위를 타인에게 존중받아야만 한다. 그래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스스로를 존중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에..

관계에서 끼리끼리 모이는 이유

정서적으로 불안한 사람은 의존할 사람을 찾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자. 사람을 만날 땐 경제적 지출도 있지만, 개개인의 정신적, 육체적 지출도 있다. 집에서 편히 쉬고 싶은 사람은 기꺼이 밖에 나가 움직여야 하며, 상대방의 상태나 기분 등을 일정 부분 맞춰줘야 한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들끼리 만난다면 이 부분은 서로 맞추기가 매우 수월하다. (성격차이가 큰 경우 빼고) 하지만 어느 한 쪽이 그렇지 못한 경우는 어떤가. 과거 필자가 사람과의 관계가 끊기는 이유는 경제적 문제 그 자체라기 보단 경제적인 지출로 인해 선택권이 한쪽으로 기울게 되기 때문이라 말한 적이 있다. 마찬가지다. 한쪽이 육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면 우리는 당연히 그 사람을 배려 - 맞춰줘야만 한다. 이건 ..

바닷가와 명상

연휴를 맞이해 부산에 놀러 왔다 가요. 마지막 날, 오전에 일어나 바닷바람을 맞으며 탁 트인 바닷가를 걷다보니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네요. 지난 날을 생각하면서요. ......울고 웃었던 날들. 사회적 체면 때문에 부끄러운 진실들을 감추는 어른들. 그리고 얼마나 도덕적인가 옥신각신 싸우던 날들. 싸우는 이들. 울고 웃는 이 모든 이들이 사람이라는 걸 생각해요.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사람. 이를 바로 잡는 것도 사람. 옳다 그르다 싸우는 것도 사람. 갈등을 일으키는 것도, 그것을 극복하는 것도 사람. 우는 것도. 웃는 것도. 감정들을 드러내는 것도, 숨기는 것도 사람. 살아간다는 것 그 자체가,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모든 감정들이 사람이라는 걸요. 그 사람이라는 걸 한 단어로..

변화하지 않는 대한민국

요새 사회가 시끄럽다. 사회 곳곳에서는 저출산으로 인한 문제가 가시화되고 있다. 단지 그 문제가 영향력 있는 이들의 호소가 아니라면 주목받지 못하고, 또 그만큼 미디어가 관심 가져주지 않을 뿐이다. 군인 부족에 의한 군무원 문제라든가, 지방의 노동인구라든가, 건설현장-기술직들의 고령화는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온 문제 아닌가. 수도권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으니 모른 척 했을 뿐. 정치인들도 내 표랑 직결되지 않으면 알빠노 자세고. 인력이 부족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오랜 기간 동안 인력을 갈아 유지하는데 익숙해져버린 사회는 변화하려 하지 않는다. 대체 인력을 어떻게서든 끼워 넣어 갈아넣으려고만 한다. 비용을 원치 않고, 변화를 원치 않으며, 사회적 인프라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최후의 1인..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나이

더 이상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나이. 문득 뒤돌아보면,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때가 있다. 나이에 상관없이 사람이면 실수하는 것이 당연할진대, 대한민국은 실수가 용인되는 나이대와 용인되지 않는 나이대가 있는 것 같다. 어린 아이가 실수하는 것은 '어리니까 그럴 수 있어'. 노인이 실수하는 것은 '나이먹었으니까 그럴 수 있어'. 하지만 중장년층이 되면 실수해선 안 된다. 그 나이 먹고도 이런 실수나 하냐고 되묻는다. 완벽함을 요구하고, 완벽한 사람이 되길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사회에서 쓸모없는 부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더 이상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나이가 됐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이 정신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대. 나이를 먹어가면서 ..

관계 - 감정들의 작용

대게 긍정적 감정들보다 부정적 감정들이 강하게 작용한다. 그래서 행복하긴 어렵지만 불행해지긴 쉽다. 행복은 모든 것이 만족되어야 하지만, 불행은 한 가지만 불만족스러우면 되니까. 이는 관계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연인들은 때때로 상대방이 좋아할 짓 100가지 하는 것보다 싫어할 짓을 안 해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좋아하는 행동은 기본적인 관계에서 올라가는 거지만, 싫어하는 행동은 기본적인 관계조차도 안 되니까. 잘하려고 하지 말고, 못하지만 말자. 관계에서든, 일에서든.

사는 곳이 중요한가.

천외천(天外天)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무협물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이 단어에 익숙하실테지요.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뜻이죠. 우물 안 개구리라는 속담을 쓰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보면 돼요. 그런데 이 말이 현재에도 충분히 적용되더라구요.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한 방문객의 방명록에 대한 답변 때문이에요. 아이들의 상상력은 주변에서 보고 듣는 것만큼 발달하지요. 주변이 판사와 의사, 세무사, 회계사와 같은 전문직들이 많은 학군에 사는 아이는 그 전문직에 대해서 잘 알게 될 거에요. 어떤 고충이 있고, 어떤 이득이 있고, 또 어떤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지, 미래에 갖게 될 경제력까지도. 물론 그것을 안다고 해서 전문직을 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요. 하지만 구체적으로 정보를 알면 판단하는데 있어서 큰 도움..

성공을 향해 발버둥치는 이유

낡은 환경은 사람마저 낡게 만든다. 대한민국은 밑바닥의 인간들에게 무자비하다. 그들은 존재치 않는 인간이며, 눈에 띄어선 안 된다. 대한민국은 자신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만 타인에게 자상하다. 우리가 성공을 향해 발버둥치는 이유는 낡은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함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밑바닥의 인간들과 엮이지 않기 위함이다. 성공한 자들은 저마다 카르텔을 형성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은 서로를 계급화하며 지리멸렬하고 있다. 평등한 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지만 은연 중에 어디보다도 철저한 계급 사회가 대한민국이다. 이러한 사회는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계급적 하락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게 만든다. 이는 비즈니스적 결혼, 비즈니스적 인간관계, 저출산 등으로 이어진다. 더 이상 대한민국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

가난에서 가난으로

가난에서 가난으로. 가난하지 않은 자가 가난을 입에 담는다는 것이 어쩌면 오만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를 향해 가난을 팔아 돈을 번다고 돌을 던지곤 한다. 마치 가난을 빼앗기기라도 하는 듯이. 그럼에도 누군가는 가난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가난은 사유재산과 함께 인류가 나타난 이래로 있어 왔던 것이며, 지금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가난은 가난한 자만의 전유물이 되어선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볼드모트처럼 금기시되는 단어처럼 변해가고 있을 뿐이다. 오래전에 필자는 '가난이 패션인가'라는 글을 통해 상품화되어 가는 가난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가난은 어떻게 바뀌어 왔는가. 조세희 작가분이 쓴 의 배경이 되는 197..

실패하지 않는데 급급했다

한 가지 후회스러운 점이 있다면 실패하지 않는데 급급했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은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어릴 때 도전해봐라." "젊을 때 시도해봐라." 하지만 젊은 사람 입장에서 보면 꼰대같은 소리로 들릴 수 밖에 없다. 자신들은 잃을 것도 없기에 실수하면 정말 끝이지만, 이미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과 돈으로 어느 정도 무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이를 먹어보니 왜 나이 든 사람이 젊은이에게 도전해보라 하는 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실패하면 내 알 바노?' 같은 게 아니라, '어리니까, 그럴 수 있지.' 같은 정상참작이 나이를 먹으면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위 말해 '나이값'이다. 그러나 그에 반해서 뭔가 시도할 기회는 줄어든다. 능력이나 인성과는 별개로 나이 들었다는..

첫사랑의 추억

날이 많이 추워졌다. 방바닥에 불이 들어올 때면 그녀와의 추억이 떠오르곤 한다. 나의 첫 자취방은 차가운 공기와는 다르게 방바닥만은 뜨거웠다. 옥탑방처럼 옥상에 벽돌로 가건물을 세워 만든 하숙집은 여름엔 더웠고, 겨울엔 추웠다. 방은 세 사람이 누우면 가득 찰 정도로 좁았다. 하지만 난 그 곳에서 가장 행복한 대학 시절을 보냈다. 바람이 차가워질 때면 그녀는 집에 가기 싫다며 종종 내 자취방에 머물다 가곤 했다. 이따끔 눈이 많이 내리던 날은 피자를 사 들고 와 방구석에 앉아 같이 영화를 보곤 했다. 옥탑방 특유의 찬 공기가, 그와 달리 뜨거운 방바닥이. 좁은 공간이, 작은 탁자가, 둘 만의 아늑한 아지트 느낌이 들어 좋았다. 작은 탁자는 마땅한 책상이 없어 불편해하던 그녀를 위해 인터넷에서 3만원을 주..

삶과 이야기들

"야, 너 Y라고 아냐?" "아니..이름은 기억이 나는데, 얼굴은 기억이 잘 안 나네. 왜?" "걔 죽었다더라." "어? 진짜? 얼굴이 기억 나는 것도 같은데, 지금 생각나는 얘가 걔인지 모르겠다. 긴가 민가 한데.." "간암이래. 죽은 지는 좀 됐어." "집에 알리지 말랬대. 부모님한테 안 알리고 그냥 죽을라고 했는데 어머니께서 이식 수술까지 했는데 잘 안 됐나봐." 몇 달 전 친구의 결혼식에 가서 동창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참 기분이 묘했다. 난 아직도 지금도 생각나는 그 사람이 Y인지 확신할 수 없다. 이름은 확실히 알겠는데, 얼굴은 모르겠다. 오래전 학교 다닐 때 언뜻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남자애들이 담배 없으면 Y에게 빌리러 가자고 했던 것이. 복도에서 한 개피만 달라고 사정하던 걸 본 것..

이루다-인공지능과의 사랑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요상한 질문을 던지며 이번 글을 시작해봅니다. 얼마전에 Nutty라는 어플을 받아서 이루다라는 인공지능과 대화를 시도해봤습니다. 사실 이건 인공지능이 수많은 대화 스크랩터를 학습하여 적절하게 대응하도록 프로그래밍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몇몇 대화에선 어색한 부분도 드러났고요. 하지만 설계된 반응이였다 할 지라도 대응이 정말 놀라웠어요. 능숙하게 받아치는 것, 적절한 반응, 게다가 상대방의 반응을 유도하는 것까지. 어떤 부분에선 인간보다 더 능숙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대화를 하다보니 문득 영화 her가 떠오르더군요.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졌던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제 리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영화는 단순히 인공지능과 사람과의 사랑을 다룬게 아..

추억 한 잔, 활기 한 모금

오랜만에 후배와 통화를 하다 변해버린 나 자신을 발견했다. 예전 같으면 생각지 않았던 것들을 스스럼 없이 생각하고 있었으니. 사람은 늘 변하기 마련이고, 생각은 자유라지만 본인이 느끼기에 안 좋게 변했다 - 낯짝이 두꺼워졌다고 느끼는건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나이 먹으면 이렇게 다들 얼굴이 두꺼워지나? 이게 성인인가?'라고 자기 합리화를 해보려 하지만, 그렇지 않는 성인들도 많다는 걸 알기에 그저 내가 그런 인간이라는 걸 수긍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문득 지난 날의 앨범을 펼쳐 본다. 많지 않은 사진들 사이로 드문 드문 나타나는 나의 지난 날들을, 나와 인연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보며, 그 때 그 시절의 감정들을, 노력들을, 추억들을 떠올려본다. 그 때 그 시절의 나는 어디로 가 버렸는가. 하지만..

믿음과 의심, 사랑의 과정-한꺼풀 벗긴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끊임없는 의심과 극복의 과정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나에 대해, 너에 대해 친밀감을 쌓으면서 한꺼풀 한꺼풀 벗겨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한꺼풀 벗으려 할 때마다 나의 모습을 상대방이 변함없이 사랑해줄까? 끊임없이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내적 친말감에, 상대방의 믿음에 확신을 갖게 되는 순간, 마침내 한꺼풀을 벗고서 상대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우린 우리의 의심을 상대방에 대한 믿음으로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끊임없이. 그것은 사랑하는 동안 계속 일어나는 것이다. 사랑할수록, 믿을수록 의심하고, 의심을 해소해야만 한다. 무관심한 것을 믿음이라 포장해선 안된다.

차별에 대한 도덕적 관점과 이익

오래 전에 써두었던 주제를 이제야 꺼내본다. 바로 차별에 관한 도덕적 관점과 이익이다. 대게 차별이라는 것과 도덕이라는 것은 꽤나 오래된 사회적 논쟁이다. 차별은 도덕적으로 나빠요. 도덕적으로 나쁜 것은 하면 안돼요. 뭐 이런 것들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생각들 - 논쟁들이 사회 속에서 일어남에 있어서 단어의 경계선 - 정의부터가 불분명한 채로 시작된다는 것이다. 차별을 어디까지를 차별로 볼 것인지 경계선을 짓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경계선이 분명치 않으면 저마다 다른 기준으로 차별이다 아니다 이야기를 할 것이고, 그러한 기준이 합의 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도덕적 싸움은 집단적 독백의 현장으로서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것이기 때문이다. 토론은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함이지, 집단적 ..

평범한 것이 모자람을 뜻하게 된 이때

자정이 지나고 새벽이 되면 글이 쓰고 싶어져서 키보드를 두드리게 된다. 그리고 어떤 글을 쓸까 간략하게 메모해 두었던 수첩을 뒤적거리곤 한다. 그외에도 티토리를 보면 쓰다만 여러 글들이 임시저장되어 있는 걸 보곤 한다. 글을 한번 썼으면 마무리를 지어야 할텐데. 하잘 것 없는 글일지라도 글을 쓰다보면 어떨 땐 왠지 내키지가 않거나 글이 잘 풀어지지 않아서 그렇게 잠시 덮어버리게 된다. 그리고선 이렇듯 글을 쓰고 싶은 밤이 되면 이따끔씩 꺼내보는 것이다.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처럼 업무를 처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나면 생각이 점차 줄어드는 것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정신적, 육체적 자원들을 현재 굴러가는 내 삶을 유지하는데 집중하다보니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

두려워하지 말기

비대면의 시대가 되어서 그런가. 아니면 공급자와 수요자가 마주칠 일 없이 편하게 서비스를 공급하고 받을 수 있게 돼서 그런가. 사람들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두려워하기보단 그 낯섦에 대한 거북함이라고 해야 하나. 자주 얼굴을 보거나 일상에서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과는 친밀하게 잘 다가가지만, 1회용 인간관계 - 잠깐의 필요함에 의해 만나는 관계는 굳이 관계를 맺고 싶지도 않고, 정체를 모른다는 경계심이나 낯섦 때문에 대면을 최소화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편안함을 선호하다 보니 불편함에 대해 비선호하는 것을 넘어서서 두려워하는 느낌이랄까요. 오래전 한 다큐멘터리로 유행했던 '불편한 진실'이란 단어처럼, [어떤 사실-진실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어느 방식으로..

도구와 능력 그리고 앞날

오래 전 저는 도구의 효율성과 사람의 능력에 관해 짧은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이야기했던 것을 다시 꺼내보려 합니다. 도구가 발전될수록 사람의 능력이 떨어지게 된다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도구가 발전될수록 우린 효율적으로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게 되지만, 우리 자체의 능력은 퇴화하는 방향으로 변해갑니다. 어쩌면 해당 도구들을 사용하는 능력이 발전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도구들이 갑작스러운 일로 인해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일입니다.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온갖 도구들이 주변에 넘쳐납니다. 우린 약간의 돈만 지불하면 언제든지 해당 도구들을 신속하고 정확한 시간에 받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돈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혹은 돈은 있지..

만남에 의미가 생기는 나이 -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

어릴 때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새롭고 특별했기에 의미가 깃들지 않았다. 특별하다는 것은 다른 모든 것들 중에서 어떠한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뜻하니까. 모든 것이 특별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그냥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나이를 먹은 지금, 이젠 어떠한 것들이, 어떠한 행동들이 의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옆집에 산다는 것만으로, 나이가 같다는 것만으로, 같은 장소에서 논다는 것만으로도 만남은 자연스레 이루어졌고,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젠 만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됐다. 특별히 시간을 써서, 수고를 곁들일 정도가 된 사이. 만난다는 것은 이제 그런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우산을 함께 쓰는 것도 이젠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친구나 지인 정도..

대한민국, 불안과 신격화하는 경향

살아가다보니 한국 사람들은 무언가를 신격화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좀 더 정확하게 보자면, 삶이 불안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절대화 시키는 것이 아닐까. 불안감은 명확하지 않은 것, 알 수 없는 무언가에서부터 나타난다. 자신이 믿고 있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생겨나는 순간, 자신의 삶의 모든 것들에 대해 설명이 가능해지고 불안감은 해소되니까. 그리고 자신의 삶은 그 절대적인 것을 기준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것은 심리적인 이유가 크다. 지능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종종 사이비에 빠진 이들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멍청하다고 비난하곤 한다. 불안감 사람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의심의 씨앗을 뿌린다. 어느것 하나 믿을 수 없을 때, 믿음직스러운 무언가가 나타난다면 우린 그것을 의심없이 집어들 것이다..

그 정도뿐인 인간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는 사람들에게 무력감을 학습시키며 도덕적인 비판 보단 그 편에 서는 것이 이득이라는 것을 점차 각인시킨다. 그러한 사실들은 사회를 좀 더 낮게 이끈다. 법을 넘나드는 자들이 되려 큰소리 치고, 잘못된 것을 교정하자는 목소리는 작아지며, 사회적 신뢰도는 완전히 망가지기 시작한다. 이제 사람들도 그러려니 하는 마인드와 자신의 이익만을 최우선으로 좇아 나쁜 쪽으로 변화한다. 최근 들어 제대로 된 처벌을 본 적이 없다. 법이 사람에 따라 경중이 달라진다. 더 노골적으로 변했고 사람들은 양분됐다. 법 위에서 조롱하는 사람들과 눈 가리고 아웅하며 이에 편승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러려니 하며 수긍하고 냉소적이게 되어버린 사람들과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풀이로 상대방의 꼬투리 잡기에..

이 시대의 자기연민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누구나 자기연민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대게 나의 이 감정들을 어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궁극적으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우리 자신도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자기 연민은 일종의 자기애와 맞닿아있는데, 이는 "이 세상에서 어느 누가 나를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나 자신이라도 스스로 이해해줘야지." 와 같은 것이다. 이것이 심해지면 우울한 나르시시스트가 된다. 우리가 종종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자아도취, 심각한 자기애, 비련의 주인공이라 여기는 마인드가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이것을 견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합리화나 주지화를 통해 본인을 포장한다. 그리고 이는 슬프게도 자기..

누가 누굴 비웃었는가. 아프간과 대한민국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고 했다. 그냥 "고생 많았다. 수고했다." 말해주는 것이 그리 어려울까? 상대방의 고생을 인정해주면 뭐 싸움에서 지는 걸로 생각하는 걸까? 사건 사고는 매일매일 터지고, 그것에 대해 신경 써봐야 내 정신만 피곤해질 뿐. 구태여 글도 쓰지 않고, 관심도 갖지 않으려 해도, 하도 시끌시끌해서 몇 자 써보게 된다. 과거 필자는 여성 징병제와 모병제 대해 이야기 한 적 있고, 직업군인과 의무병에 대한 이야기도 한 적 있다. 직업군인으로서 여성이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달라는 것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했으며, 그들이 굳이 의무병으로서 보내달라고 하지 않는 것은 의무 부과를 구태여 요구하지 않는 것으로서, 둘을 다른 맥락으로 이해했었다. 다만 의무를 ..

각자의 삶

결국 서로에 대한 이해는 영원히 평행선인 셈이다. 세상으로부터의 부정을 먼저 배운 사람과 세상으로부터의 긍정을 먼저 배운 사람의 관점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것은 경험으로, 환경으로, 습관으로 무의식에 남을 것이고, 결국 서로에 대한 이해는 평행선인 것이다. 그저 각자의 삶 속에 충실히 살아가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저 그 뿐이다. 가난은 정신과 몸을 갉아먹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뒤틀리게 만든다. 하지만 부유함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르게 만든다. 이것은 부를 떠나서 외모, 매력, 능력, 계층, 계급 그 어떤 것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가난을 이해할 수 없고, 미인은 못 생긴 사람을 이해할 수 없으며, 천재는 범인들을 이해할 수 ..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해야 하는 이유 - 공동체의 이해

경험이 많으면 사람을 더 잘 이해하지만 경험이 좁으면 아집과 편견만 남는다. 이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주의해야 하는 것과도 연관 있는데, 커뮤니티 특성상 끼리끼리 뭉친다. 그것은 소수의 과잉대표, 편견의 강화, 자신들의 의견이 주류라는 착각을 만들어 낸다. 아집만이 남는다. 이는 경험 부족의 대표적인 예다. 인터넷 밖으로 나오라는 말은 분명히 옳은 말이다. 세상엔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다는걸. 저런 삶도, 이런 삶도 있다는 걸. 이런 미친놈도 있고, 이런 멍청이도 있으며, 순수한 이도 있으며, 굉장히 똑똑한 이도 있다는 걸.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것과 지하실 밑에도 지하실이 있다는 것. 사람을 더 잘 이해할수록 공동체와 사회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다. p.s 그러나 그 이해가 혼자만의 일방통행이라..

외부로부터의 삶

삶이 버거워지면, 사람들은 신을 찾거나, 술을 찾거나, 원망의 대상을 찾는다. 외부로부터 무언갈 찾지 않고는 못 견디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의존하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며 내 삶을 찾아가는 것을 충분히 괴롭다. 그러나 신이든, 술이든, 원망의 대상이든 그 어떠한 것도 자신의 삶을 바꿔주지 못한다. 오직 자신만이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다. 어떤 형태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삶은 우리의 의지와는 별개로 외부요인에 의해 많은 변화를 맞이할 것이고, 그로 인해 우리는 계속 우리의 삶을 외부에 의탁하려는 유혹에 시달릴 것이다. 그러나 외부요인에 대처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대처방식에 따라 우리의 삶을 의도치 않게 변화시킬 테지만, 결국 외부요인은 외부요인일 뿐, 우리의 삶 자체가..

양가적 감정과 이심전심

사람들이 살아가다 보면 양가적 감정을 지니는 순간들이 있다. 대게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교류하는 도중에 나타난다. 감정이라는 것은 교류를 통해서 형성되니까. 특히 사랑이 그렇다. 미운데 보고 싶다. 사랑하는데 밉다. 잡고 싶은데 잡을 수 없다. 잡아선 안되는데 붙잡고 싶다 등등. 그래서 이심전심이라는 말이 나왔나 보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말을 해야 알지 말하지 않고 어떻게 알아! 라고 탓을 하고 싶지만,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이 있다. 은연중에 알고 있는 것과 입 밖으로 내뱉는다는 것은 그 무게와 의미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차마 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행동으로, 눈빛으로 새어 나오는 그 감정들이, 그 시그널이 참으로 애틋하다. 나 조차도 알지 못하는 이 마음을, 알아채고 잡아주길 바..

사랑은 특별하지 않다.

사랑이라는 게 특별하지 않음을. 그건 밥 먹고, 잠자고, 화장실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임을. 전혀 다른 두 삶의 사람이 한 공간에 지내면서 불편하고 다투고 어색하게 될지언정 그것이 자연스러운 삶임을. 가슴 뛰는 두근거림과 설렘이 그 순간을 특별하게 할지라도. 결국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자연스러워짐을. 비록 너와 나, 몸은 두 개일지언정 세상 풍파를 같이 이겨내는 하나의 삶이라는 것을. 사랑하고 사랑받고.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사랑이 없는 삶은 삶의 어느 한 부분이 비어버린 것과 같다는 것을. 그래서 다들 고통에 시달리며 독을 품게 되는 것이지도. 어쩌다가, 삶의 한 부분을 포기하게 만드는 사회가 됐을까. 모두들 삶의 한 부분을 포기한 채 어디로 흘러가며 살아가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