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존실 965

적응

....결국 나도 사람이다.사회에 적응해야지.비판은 힘의 역학관계가 명확할 때, 가능성이 있을 때 하는 것이다. 변화시킬 힘이 있을 때. 그전까진 사회를 아무리 비판해봐야 끝에 남은 건 도태뿐. 사회를 개인이 이길 수 없으니까. 비판하는 이가 없는 사회는 죽어버린 사회지만 알 게 뭔가.외모나 과열된 경쟁 의식이 문제라는 걸 알지만, 그 흐름 속에서 그걸 비판해봐야 본인만 실패자, 투정 부리는 도태남이 될 뿐.고고히 홀로 이 사회를 완전히 벗어날 것이 아니면 대세에 맞추는게 편한 길이다.정상은 정상이고, 비정상은 비정상이다.제 아무리 비정상이라 외쳐봐야 본인만 도태다.사회에 순응하면 안된다.비판의식을 가져라.뭐 이런 것들이 나쁘진 않는데, 결국 사회 속에 살아갈 사람이라면 적응했어야 한다는 걸.이 사실을 ..

당연함과 익숙함의 대가

익숙하다는 건 당연시 된다는 것.당연하다는 것은 소중함을 잊게 된다는 것.당연한 일상 생활이라는 것은 없음에도 우린 일상 생활은 당연하다는 듯이 영위한다. 늘 하던 것이고, 늘 이루어지던 것이므로.깨끗한 옷, 깨끗한 집, 늘 맛있는 식사.그리고 편리한 사회적 인프라까지도.그것들은 모두 당연한 일상에 가려진 사소함이다.그 사소함들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을 당연하게 잊는다.망가진 인프라.망가진 삶의 양식.익숙함과 당연함으로 사소함을 잊은 대가를 우린 비일상이라는 미래로서 분명하게 치루게 될 것이다.p.s그래서 옛 사람들이 이성을 중시하고 감각을 그렇게 경계했는지도 모르겠다.p.s1이성이 광기의 시대를 가져오고, 그 이성이 돈의 가치로만 일의 가치를 측정하는 걸 보면 또 모르겠다.

감성의 시대

사람들은 요즘 시대를 감성의 시대라고 말한다. 애플이 감성적인 디자인으로 성공했고, 삼성이 갤럭시 플립으로 성공했듯이. 그러나 요즘 사람들이 감성을 찾는 것은 역으로 감성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인류가 야만의 시대에 확고한 기준점이 되어주었던 이성을 찾았듯이. 사람은 결핍된 것을 원하는 법이다. p.s 누군가는 그럼 왜 연대의식을 찾지 않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결핍은 원하는데 있지 아니한 것이다. 연대의식은 결핍된 것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무쓸모해진 것이다. 사회적 편의성이 잘 이루어질수록 사람들이 파편화되는 건 필연적일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예의

우리가 가난에 대해 늙음에 대해 실패에 대해 조금만 더 예의를 가졌음 좋겠어요. - 82cook 어느 이용자의 글에서 p.s 기품이 느껴지는 문장이다. 우리 사회는 가난을 멸시하고, 늙음을 우습게 알고, 실패를 비웃는다. 가난한 이들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 틀딱이면서 꼰대짓하네. 응~ 실패자 말은 안들어. 우리 사회는 약자에 대해 매우 가혹하다. 약자도, 가난도, 늙음도, 실패도 모두 경쟁에서 도태된 것들이라 치부하기에.

사소한 정치

사소한 습관이 인생을 바꾸듯이 사소한 정치가 사회를 바꾼다. 정치는 매우 사소해서 직접 와 닿지 않는다. 당장 내가 투표를 한다고 해서 뭔가 내 삶이 바뀌거나, 사회가 바뀌거나, 나에게 직접적으로 이득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그 사소한 것들이 어느 새 모여서 사회를 바꾸고, 바뀐 사회는 내 삶의 방향마저 바꿔버린다. 완성도는 디테일에서 차이가 나듯이, 사소하지만, 사소하기에 중요하다. 직접적인 변화를 이끌 수 없는 사람들에겐 이 사소함이 유일한 무기다.

선택, 노력 그리고 결과

신동엽씨가 말했던,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언이 있다. 인생에 정답은 없어요. 선택만 있는 거예요. 선택한 것에 책임지고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이만큼 인생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말해주는 문장이 있을까. 선택. 우린 선택을 하고, 노력으로써 그 과정에만 관여할 수 있다. 결과 그 자체는 우리 손을 떠난 것이다. 그러니 결과에 붙잡혀 있으면 안된다. 오지 않은 결과는 결국 결과가 아닌 상상일 뿐이고, 다가온 결과는 다음 선택의 참고자료일 뿐이니까. 노력. 노력은 정직하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노력은 정직하지만, 노력의 결과는 정직하지 않다. 아무리 노력해도 기회가 오지 않을 수 있고, 노력의 결과가 운빨의 결과에 뒤집힐 수도 있다. a를 넣어서 a만큼 결과가 바로 나타난다면, 그것만큼 지루한 인생이 어디있을까...

남의 인정

남의 인정에 매이게 되면 후회만 남는다. 열심히 달리다 문득 뒤돌아 봤을 때, 내가 왜 달리고 있지? 하는 의심과 후회뿐이다. 그러니 나 자신의 잣대로 보고 평가하라. 남이 뭐라든 어떻든 이 일은 내게 주어진 이상 내 업무고, 내가 처리하고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다. 성공 여부 와 스스로의 선(line)만 볼 뿐 타인의 여부따윈 중요치 않다. 그냥 스스로의 만족감이다. 그 뿐이다. p.s 그러나 타인의 인정을 너무 등한시해도 문제가 될 것이다. 타인과 함께인 사회 속에서 정말 외부 평판 상관없이 뚝심있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중도를 지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문제다. 그래도 순서를 매기자면, 1번은 나 자신의 잣대고 2번은 타인의 평판 순으로 판단하면 좀 더 살아가기 편하지 않을까.

공부와 행복

흔히 말하는,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지극히 원론적인 말. 공부는 인생을 위한 것이다. 헌데 우리는 공부를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한 수단으로 배워왔다. 공부 못하면 저런 일이나 한다. 저런 곳 간다. 공부 못하면 고생한다.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면 좋은 직장 얻는다. 미래의 신부가 바뀐다. 등등... 공부는 늘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했다. 여기서 좋은 직업은 흔히 말하는 고생을 적게 하면서 돈을 왕창 버는 직업이었고. 그러니 직업에 의한 차별은 늘 정당한 것으로 포장됐다. 니가, 학창시절 공부 안 한 대가인데 왜 투정부리냐?로. 공부는 타고난 머리, 개인의 노력, 가정 환경의 결과 였는데, 그것은 늘 순수한 노력에 의한 공정한 기회로 포장됐다. 말로만 공부는 인생을 위한 것이라고 했지. 실..

사연있는 캐릭터

사연은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든다. 그래서일까. 난 사연있는 캐릭터가 좋고, 사연있는 사람이 좋다. 그 사람의 사연을 듣고, 보고, 공감하며 이해해보는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그 사람의 매력에 푹 빠져든다. 사연은 하나의 또 다른 이야기다. 사연은 그 사람을 하나의 이야기로서 존재케 한다.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를 가진 사람은 그 사람만의 매력이 있다. 난 그러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야기를, 사연있는 캐릭터를, 그리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워커홀릭 - 세 종류의 워커홀릭

일에 미치지 않으면 미칠 거 같았다. 사랑하지 못해서 미칠 거 같고, 꿈도, 목포도 없어서 미칠 거 같고, 미치지 못해서 미칠 거 같았다. 일에라도 미쳐 있지 않으면.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공허한 시간들이 인생을 갉아먹을 거 같았기에. 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일로 하루를 보낸다. 그것엔 어떤 희망도 목표도 없다. 오직 이 하루를 사람답게 살아냈다는 안도감만 있을 뿐이다. p.s 워커홀릭에는 세 가지 종류의 워커홀릭이 있는 것 같다. 일에 대한 보상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그 보상을 위해 경쟁을 하는 자발적 워커홀릭. 일에 대한 보상을 위해, 경쟁을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문처럼 하루를 살아내기 위한 비자발적 워커홀릭. 그리고 업무와 관계된 수 많은 직간접인들의 밥그릇을 위해서 일을 놓을 수가 없..

어리석은 자기연민

자기애(愛)가 많은 사람은 자존감이 떨어지면 자기연민에 빠지기 쉽다. 자기연민에 빠지지 말자. 자기연민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다. 타인이 배려해줘야 할 의무는 없다. 그냥 욕 한번 시원하게 박고 털고 일어나는 것이 정신건강에 훨씬 좋다. 힘든 것에 원인을 찾지 말자. 힘든 건 그냥 힘든거다. 감정의 원인을 찾아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문제의 원인을 찾아 해결해야지.

문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가능성의 문제다. 현실에서 얼마나 실현할 수 있느냐 가능성의 문제다. 명분의 문제가 아니다. 기분의 문제다. 내 기분이 지금 어떠한가 뒤에 명분이 붙을 뿐이다. 세상 돌아가는 대부분이 이렇다.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에 휘둘리지 말고, 실현 가능성을 보라. 명분에 휘둘리지 말고, 말하는 의도를 보라.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태도다.

저마다의 매력

사람은 저마다의 매력이 있다. 어떤 사람은 목소리가, 어떤 사람은 외모가 어떤 사람은 성격이, 어떤 사람은 분위기가. 난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을까. 난 누군가에 어떤 매력이 있다고 칭찬 받아본 적이 있나. 사람은 저마다 매력이 있다. 저마다의 매력을 하나로 모은다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글을 덮는다. p.s 매력은 타인의 인정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의존적이고 하잘 것 없는 것이지만, 사회적 동물로서 사람은 독립적으로만 살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매력은 자존감에 관여하여 독립성을 형성시키기도 한다. 참 모순적이다. 그래서 매력을 매력적이라 부르는 걸지도 모르겠다.

힘 잃은 종교, 무너진 도덕과 질서

종교의 힘은 내세관에서 나온다. 종교는 내세관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 이야기를 끝으로 사람을 교화시키고 믿음을 갖게 만든다. 그리고 그 내세관은 대체적으로 현실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 이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현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과거엔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과학적으로 이해되고 설명되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종교를 믿지 않는다. 현실을 믿는다. 그래서일까. 도덕과 질서가 무너지는 느낌이다. 법은 최대한의 질서가 아니라 최소한의 질서다. 법만 지키면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니라 법을 지키지 않으면 사회에서 격리해야 할 대상이 된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법대로 했는데? 불법 아닌데? 하며 법을 어기지 않았으니 문제없다는 것을 방패로 삼는다. 법대..

부끄러움

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일. 우린 늘 부끄러움으로부터 도망쳤다.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온갖 핑계를 댔지만, 결국 그것은 부끄러움으로부터의 도망이었다. 하지만 다 괜찮다. 부끄러움도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일이다. 그 땐 그랬었지. 저 땐 저랬었지. 하며 털어내버리고 말 일이다. 웃으며 소주 한 잔하고 넘겨버릴 일이다. 부디 그 부끄러움을 핑계삼아 도망치지 말자. 지금의 고통이, 미안함이, 부끄러움이. 훗날 웃으며 넘겨 버릴 수 있도록. 나의 부족함이 상대를 힘들게 할 지라도, 힘든 상대를 보는 것이 무척 고통스러울지라도 이기적인 아픔이라 생각하고 견디자. 견디는만큼 더 잘해주자. 포기하는 것은 결국 그 부끄러움으로부터 도망침이다. 그 땐 그랬지...하며 지금의 미안함이 훗날의 민망함으로..

구분짓기

사람들은 늘 구분지으려 한다. 자본으로, 사회적 권력으로 계급을 나누고, 구분 짓는다. 그리고 그 구분짓기는 계급적 위,아래뿐만 아니라 서로간의 차이에서도 발생한다. 누구는 선이고, 누구는 악이고, 누구는 부정부패로, 누구는 도덕으로, 끊임없이 구분지으려 든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사회다. 누군가는 부정부패로 먹고 살고, 누군가는 성실하게 일해서 먹고 살고, 누구가는 사회적 부품으로서 역할을 다해 먹고 산다. 그 역할들을 선과 악으로, 저차원-고차원으로 나누어 서로 깎아내리고 구분지으려 든다. 그러나 그것을 구분지을 필요는 없다. 그건 애초에 사회 그 자체, 하나니까. 선과 악이든 고차원 저차원이든, 모든 것들이 인간에서 출발된 것들이다. 인간이 없으면 세상도 없고, 사회도 없다. 의미가 없다. 결국..

가능성과 유유상종

사람은 미완의 존재이기에 가능성이 열려 있다. 그 가능성은 죽는 날까지 알 수 없다. 일찍부터 재능을 개화해 쭉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 사람도 있고, 일찍 성공했으나 망해서 사라져버린 사람도 있고, 재능을 개화하지 못한 채 평범히 살다가 죽은 이들도 있고 각양각색이다. 허나 그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타고난 재능이나 성격 외에도 환경적 요인이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사회적 배경, 생활 습관, 심리적 요인 등에 큰 영향을 주어 삶에 대한 태도 자체를 바꿔놓고 나아가 삶 자체를 바꾸기도 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끼리끼리 만난다. 비슷한 지적 수준, 비슷한 직업, 비슷한 배경, 비슷한 생활 양식까지.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남으로서 앞날에 대한 가능성이 실패하지 않도록 위험을 관리한다. 물론 비슷한 수준의 사..

희망을 노래해야 한다.

우린 현실을 직시하되, 희망을 노래해야 해요. 행동의 목표는 현실로 세우지만, 원동력은 희망이니까. 요즘 뉴스를 보면 하나같이 전망이 어두워요. 고구마 100개 먹은 현실만 앞에 있죠. 모두가 불안한 시대에요. 전 원래부터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비관론자에요. 그렇기에 후회를 많이 했고, 자꾸만 돌이켜보고, 늘 회피하고, 도망쳤어요. 하지만 미래는 반드시 오고 우린 받아들일 수 밖에 없어요. 그렇기에. 그렇기에 우린 희망을 노래해야만 해요. 삶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 되니까요. 물질적 가치와 무형의 가치에서 늘 헤매이지만, 그 혼란에서도 우린 삶을, 희망을 노래해야만 해요.

소금 뿌린 토양 같은 사회

경쟁이 치열해서일까. 우린 칭찬에 인색한 것 같다. 칭찬하면 내 능력이 상대방에 뒤쳐진다는 걸 인증하는 것처럼. 그래서 힐난하는걸 택한다. 그건 칭찬하려는 용기보다 훨씬 쉬운 선택이니까. 잘하면 본전치기요, 못하면 욕먹는 사회에서. 누가 시도를 하고, 누가 가능성을 열까. 사회를 토양에 비유한다던데, 우리 사회는 비유하자면 소금 뿌린 토양 같다. 상처에 소금 뿌리면 아프듯이, 힘든 실패에 힐난만 돌아온다. 어떤 가능성도, 시도도, 희망도 죽어가는 토양. 사회.

실수에 관대하지 않는 사회

실수에 관대하지 않으면 사람은 수동적이게 된다. 모든 사람은 경험주의자이다. 사회는 완벽주의자를 원한다. 허나, 사람으로 구성된 사회 역시 경험주의자일 수 밖에 없다. 실수에 관대하지 않는 사회는 시도와 가능성을 지워낸다. 용서와 관용이 없는 사회가 진심 어린 사과도 지워내듯이. 실수에 관대하지 않은 사회는 수동적인 사람을, 수동적인 사회를 만들어낸다. 수동적인 사회는 죽어버린 사회다. 병실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식물인간처럼.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 모 아니면 도가 됐을까. 다수가 침묵한 대가는 양극단주의자에게 끌려가는 사회다. 그리고 그 침묵은 관대하지 않은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다.

완벽주의자들의 자존감

완벽주의자들은 자존감이 대체적으로 매우 약하다. 왜냐면 자존감이란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인정하고 스스로 존중할 때 생겨나는 것인데, 나 자신을 인정한다는 것은 나라는 불완전한 인간을 먼저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 자체가 불완전한데, 완벽주의자들은 불완전한 것을 인정치 않고 완벽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완벽주의자들은 대체적으로 한 가지 일을 하는데 탁월하다. 꼼꼼하고 빈틈없이 마무리 짓는다. 허나,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하면 뭐 하나 완벽히 끝맺음하지 않고 이것저것 다 손대고 있으므로 신경이 분산되고 쉽게 멘탈이 약해진다. 완벽하게 끝맺음한 결과가 나오질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게으른 완벽주의자로 변신한다. 당장의 쉬운 일들은 완벽하게 해놓지만, 해야만 하는 일들, 당장 성과가 안 ..

잃는 것을 두려워하면 잡아먹힌다.

잃는 것을 두려워하면 잡아먹힐 뿐이다. 기세에서 밀려 조금씩 조금씩 내주다가 결국 전부를 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내 뜯어먹혀 가고 있는 자신을 합리화하기 시작한다. 서로가 서로를 교묘히 뜯어먹는 숨겨진 야만의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역설적으로 야만성을 드러내야만 한다. 너 죽고 아니면 내가 죽는 올-인 정신은 때때로 필요하다. p.s 물론 그건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드러난 야만성은 공공연한 공격의 대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숨겨진 야만성에 숨어 상대를 뜯어먹는 이들은 충분히 쎄고 쎘다. 비열한 시대다.

감정적-불꽃같은 삶

감정적이라는 말. 그것은 부정적인 느낌을 담고 있다. 그것은 마치 '이성적'인 사람에 반대되는 느낌이며, 사람이라면 이성적 마음을 응당 지녀야 한다는 것이 전제에 부정된 느낌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우리가 감정적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여기게 된 것이. 분명 강렬했던 감정들은 우리의 시야를 어둡게 한다. 하나에 매몰되게 만들어 상황을 악화시키고 최악의 상황으로 내닫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은연중에 감정적인 상황을 회피하고 부정한다. 잃지 않기 위해. 손해보지 않기 위해. 귀찮아지지 않기 위해. 하지만 그 강렬한 감정들이, 그 좁디 좁은 시야에 가로막힐 정도로 숨 막힐듯한 그 매몰이 왜 그리 빛나보일까. 그건 아마도 그 강렬함 만큼이나 쉬이 사그라들어버리기 때문은 아닐까. 마치 다시는 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