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존실/떠오르는 570

감성의 시대

사람들은 요즘 시대를 감성의 시대라고 말한다. 애플이 감성적인 디자인으로 성공했고, 삼성이 갤럭시 플립으로 성공했듯이. 그러나 요즘 사람들이 감성을 찾는 것은 역으로 감성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인류가 야만의 시대에 확고한 기준점이 되어주었던 이성을 찾았듯이. 사람은 결핍된 것을 원하는 법이다. p.s 누군가는 그럼 왜 연대의식을 찾지 않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결핍은 원하는데 있지 아니한 것이다. 연대의식은 결핍된 것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무쓸모해진 것이다. 사회적 편의성이 잘 이루어질수록 사람들이 파편화되는 건 필연적일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예의

우리가 가난에 대해 늙음에 대해 실패에 대해 조금만 더 예의를 가졌음 좋겠어요. - 82cook 어느 이용자의 글에서 p.s 기품이 느껴지는 문장이다. 우리 사회는 가난을 멸시하고, 늙음을 우습게 알고, 실패를 비웃는다. 가난한 이들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 틀딱이면서 꼰대짓하네. 응~ 실패자 말은 안들어. 우리 사회는 약자에 대해 매우 가혹하다. 약자도, 가난도, 늙음도, 실패도 모두 경쟁에서 도태된 것들이라 치부하기에.

사소한 정치

사소한 습관이 인생을 바꾸듯이 사소한 정치가 사회를 바꾼다. 정치는 매우 사소해서 직접 와 닿지 않는다. 당장 내가 투표를 한다고 해서 뭔가 내 삶이 바뀌거나, 사회가 바뀌거나, 나에게 직접적으로 이득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그 사소한 것들이 어느 새 모여서 사회를 바꾸고, 바뀐 사회는 내 삶의 방향마저 바꿔버린다. 완성도는 디테일에서 차이가 나듯이, 사소하지만, 사소하기에 중요하다. 직접적인 변화를 이끌 수 없는 사람들에겐 이 사소함이 유일한 무기다.

어리석은 자기연민

자기애(愛)가 많은 사람은 자존감이 떨어지면 자기연민에 빠지기 쉽다. 자기연민에 빠지지 말자. 자기연민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다. 타인이 배려해줘야 할 의무는 없다. 그냥 욕 한번 시원하게 박고 털고 일어나는 것이 정신건강에 훨씬 좋다. 힘든 것에 원인을 찾지 말자. 힘든 건 그냥 힘든거다. 감정의 원인을 찾아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문제의 원인을 찾아 해결해야지.

문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가능성의 문제다. 현실에서 얼마나 실현할 수 있느냐 가능성의 문제다. 명분의 문제가 아니다. 기분의 문제다. 내 기분이 지금 어떠한가 뒤에 명분이 붙을 뿐이다. 세상 돌아가는 대부분이 이렇다.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에 휘둘리지 말고, 실현 가능성을 보라. 명분에 휘둘리지 말고, 말하는 의도를 보라.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태도다.

힘 잃은 종교, 무너진 도덕과 질서

종교의 힘은 내세관에서 나온다. 종교는 내세관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 이야기를 끝으로 사람을 교화시키고 믿음을 갖게 만든다. 그리고 그 내세관은 대체적으로 현실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 이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현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과거엔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과학적으로 이해되고 설명되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종교를 믿지 않는다. 현실을 믿는다. 그래서일까. 도덕과 질서가 무너지는 느낌이다. 법은 최대한의 질서가 아니라 최소한의 질서다. 법만 지키면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니라 법을 지키지 않으면 사회에서 격리해야 할 대상이 된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법대로 했는데? 불법 아닌데? 하며 법을 어기지 않았으니 문제없다는 것을 방패로 삼는다. 법대..

부끄러움

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일. 우린 늘 부끄러움으로부터 도망쳤다.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온갖 핑계를 댔지만, 결국 그것은 부끄러움으로부터의 도망이었다. 하지만 다 괜찮다. 부끄러움도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일이다. 그 땐 그랬었지. 저 땐 저랬었지. 하며 털어내버리고 말 일이다. 웃으며 소주 한 잔하고 넘겨버릴 일이다. 부디 그 부끄러움을 핑계삼아 도망치지 말자. 지금의 고통이, 미안함이, 부끄러움이. 훗날 웃으며 넘겨 버릴 수 있도록. 나의 부족함이 상대를 힘들게 할 지라도, 힘든 상대를 보는 것이 무척 고통스러울지라도 이기적인 아픔이라 생각하고 견디자. 견디는만큼 더 잘해주자. 포기하는 것은 결국 그 부끄러움으로부터 도망침이다. 그 땐 그랬지...하며 지금의 미안함이 훗날의 민망함으로..

구분짓기

사람들은 늘 구분지으려 한다. 자본으로, 사회적 권력으로 계급을 나누고, 구분 짓는다. 그리고 그 구분짓기는 계급적 위,아래뿐만 아니라 서로간의 차이에서도 발생한다. 누구는 선이고, 누구는 악이고, 누구는 부정부패로, 누구는 도덕으로, 끊임없이 구분지으려 든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사회다. 누군가는 부정부패로 먹고 살고, 누군가는 성실하게 일해서 먹고 살고, 누구가는 사회적 부품으로서 역할을 다해 먹고 산다. 그 역할들을 선과 악으로, 저차원-고차원으로 나누어 서로 깎아내리고 구분지으려 든다. 그러나 그것을 구분지을 필요는 없다. 그건 애초에 사회 그 자체, 하나니까. 선과 악이든 고차원 저차원이든, 모든 것들이 인간에서 출발된 것들이다. 인간이 없으면 세상도 없고, 사회도 없다. 의미가 없다. 결국..

가능성과 유유상종

사람은 미완의 존재이기에 가능성이 열려 있다. 그 가능성은 죽는 날까지 알 수 없다. 일찍부터 재능을 개화해 쭉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 사람도 있고, 일찍 성공했으나 망해서 사라져버린 사람도 있고, 재능을 개화하지 못한 채 평범히 살다가 죽은 이들도 있고 각양각색이다. 허나 그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타고난 재능이나 성격 외에도 환경적 요인이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사회적 배경, 생활 습관, 심리적 요인 등에 큰 영향을 주어 삶에 대한 태도 자체를 바꿔놓고 나아가 삶 자체를 바꾸기도 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끼리끼리 만난다. 비슷한 지적 수준, 비슷한 직업, 비슷한 배경, 비슷한 생활 양식까지.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남으로서 앞날에 대한 가능성이 실패하지 않도록 위험을 관리한다. 물론 비슷한 수준의 사..

희망을 노래해야 한다.

우린 현실을 직시하되, 희망을 노래해야 해요. 행동의 목표는 현실로 세우지만, 원동력은 희망이니까. 요즘 뉴스를 보면 하나같이 전망이 어두워요. 고구마 100개 먹은 현실만 앞에 있죠. 모두가 불안한 시대에요. 전 원래부터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비관론자에요. 그렇기에 후회를 많이 했고, 자꾸만 돌이켜보고, 늘 회피하고, 도망쳤어요. 하지만 미래는 반드시 오고 우린 받아들일 수 밖에 없어요. 그렇기에. 그렇기에 우린 희망을 노래해야만 해요. 삶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 되니까요. 물질적 가치와 무형의 가치에서 늘 헤매이지만, 그 혼란에서도 우린 삶을, 희망을 노래해야만 해요.

소금 뿌린 토양 같은 사회

경쟁이 치열해서일까. 우린 칭찬에 인색한 것 같다. 칭찬하면 내 능력이 상대방에 뒤쳐진다는 걸 인증하는 것처럼. 그래서 힐난하는걸 택한다. 그건 칭찬하려는 용기보다 훨씬 쉬운 선택이니까. 잘하면 본전치기요, 못하면 욕먹는 사회에서. 누가 시도를 하고, 누가 가능성을 열까. 사회를 토양에 비유한다던데, 우리 사회는 비유하자면 소금 뿌린 토양 같다. 상처에 소금 뿌리면 아프듯이, 힘든 실패에 힐난만 돌아온다. 어떤 가능성도, 시도도, 희망도 죽어가는 토양. 사회.

실수에 관대하지 않는 사회

실수에 관대하지 않으면 사람은 수동적이게 된다. 모든 사람은 경험주의자이다. 사회는 완벽주의자를 원한다. 허나, 사람으로 구성된 사회 역시 경험주의자일 수 밖에 없다. 실수에 관대하지 않는 사회는 시도와 가능성을 지워낸다. 용서와 관용이 없는 사회가 진심 어린 사과도 지워내듯이. 실수에 관대하지 않은 사회는 수동적인 사람을, 수동적인 사회를 만들어낸다. 수동적인 사회는 죽어버린 사회다. 병실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식물인간처럼.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 모 아니면 도가 됐을까. 다수가 침묵한 대가는 양극단주의자에게 끌려가는 사회다. 그리고 그 침묵은 관대하지 않은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다.

완벽주의자들의 자존감

완벽주의자들은 자존감이 대체적으로 매우 약하다. 왜냐면 자존감이란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인정하고 스스로 존중할 때 생겨나는 것인데, 나 자신을 인정한다는 것은 나라는 불완전한 인간을 먼저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 자체가 불완전한데, 완벽주의자들은 불완전한 것을 인정치 않고 완벽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완벽주의자들은 대체적으로 한 가지 일을 하는데 탁월하다. 꼼꼼하고 빈틈없이 마무리 짓는다. 허나,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하면 뭐 하나 완벽히 끝맺음하지 않고 이것저것 다 손대고 있으므로 신경이 분산되고 쉽게 멘탈이 약해진다. 완벽하게 끝맺음한 결과가 나오질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게으른 완벽주의자로 변신한다. 당장의 쉬운 일들은 완벽하게 해놓지만, 해야만 하는 일들, 당장 성과가 안 ..

잃는 것을 두려워하면 잡아먹힌다.

잃는 것을 두려워하면 잡아먹힐 뿐이다. 기세에서 밀려 조금씩 조금씩 내주다가 결국 전부를 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내 뜯어먹혀 가고 있는 자신을 합리화하기 시작한다. 서로가 서로를 교묘히 뜯어먹는 숨겨진 야만의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역설적으로 야만성을 드러내야만 한다. 너 죽고 아니면 내가 죽는 올-인 정신은 때때로 필요하다. p.s 물론 그건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드러난 야만성은 공공연한 공격의 대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숨겨진 야만성에 숨어 상대를 뜯어먹는 이들은 충분히 쎄고 쎘다. 비열한 시대다.

수동적

문득, 아침마다 익숙해져 간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삶에 익숙해지고 새로운 것을 하지 않게 된다. 그저 스케줄대로, 수동적으로 살아갈뿐. 무언가에 대한 흥미가 사라지고 그저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익숙한대로 시간을 지낼 뿐이다. 나이 든 이들이 옛 노래만 듣거나 봤던 드라마만 보는 것도. 혹여 일에만 매달리는 것도, 어쩌면. 그렇기에 좀 더 긍정적으로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자극을 찾아 다녀야 한다. 그것이 삶을 피곤하게 만들지라도.

자존감에 색상입히기

자존감이 있어야 기본적인 사람이 된다. 기본적인 사람. 사람으로서의 출발선. 그리고 그것에 자신만의 색을 입혀야 매력적인 사람이 된다. 그 색이 검은 색이든, 흰 색이든, 그 어떤 색이든 간에. 그 색이 안 맞는 사람은 나를 피할 것이고, 그 색이 맞는 사람은 나에게 다가올 것이다. 색이 있어야 판단이 서고, 그제서야 그 사람의 매력이 보인다.

고이면 썩는다.

제자리에 고여 있으면 썩는다는 말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고여버린 이들이 있다. 나는 한 때 그들을 위해서 우직하게 그 자리에 서 있는 소나무 같은 사람이 되길 바랐다. 그러나 사람은 나무가 아니었다. 사람은 움직이는 동물이었고, 한 때는 나 역시 고여 있었으나 결국 나아가는 사람이었다. 스스로가 나아가지 못하면 그 누구도 곁에 있어줄 수 없다. 스스로 빠진 구렁텅이는 스스로 헤쳐나와야만 한다. 주변 사람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이 없다. 그저 해줄 수 있는 것은 기다려주는 것 밖에.

동물-바지에 관하여

사족보행 동물에게 있어서 바지는 어떤 형태일까. 하나 재밌는 논쟁거리에 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강아지가 추울까봐 바지를 입혔어요' 라고 말한다면 강아지가 입은 바지 형태는 어떨까. 아마도 대다수가 뒷다리부터 꼬리, 골반을 감싸안는 형태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면 앞다리는 어떤가. 말 그대로 앞'다리'지 않은가. 바지는 밑으로는 다리를 넣어 가랭이를 지나치고, 위로는 통으로 터져 있는 의류를 가리킨다. 그럼 '사족'보행인 강아지들의 바지는 뒷다리부터 출발해 꼬리와 골반만 감싸는, 몸통을 세로로 감싸는 것이 아니라 네 다리 모두 집어넣고 몸통을 가로로 절반만 감싸안는 형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 누군가는 그런 형태면 골반을 가릴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사족보행 동물들의 골반은 뒷쪽 윗부분에 걸쳐 ..

좋아했었다.

이른 오전에 집을 나서 시원한 공기를 맞으며 생각했고 종종 직장에서 보이는 한 여성분을 보며 또 생각했다. 정말, 어쩌다, 간혹. 그립다고, 좋아했었다고. 오늘 그 여성을 보며 내가 왜 그녀를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은 그녀지, 그 여성분이 아니니까. 그녀는 모자를 즐겨 썼었고, 마스크를 자주 썼다. 꽁꽁 감췄지만 슬쩍 보이는 하안 피부는 날 설레게 만들었었다. 그리고 제멋대로인 그녀가 나는 무척 좋았다. 이젠 추억을 너머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그녀지만, 그럼에도 이따끔 내 삶 속에서 이렇게 나타나곤 한다. 그리운 느낌이지만 그립진 않다.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 그리운 느낌이다. 그녀를 참 많이도 좋아했었다. 참 많이도.

왕관은 무게를 견뎌야 빛난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라고 하죠. 왕관은 원하지만 무게를 짊어지고 싶어하진 않는 것 같아요.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재물을 원하지만 책임과 의무는 원치 않죠. 당연해요. 자연스러운 본능이지요. 하지만 자연스러운 본능이라고 해서 그게 옳다거나 당연하다는 건 아니에요. 본능대로 행동한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지요. 저도 의무나 책임을 더 짊어지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더 큰 권력이나 더 많은 재물을 탐하지도 않죠. 정확히 말하자면, 재물은 다다익선이라 생각하고 더 많이 얻길 바라지만 그것이 더 큰 책임과 의무를 행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구태여 얻으려고 하지 않을 거란 거에요. 하늘에서 툭 떨어진다면 고맙게 받겠지만 말이에요. 떳떳해야죠. 내가 일하고, 일한 만큼 정직하게 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