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존실/떠오르는 586

돈에 집착하는 이유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그토록 돈에 집착하는 것은 돈이 우리의 욕망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욕망이라는 것은 결핍과 필요의 합작으로, 우린 끊임없이 무언가 욕망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무엇인가 욕망한다는 것은 결핍을 해소하려는 목적 의식을 넘어, 어떤 방식으로든 생각과 행동이 그것에 얽매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돈을 갈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욕망을 이루기 위한 강력한 수단을 소유한다는 것(결핍 해소)을 넘어 나의 사고 방식들이 돈에 얽매여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우리가 돈에 집착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경제적 자유를 통해 돈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생각과 행동을 하고 싶다는, 자본주의 하에서 진정한 자유를 맛보기 위한 노예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아닐까 싶다.

이해하지 않는 사회

우린 조금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이해하려는 연극을 하고 있을 뿐.우리 사회는 다른 의견을 수용치 못한다.의견이 나뉘었을 때 우린, 내가 진실을 잘못 전달했기에 혹은 상대가 잘못 이해했기에 결론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꾸만 추가 설명하려 하고, 설득하려 하고, 답답해하다 멍청하다며 공격 한다. 아니다.상대는 나와 같은 사람이다.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다. 그렇기에 때때로 내 의견에 동조하지 않더라도, 설령 내 의도와 달리 받아들여 그렇게 됐더라도 우린 그것을 수용하면서 내 의견을 펼쳐야 한다. 설득이 아니라 주장이다. 주장을 해야 한다.

그리움

퇴근하고 집에 가는 길, 함박 눈을 맞으며 걸으면 문득 외롭거나 그리워진다.아니, 외로운지 잘 모르겠다. 분명 그리운 것과 고독은 별개의 감정인데.그립다는 것이 외로운 것을 나타내는 것일까.외로움을 다른 매체로 떠넘기는데 익숙해져 버려서, 외롭다는 감정도 잊혀지는 것 같다.그러나 그립다는 감정만큼은 분명하다. 오자마자 글을 쓰는 것이 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니까.날씨가 추워서 그리운 것일까. 아니면 내리는 함박 눈이 그립게 만드는 것일까.그리운 감정을 느껴보는 것도 오랜만이다.난...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일까.명확한 대상은 없는데 그냥 막연히 그립다는 느낌이 든다.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시절일까. 그 사람일까. 그 상황일까. 무엇일까........글을 써야겠다 체크해놓은 것도 몇 번. 결국 지금까지 글을..

멋진 사람이 되려면

상상은 구체화다.구체화는 경험이 많을수록 선명해진다.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면멋지다고 생각한 사람을 떠올려라.그리고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끊임없이 생각하라.행동도, 사고도 그 사람 자체가 되어라.p.s경험이 중요한 이유다.p.s2경험은 지식적 측면이든, 행동적 측면이든 내재화하지 않으면 의미없다.p.s3롤 모델의 중요성이다.

언어의 힘

사람들은 말하는 것이 당연해서 말의 중요성과 힘을 쉽게 생각하곤 한다. 공기가 흔해 공기의 소중함과 중요성을 잊고 지내는 것처럼. 자신만의 언어가 있다는 것. 그래서 그 언어로 표현하고, 상대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있는지 깨닫는다면, 큰 힘에 큰 책임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헛소리로 상대방을 매도하거나 상처 주는 일이 반으로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말이라는 것, 글이라는 것을 인터넷을 통해 너무나도 손쉽게 내뱉고, 또 손쉽게 파급력을 미치기에 우린 언어의 힘과 중요성을 쉬이 잊어버린 것 같다.

유일한

그가 가진 건 돈 뿐이었다.이것은 그에 대한 상태를 표헌한 하나의 문장이지만 받아들여지는 의미는 저마다 다르다. 그가 가진 건 돈뿐이었다-라는 문장에서 돈의 소유가 강조되었으면 그는 부러운 대상이 되지만, 돈 이외의 것에 대한 무소유가 강조되었으면 안타까운, 동정의 대상이  된다. 어느 것에 강조의 방점이 찍히느냐는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에 저 글을 쓴 이의 의도, 주변 맥락, 상황 또는 받아들이는 이가 어떻게 상황을 상상하는가 등 매우 다채롭다.이처럼 유일한 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는 가치 중립적이지만 담긴 의미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그렇기에 우린 말과 글만큼은 담긴 의미를 중시한다. 물론 말과 글은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와 상관없이 그저 드러나는게 다다.그 드러남에서 우린 어떻게 의미를 부여할..

민주주의 정책 결정의 역설

백수는 시간이 남아돌아 행동을 통해 온갖 정책적 분탕을 치지만 정작 살기 바쁜 시민들은 시간이 없어 중요한 정책에서 밀려난다. 고대 그리스가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노예가 온갖 업무를 맡았다는 것이다. 원래 토론이니 정책 결정이니 그 고상한 일들은 언변과 글이 쓰여진 서류가 있어야 가능하다. 노예제가 사라지고 만민이 평등하게 된, 모두가 유권자인, 현대 사회에 들어 민주주의는 과연 잘 흘러가고 있을까. 백수든 시민이든 똑같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원칙이 지켜져야 하는 것은 맞으나, 이것들이 사회적 비용과 혼란만 가중시키고 민의가 왜곡된다는 점에서 참으로 역설적인 비극이구나 싶다. (물론 백수의 의견도 하나의 민의다. 허나 경제적 상황으로 인한 시민과 백수의 정책..

복잡하게 나쁜 사람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 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p.s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132p~133p 중 p.s2 저 문구 하나로도 이 책은 가치가 충분히 있다 생각한다. 저 문구로 보고 이번에 책을 샀다. 아쉽게도 아직 읽진 못했다. p.s3 이만큼 요즘 사회에 관계맺음에 대한 사람의 접근방식-사고를 제대로 말해주는 문구가 있을까. 난 '원래 안 그러는데. 어쩔 수 없어서.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주변 여건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선택을 한 사람'이지만, 상대는 '그냥 개x끼인 것을. 피치 못할 사정이니 환경이..

강자의 기분이 약자의 질서다.

강자의 기분이 곧 약자의 질서다. 이만큼 사회 관계를 꿰뚫는 말이 있을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늘 수직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의 정도가 어느 정도냐, 어떠한 것이 기준(돈,권력,직급,매력,폭력 등)이냐 차이만 있을 뿐. p.s 맹수의 기분이 곧 약자의 질서다. 캐슬2:만인지상 57화 중 p.s2 사회 생활을 하다보니 느끼는 것이 있다. 1.직급이 높을수록 무례한 인간이 많다. 평소엔 점잖은 척 가면을 쓰지만, 자신보다 직급이 낮거나 약한 인간에게 자신의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그래도 뭐라할 사람이 없으니까. (회사는 결코 이성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결재 받을 때 상사의 기분을 살피는 건 기본이다. 상사의 취향이나 비위에 맞추는 건 사회생활능력이다.) 2.나이먹을수록 무례한 인간이 많다. 비슷하..

감성의 시대

사람들은 요즘 시대를 감성의 시대라고 말한다. 애플이 감성적인 디자인으로 성공했고, 삼성이 갤럭시 플립으로 성공했듯이. 그러나 요즘 사람들이 감성을 찾는 것은 역으로 감성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인류가 야만의 시대에 확고한 기준점이 되어주었던 이성을 찾았듯이. 사람은 결핍된 것을 원하는 법이다. p.s 누군가는 그럼 왜 연대의식을 찾지 않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결핍은 원하는데 있지 아니한 것이다. 연대의식은 결핍된 것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무쓸모해진 것이다. 사회적 편의성이 잘 이루어질수록 사람들이 파편화되는 건 필연적일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예의

우리가 가난에 대해 늙음에 대해 실패에 대해 조금만 더 예의를 가졌음 좋겠어요. - 82cook 어느 이용자의 글에서 p.s 기품이 느껴지는 문장이다. 우리 사회는 가난을 멸시하고, 늙음을 우습게 알고, 실패를 비웃는다. 가난한 이들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 틀딱이면서 꼰대짓하네. 응~ 실패자 말은 안들어. 우리 사회는 약자에 대해 매우 가혹하다. 약자도, 가난도, 늙음도, 실패도 모두 경쟁에서 도태된 것들이라 치부하기에.

사소한 정치

사소한 습관이 인생을 바꾸듯이 사소한 정치가 사회를 바꾼다. 정치는 매우 사소해서 직접 와 닿지 않는다. 당장 내가 투표를 한다고 해서 뭔가 내 삶이 바뀌거나, 사회가 바뀌거나, 나에게 직접적으로 이득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그 사소한 것들이 어느 새 모여서 사회를 바꾸고, 바뀐 사회는 내 삶의 방향마저 바꿔버린다. 완성도는 디테일에서 차이가 나듯이, 사소하지만, 사소하기에 중요하다. 직접적인 변화를 이끌 수 없는 사람들에겐 이 사소함이 유일한 무기다.

어리석은 자기연민

자기애(愛)가 많은 사람은 자존감이 떨어지면 자기연민에 빠지기 쉽다. 자기연민에 빠지지 말자. 자기연민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다. 타인이 배려해줘야 할 의무는 없다. 그냥 욕 한번 시원하게 박고 털고 일어나는 것이 정신건강에 훨씬 좋다. 힘든 것에 원인을 찾지 말자. 힘든 건 그냥 힘든거다. 감정의 원인을 찾아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문제의 원인을 찾아 해결해야지.

문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가능성의 문제다. 현실에서 얼마나 실현할 수 있느냐 가능성의 문제다. 명분의 문제가 아니다. 기분의 문제다. 내 기분이 지금 어떠한가 뒤에 명분이 붙을 뿐이다. 세상 돌아가는 대부분이 이렇다.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에 휘둘리지 말고, 실현 가능성을 보라. 명분에 휘둘리지 말고, 말하는 의도를 보라.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태도다.

힘 잃은 종교, 무너진 도덕과 질서

종교의 힘은 내세관에서 나온다. 종교는 내세관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 이야기를 끝으로 사람을 교화시키고 믿음을 갖게 만든다. 그리고 그 내세관은 대체적으로 현실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 이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현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과거엔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과학적으로 이해되고 설명되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종교를 믿지 않는다. 현실을 믿는다. 그래서일까. 도덕과 질서가 무너지는 느낌이다. 법은 최대한의 질서가 아니라 최소한의 질서다. 법만 지키면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니라 법을 지키지 않으면 사회에서 격리해야 할 대상이 된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법대로 했는데? 불법 아닌데? 하며 법을 어기지 않았으니 문제없다는 것을 방패로 삼는다. 법대..

부끄러움

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일. 우린 늘 부끄러움으로부터 도망쳤다.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온갖 핑계를 댔지만, 결국 그것은 부끄러움으로부터의 도망이었다. 하지만 다 괜찮다. 부끄러움도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일이다. 그 땐 그랬었지. 저 땐 저랬었지. 하며 털어내버리고 말 일이다. 웃으며 소주 한 잔하고 넘겨버릴 일이다. 부디 그 부끄러움을 핑계삼아 도망치지 말자. 지금의 고통이, 미안함이, 부끄러움이. 훗날 웃으며 넘겨 버릴 수 있도록. 나의 부족함이 상대를 힘들게 할 지라도, 힘든 상대를 보는 것이 무척 고통스러울지라도 이기적인 아픔이라 생각하고 견디자. 견디는만큼 더 잘해주자. 포기하는 것은 결국 그 부끄러움으로부터 도망침이다. 그 땐 그랬지...하며 지금의 미안함이 훗날의 민망함으로..

구분짓기

사람들은 늘 구분지으려 한다. 자본으로, 사회적 권력으로 계급을 나누고, 구분 짓는다. 그리고 그 구분짓기는 계급적 위,아래뿐만 아니라 서로간의 차이에서도 발생한다. 누구는 선이고, 누구는 악이고, 누구는 부정부패로, 누구는 도덕으로, 끊임없이 구분지으려 든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사회다. 누군가는 부정부패로 먹고 살고, 누군가는 성실하게 일해서 먹고 살고, 누구가는 사회적 부품으로서 역할을 다해 먹고 산다. 그 역할들을 선과 악으로, 저차원-고차원으로 나누어 서로 깎아내리고 구분지으려 든다. 그러나 그것을 구분지을 필요는 없다. 그건 애초에 사회 그 자체, 하나니까. 선과 악이든 고차원 저차원이든, 모든 것들이 인간에서 출발된 것들이다. 인간이 없으면 세상도 없고, 사회도 없다. 의미가 없다. 결국..

가능성과 유유상종

사람은 미완의 존재이기에 가능성이 열려 있다. 그 가능성은 죽는 날까지 알 수 없다. 일찍부터 재능을 개화해 쭉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 사람도 있고, 일찍 성공했으나 망해서 사라져버린 사람도 있고, 재능을 개화하지 못한 채 평범히 살다가 죽은 이들도 있고 각양각색이다. 허나 그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타고난 재능이나 성격 외에도 환경적 요인이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사회적 배경, 생활 습관, 심리적 요인 등에 큰 영향을 주어 삶에 대한 태도 자체를 바꿔놓고 나아가 삶 자체를 바꾸기도 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끼리끼리 만난다. 비슷한 지적 수준, 비슷한 직업, 비슷한 배경, 비슷한 생활 양식까지.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남으로서 앞날에 대한 가능성이 실패하지 않도록 위험을 관리한다. 물론 비슷한 수준의 사..

희망을 노래해야 한다.

우린 현실을 직시하되, 희망을 노래해야 해요. 행동의 목표는 현실로 세우지만, 원동력은 희망이니까. 요즘 뉴스를 보면 하나같이 전망이 어두워요. 고구마 100개 먹은 현실만 앞에 있죠. 모두가 불안한 시대에요. 전 원래부터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비관론자에요. 그렇기에 후회를 많이 했고, 자꾸만 돌이켜보고, 늘 회피하고, 도망쳤어요. 하지만 미래는 반드시 오고 우린 받아들일 수 밖에 없어요. 그렇기에. 그렇기에 우린 희망을 노래해야만 해요. 삶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 되니까요. 물질적 가치와 무형의 가치에서 늘 헤매이지만, 그 혼란에서도 우린 삶을, 희망을 노래해야만 해요.

소금 뿌린 토양 같은 사회

경쟁이 치열해서일까. 우린 칭찬에 인색한 것 같다. 칭찬하면 내 능력이 상대방에 뒤쳐진다는 걸 인증하는 것처럼. 그래서 힐난하는걸 택한다. 그건 칭찬하려는 용기보다 훨씬 쉬운 선택이니까. 잘하면 본전치기요, 못하면 욕먹는 사회에서. 누가 시도를 하고, 누가 가능성을 열까. 사회를 토양에 비유한다던데, 우리 사회는 비유하자면 소금 뿌린 토양 같다. 상처에 소금 뿌리면 아프듯이, 힘든 실패에 힐난만 돌아온다. 어떤 가능성도, 시도도, 희망도 죽어가는 토양.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