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존실/잡념들-생각정리 360

행복의 역치가 높아져 버린 시대

행복의 역치가 너무 높아져 버린 시대다.문득, 내가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그 때가 잘나서가 아니라, 200원 300원 용돈으로 학교 앞 문방구점에서 간식만 사먹어도 행복감을 느꼈던,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하교만 해도 즐거웠던, 그 때 그 감정이 그립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행복 역치는 너무나도 높아져 버린 것 같다.

독선의 시대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은 없다. 도덕 자체가 상대적이기에. 그렇기에 공인에 대한 평가는, 공적인 부분과 사생활은 분리되어 이루어져야 하는데, 도덕적 정당성이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무기가 되는 상황에선 절대로 불가능하다. 무기는 구분하지 않으니까.대한민국은 손가락 살인으로 사이버 불링이 어느 때보다 심각한데도 불구하고,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그냥 가벼운 글이라 하여, 책임감은 분산되고, 처벌은 힘들다. 그리고 손가락 살인마들은 도덕적 정당성을 무기삼아 독재를 하려 든다.독선의 시대 : 도덕적 무결성 추구는 모든 것을 검열하는 이슬람국가로 돌아올 것이다.

설득

설득은 이해의 강요가 아니라 선택의 기다림이다.요즘 말할 수 있는 창구가 많아져서 그런가.말할 자격이 없는 이들이 말을 많이 한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말하는데 무슨 자격이 필요해요? 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나 역시 말하는데 무슨 자격이 필요하나. 하는 생각이다.그러나 요즘 손가락으로 말하는 이들의 언어 행위를 보고 있자면, 언어 행위에도 자격증 시험을 도입해야 할 정도로 그저 배설만 하는 인간들이 참으로 많다. 그들의 언어 행위는 언어가 아니라 배설이다. 손가락으로 배설하고, 상처 입히고, 상대를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오만하게도 자신이 옳다는 확신에 차 있다. 아니,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기에 폭력을 저지르는 것이다.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이 옳다고 확신할 수 없다.오캄의..

돈의 독주시대, 명예와 권력이 사라진 사회

오래전에도 썼던 것 같은데. 편지에 잠깐 언급했던 것 같다. 한국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뭐 끝도 없는 화수분이니까. 사회를 분석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지금 대한민국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돈의 독주라고 말하고 싶다. 모든 것은 돈으로 귀결되어 버리고 있다. 그래서 뭐?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돈보다 중요한 가치가 사라져버리고 있다거나 뭐 그러한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가치란 주관적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런들 저런들 도덕, 윤리적으로 접근하면 소모적 논쟁만 될 가능성이 크다. 돈의 독주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비교적 명확하다. 정확히 말해, '독주' 상태가 문제다. 민주주의에서 삼권분립을 외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제갈량이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를 중..

언어의 중요성

어떤 언어도 감정을 정확히 나타낼 순 없지만, 그 비스무리한 지점에서 지칭할, 표현할 단어가 생겨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바로 이 언어의 문제기 때문이다.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나와 타인으로 나뉘어진 이상 우린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비스무리한 동류를 가리키는 언어가 있기에 우린 서로를 이해한다고 믿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있기에 나 자신을 넘어 우리, 사회라는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언어의 문제는 단순히 표현할 수단이 생긴다는 것을 넘어 더 복잡하고 중요하다.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많아지고, 정교해질수록 자신을 더 명확히 표현할 수 있고, 그 명확함 끝에서 우리는 서로에 대한 이해의 간극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

맞춤형 인간을 권하는 사회

요즘 필자의 티스토리에 들어오면 티키타카에 관해 검색하다 들어오는 이들이 참 많다는 걸 느꼈다. 또, 연인을 찾는다는 사람들을 보면 상당수가 대화가 잘 되는, 티키타카가 잘 되는 이를 조건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아졌다. 물론 대화가 되는 것은 중요하다. 사람들은 상호작용 하는 동물이니까, 평생을 같이 할 반려자라면 대화가 되어야지 않겠는가. 필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외모나 재력, 능력을 더 중시하던 과거와는 달리 소통을 중시하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강해졌다는 말이다. .....소통을 중시하는 건 문제가 안된다. 문제는 나와 소통이 완성된 사람을 구한다는 것이다. 맞춤형 추천, 맞춤형 구독, 맞춤형 서비스가 일상화 돼서 그런가. 연인도 맞춤식으로 구한다. 물론 안 맞는 것을 억지로 맞추는 것보다 첨부터 잘 ..

원하던 삶 생각하기

내가 원하던 삶은 무엇이었을까. 왜 사는가와 같은 질문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어떤 삶을 원했는가지. 말과 행동은 이유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이유는 늘 질문을 만들어내지만 그 질문의 답은 항상 정해져 있다. 바로 내가 원했다는 것. 살아가는 것은 결국 내가 원하던 것들을 이루는 과정이니까. 때론 우린 타의에 의해, 환경에 의해 원치 않는 말과 행동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삶에 일시적일 뿐이니 그저 보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삶은 결국 우리의 뜻대로 - 마음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실현시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하지만 그 전에 내가 원하던 삶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살아가는 이가 상당하다. 병 속 벼룩 이야기처럼, 현실적 제약으로 생..

최저 임금 1 만원 시대, 이것은 독일까.

필자는 오래전 올리케 헤르만이 지은 책의 리뷰를 통해 임금 상승에 대해 일부 이야기한 적이 있다. 다시금 생각해보아도 책에 말한 임금 상승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최저임금이 드디어 1만원을 넘어섰다. 이에 대해 자영업자나 생산자들의 말이 많다. 당연하다. 인건비는 어느 제품이나 서비스에서든 많은 비중을 차지 한다. 인건비는 지속적으로 들어가는 돈이고, 그것은 해가 지날수록 숙련이라는 이름하에 가격이 올라가기까지 한다.대한민국은 지금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한쪽에서는 먹고 살기 힘들다고 하고 있고, 한쪽에서는 비용이 부담된다고 난리다. 얼마전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비행기 항로가 가격이 배로 비싸도 전부 완판이 되었고, 인기가 치솟고 있어서 운항 횟수를 늘릴 계획이라는 기사를 본..

사라져가는 책임의식들

필자는 오래 전에 공동체주의가 바탕인 개인주의와 개인주의가 바탕인 공동체주의에 대한 글을 썼고,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집단주의와 개인주의가 바탕인 집단주의에 대해 언급했으며, 서양과 동양의 자본주의에 대해 공동체 의식과 개인주의를 엮어 글을 쓴 적이 있다. 세 주제 모두 다른 것 같으면서도 유사한 점이 많은데, 결국 말하던 것은 집단과 개인에 대한 접근 방식의 차이로 인한 동서양의 차이점 분석이었다. 공동체주의 하에서 발생된 개인주의는 한국사회의 흐름과 유사한데, 공동체주의에선 공동체가 개인에 우선하기에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하고, 오히려 그걸 강요한다. 그 결과 사회가 개인주의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공공을 위한 희생은 비웃음거리로 전락하며 공공 직업들은 니가 돈 벌기 위한, 능력 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유튜버의 책임의식과 사회적 비용들

오랜만에 낮잠을 잔 후, 늦게서야 글을 쓰기 시작한다.내일 출근 하려면 일찍 자야만 하는데. 12시가 지났으니 오늘인가. 그러고 보니 글을 쓴 지도 오래 되었구나 싶다. 그나마 쓴 것도 편지뿐이다. 여전히 난 편지를 쓰는게 좋다.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터놓는듯한 글들은 나름의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니까. 물론 그 편지로 늘 읽어주시는 분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의 소소한 일상들이, 글들이 그 분께 소소한 즐거움을 준다면 더욱 좋고.살다보니 점점 단순해지는 것 같다. 흐르는대로 살아왔고, 흐르는대로 살아가다보니. 그나마 있던 어릴 적 취미는 점차 시들어졌다. 누군가 평생 살아가려면 평생 취미로 즐길 수 있는 악기 하나, 활동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정말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단순히 감상..

적응

....결국 나도 사람이다.사회에 적응해야지.비판은 힘의 역학관계가 명확할 때, 가능성이 있을 때 하는 것이다. 변화시킬 힘이 있을 때. 그전까진 사회를 아무리 비판해봐야 끝에 남은 건 도태뿐. 사회를 개인이 이길 수 없으니까. 비판하는 이가 없는 사회는 죽어버린 사회지만 알 게 뭔가.외모나 과열된 경쟁 의식이 문제라는 걸 알지만, 그 흐름 속에서 그걸 비판해봐야 본인만 실패자, 투정 부리는 도태남이 될 뿐.고고히 홀로 이 사회를 완전히 벗어날 것이 아니면 대세에 맞추는게 편한 길이다.정상은 정상이고, 비정상은 비정상이다.제 아무리 비정상이라 외쳐봐야 본인만 도태다.사회에 순응하면 안된다.비판의식을 가져라.뭐 이런 것들이 나쁘진 않는데, 결국 사회 속에 살아갈 사람이라면 적응했어야 한다는 걸.이 사실을 ..

당연함과 익숙함의 대가

익숙하다는 건 당연시 된다는 것.당연하다는 것은 소중함을 잊게 된다는 것.당연한 일상 생활이라는 것은 없음에도 우린 일상 생활은 당연하다는 듯이 영위한다. 늘 하던 것이고, 늘 이루어지던 것이므로.깨끗한 옷, 깨끗한 집, 늘 맛있는 식사.그리고 편리한 사회적 인프라까지도.그것들은 모두 당연한 일상에 가려진 사소함이다.그 사소함들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을 당연하게 잊는다.망가진 인프라.망가진 삶의 양식.익숙함과 당연함으로 사소함을 잊은 대가를 우린 비일상이라는 미래로서 분명하게 치루게 될 것이다.p.s그래서 옛 사람들이 이성을 중시하고 감각을 그렇게 경계했는지도 모르겠다.p.s1이성이 광기의 시대를 가져오고, 그 이성이 돈의 가치로만 일의 가치를 측정하는 걸 보면 또 모르겠다.

선택, 노력 그리고 결과

신동엽씨가 말했던,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언이 있다. 인생에 정답은 없어요. 선택만 있는 거예요. 선택한 것에 책임지고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이만큼 인생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말해주는 문장이 있을까. 선택. 우린 선택을 하고, 노력으로써 그 과정에만 관여할 수 있다. 결과 그 자체는 우리 손을 떠난 것이다. 그러니 결과에 붙잡혀 있으면 안된다. 오지 않은 결과는 결국 결과가 아닌 상상일 뿐이고, 다가온 결과는 다음 선택의 참고자료일 뿐이니까. 노력. 노력은 정직하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노력은 정직하지만, 노력의 결과는 정직하지 않다. 아무리 노력해도 기회가 오지 않을 수 있고, 노력의 결과가 운빨의 결과에 뒤집힐 수도 있다. a를 넣어서 a만큼 결과가 바로 나타난다면, 그것만큼 지루한 인생이 어디있을까...

남의 인정

남의 인정에 매이게 되면 후회만 남는다. 열심히 달리다 문득 뒤돌아 봤을 때, 내가 왜 달리고 있지? 하는 의심과 후회뿐이다. 그러니 나 자신의 잣대로 보고 평가하라. 남이 뭐라든 어떻든 이 일은 내게 주어진 이상 내 업무고, 내가 처리하고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다. 성공 여부 와 스스로의 선(line)만 볼 뿐 타인의 여부따윈 중요치 않다. 그냥 스스로의 만족감이다. 그 뿐이다. p.s 그러나 타인의 인정을 너무 등한시해도 문제가 될 것이다. 타인과 함께인 사회 속에서 정말 외부 평판 상관없이 뚝심있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중도를 지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문제다. 그래도 순서를 매기자면, 1번은 나 자신의 잣대고 2번은 타인의 평판 순으로 판단하면 좀 더 살아가기 편하지 않을까.

공부와 행복

흔히 말하는,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지극히 원론적인 말. 공부는 인생을 위한 것이다. 헌데 우리는 공부를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한 수단으로 배워왔다. 공부 못하면 저런 일이나 한다. 저런 곳 간다. 공부 못하면 고생한다.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면 좋은 직장 얻는다. 미래의 신부가 바뀐다. 등등... 공부는 늘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했다. 여기서 좋은 직업은 흔히 말하는 고생을 적게 하면서 돈을 왕창 버는 직업이었고. 그러니 직업에 의한 차별은 늘 정당한 것으로 포장됐다. 니가, 학창시절 공부 안 한 대가인데 왜 투정부리냐?로. 공부는 타고난 머리, 개인의 노력, 가정 환경의 결과 였는데, 그것은 늘 순수한 노력에 의한 공정한 기회로 포장됐다. 말로만 공부는 인생을 위한 것이라고 했지. 실..

사연있는 캐릭터

사연은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든다. 그래서일까. 난 사연있는 캐릭터가 좋고, 사연있는 사람이 좋다. 그 사람의 사연을 듣고, 보고, 공감하며 이해해보는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그 사람의 매력에 푹 빠져든다. 사연은 하나의 또 다른 이야기다. 사연은 그 사람을 하나의 이야기로서 존재케 한다.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를 가진 사람은 그 사람만의 매력이 있다. 난 그러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야기를, 사연있는 캐릭터를, 그리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워커홀릭 - 세 종류의 워커홀릭

일에 미치지 않으면 미칠 거 같았다. 사랑하지 못해서 미칠 거 같고, 꿈도, 목포도 없어서 미칠 거 같고, 미치지 못해서 미칠 거 같았다. 일에라도 미쳐 있지 않으면.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공허한 시간들이 인생을 갉아먹을 거 같았기에. 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일로 하루를 보낸다. 그것엔 어떤 희망도 목표도 없다. 오직 이 하루를 사람답게 살아냈다는 안도감만 있을 뿐이다. p.s 워커홀릭에는 세 가지 종류의 워커홀릭이 있는 것 같다. 일에 대한 보상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그 보상을 위해 경쟁을 하는 자발적 워커홀릭. 일에 대한 보상을 위해, 경쟁을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문처럼 하루를 살아내기 위한 비자발적 워커홀릭. 그리고 업무와 관계된 수 많은 직간접인들의 밥그릇을 위해서 일을 놓을 수가 없..

저마다의 매력

사람은 저마다의 매력이 있다. 어떤 사람은 목소리가, 어떤 사람은 외모가 어떤 사람은 성격이, 어떤 사람은 분위기가. 난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을까. 난 누군가에 어떤 매력이 있다고 칭찬 받아본 적이 있나. 사람은 저마다 매력이 있다. 저마다의 매력을 하나로 모은다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글을 덮는다. p.s 매력은 타인의 인정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의존적이고 하잘 것 없는 것이지만, 사회적 동물로서 사람은 독립적으로만 살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매력은 자존감에 관여하여 독립성을 형성시키기도 한다. 참 모순적이다. 그래서 매력을 매력적이라 부르는 걸지도 모르겠다.

감정적-불꽃같은 삶

감정적이라는 말. 그것은 부정적인 느낌을 담고 있다. 그것은 마치 '이성적'인 사람에 반대되는 느낌이며, 사람이라면 이성적 마음을 응당 지녀야 한다는 것이 전제에 부정된 느낌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우리가 감정적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여기게 된 것이. 분명 강렬했던 감정들은 우리의 시야를 어둡게 한다. 하나에 매몰되게 만들어 상황을 악화시키고 최악의 상황으로 내닫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은연중에 감정적인 상황을 회피하고 부정한다. 잃지 않기 위해. 손해보지 않기 위해. 귀찮아지지 않기 위해. 하지만 그 강렬한 감정들이, 그 좁디 좁은 시야에 가로막힐 정도로 숨 막힐듯한 그 매몰이 왜 그리 빛나보일까. 그건 아마도 그 강렬함 만큼이나 쉬이 사그라들어버리기 때문은 아닐까. 마치 다시는 돌아..

맞춤형 매체와 사회성 고립, 약해지는 중재능력

맞춤형 매체가 증가함에 따라 사람들은 사회성을 잃어 버리고 있는 것 같다. 인터넷에선 내 입맛에 맞춰 세상이 변하니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니까.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더 이상 지지고 볶는걸 좋아하지 않는다. 조율하는 과정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하긴, 지지고 볶는 - 조율하는 과정이 즐거울 이유가 있을까. 싸우고 화내고 부딪치고 양보하고 포기하는 과정들이 반복되는데. 그래도 억지로라도 맞춰갈 수 밖에 없었다. 사회 활동이든 결혼이든 삶을 유지하려면 집단 생활이 필요했으니까. 허나, 이젠 필요없다. 음식은 배달하면 그만이다. 쇼핑은 택배로 주문하면 된다. 여가 생활? 온갖 즐거운 매체가 매일매일 쏟아진다. 업무에 필요한 협업은 최소한, 필요한만큼만 한다. 맞춤형 컨텐츠, 맞춤형 쇼핑, 맞춤형 매체. 나만..

단순하게

A를 말하면 A로 받아들이고 B를 말하면 B로 받아들이는,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대화의 의중을 파악하고 목적을 살피게 된다. 흔히 말하는 빌드업 이라는 걸 생각해 회피하기 바쁘다. 세상 사람들이 그러하니 나 역시 그리해야 한다. 아니, 내가 그렇게 돼서 그렇게 지례짐작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단순하게 보고자 하면 단순하게 볼 수 있으나, 대체적으로 그 빌드업이라는 것들이 결코 나에겐 좋은 의도를 지닌 것이 아니기에. 물론 너도 좋고 나도 좋으면 완벽하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득보는 자와 손해보는 자로 나뉘게 되고 거기서 대화가 오간다. 슬쩍 던져보고 슬며시 반응을 살핀다. 우습다. 대화가 아니라 연극을 하는 꼴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왜 사람이 정치적이 되는지 ..

권력의 착각

어느 자리에 오르게 되면 착각하게 된다. 본인이 말하면 알아서 딱딱 처리되기에. 직접 하지 않기에 현장 감각을 잊게 되고 어려움이나 힘든 걸 경험하지 않기에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말만으로 처리하는 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된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 말 한마디면 자연스레 이루어지니까. 그러나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 순간, 그것이 권력이었음을, 그토록 편안한(달콤했던) 것을 알게 된다. 오르되, 잊지 말아야 한다. 직접 해본다는 그 감각과 경험을 각인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좁아진 시야로 권력만 탐하는 망령이 되어 떠돌게 될 것이다.

부정적 감정들

부정적인 감정들을 품는 건 독을 품는 것이다. 그것들은 스스로 정신을 갉아먹으며 피곤하게 만든다. 그것들은 분노와 고통을 수반한다. 세상에도. 스스로에게도. 그 독이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면 그것도 괜찮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정신을 괴롭게 한다면 내려놓자. ....... 시간이 갈수록 분노는 사그라들고 고통만이 남는다. 내려놓자는 말은, 진정한 복수는 용서라는 뻔한 개소리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한 말이다.

공동체 해체와 도덕심 몰락

공동체가 해체 되면서 도덕심은 몰락하고 있다. 공동체 중심 사회에선 개인의 삶보다 공동체 유지를 더 중요시한다. 그렇기에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 여기고, 공동체를 위한 희생은 숭고한 것으로 포장된다. 그렇기에 공동체를 중시하는 사회에선 자연스레 서로를 감시하는 구조가 이루어진다. 모난 돌이 정맞게 된다. 사회 구성원들은 자발적으로 사회적 눈치를 보게 된다. 사회적 지탄이 두려우니까. 공동체 사회에서 공동체로부터 배척 당할까봐. 그러나 공동체가 해체되고 상호간의 연결고리가 느슨해지면서 사회적 지탄은 개인적 지탄으로 바뀌게 된다. 사회적 지탄에서 사회적은 희석되고 개인 대 개인의 지탄만 남는다. 사회적으로 부도덕하면 어떤가. 솔직히 나에게 부도덕하지만 않으면 되지 않는가. 그래서 수많은 연예인들이, 유튜버들이..

군계일학

군계일학. 닭의 무리 중에 한 마리 학 이라는 뜻으로 무리 속에서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를 지창할 때 쓰는 말이다. 낭중지추와 비슷한 뜻이기도 하다. 헌데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무리를 지으며, 유유상종이라는 말처럼 비슷비슷한 이들끼리 뭉쳐있는 것이 습성이다. 군계일학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를 두고 보면 빼어난 어떤 이를 지칭하는 말이나 무리를 염두해두고 보면 의미가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닭은 닭끼리 있을 때 어울리는 법이며, 학은 학끼리 있을 때 어울리는 법이다. 학이 닭 무리 속에 있다는 것은 그 학이 무리에 어울리지 못하는 이질적인 존재라는 걸 의미한다. 그 학은 어째서 그들의 무리에 어울리지 못하고 닭의 무리에 있게 됐을까. 한 마리의 학이 닭의 무리에 있어서 뛰어난 재능을 ..

돈과 관련된 2가지 재미

무릇 돈과 관련된 재미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돈 쓰는 재미고 하나는 돈 모으는 재미다. 돈을 쓰는 것은 돈으로 경험이나 편리함, 시간, 재화, 서비스 등을 제공받는 것으로써 돈이 수단으로 존재한다. 허나 돈 버는 재미는 돈을 모으는 것 그 자체로 미래에 대한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거나, 노동에 따른 보상을 받는 개념으로 퀘스트나 목표를 달성하는 쾌감을 느끼는 것으로써 돈이 목적으로 존재한다. 어느 쪽을 더 선호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현재를 중시하는 이는 돈을 써서 당장의 편익(쾌감)을 얻는 걸 선호할 것이고, 미래에 대한 가능성(혹은 희망)이나 심리적 안정감과 같은 심리적 요인을 선호하는 이는 돈을 모으는 것을 선호할 것이다. 이는 단순한 취향일 뿐, 딱히 비교우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능성..

고백

웹툰에서 달달한 고백씬을 보며 문득 오래전에 했던 첫 고백이 떠올랐다. 처음 동아리 방에서 본 후, 선후배로 지내며 썸인지도 모를 썸을 탄 지 1년하고도 6개월쯤 더 지났을 무렵, 나는 그녀에게 고백을 했었다. 언제부턴가 자연스레 내 옥탑방에 들어오더니, 내 삶에도 자연스레 녹아들어 오더라. 우린 서로 많은 걸 하진 않았지만, 같은 공간에 자주 존재했었다. 물론 그 공간은 주로 내 옥탑방이었지만. 데이트인 줄도 몰랐던 겨울 심야 영화관이라든가, 노래나 게임을 같이 했던 멀티룸, 첫 dvd방까지도. 모두 미숙하기만 했던 나를 이끌어준 것이 바로 그녀였다. 하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지난 날들이 그녀 나름대로 내게 어필하던 썸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자유롭게 놀고 싶을 때 곁에 있던 나를 끼워 넣은건지. 어쩌..

습관은 기질을 압도한다

습관은 기질을 압도한다. 제가 즐겨보는 웹툰 중에 이런 말이 있어요. 일부 공감이 돼서 가져왔어요. 습관은 기질을 압도한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기질이 아니라 습관이다. 똑똑한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고, 똑똑한 사람처럼 결정할 수 있으며, 똑똑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면, 그건 그냥 똑똑한 사람인 거다. - 미래의 골동품 가게, 134화. 위 말은 영화 에서 배트맨이 'It’s not who you are underneath, but what you do that defines you.(네가 누구인지 결정하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다)'라고 한 말과 일부 맥락이 닿아있지요. 저도 과거엔 그랬던 적이 있지만, 많은 이들이 겉모습보다 속마음이 중요하다고 해요. 뭐, 겉모습과 속마음..

적당히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 부류의 인간.

적당히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적당히'다. 사람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검은 인간, 회색 인간, 흰 인간.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색인간에 속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소엔 적당히 도덕적아지만, 자신에게 불이익이 될 것 같으면 돌변한다. 다만 그 불이익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인가에 따라 반응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그래서 회색 인간이다. 흰색도 아니고 검은색도 아닌 회색인간. 제 3자의 입장에서, 자신과 무관한 경우에, 자신의 삶에 영향이 없는 경우에 한해서 사람들은 무한하리만큼 도덕적인 인간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이유는 사회적인 인간으로서 검은 인간보다 흰 인간인 척하는 것이 살아가는데 더 좋기 때문이다. 또한 떳떳해진다는 (양..

불신이 디폴트 값인 사회

신뢰와 정직을 강조하는 광고가 많아질수록 역설적이게도 그 사회는 정직하지 못한 사회라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또 역설적이게도 신뢰와 정직을 강조하는 이들일수록 그렇지 못한 이들이다. 디폴트 값이라는 것이 있다. 기본값. 사람들이 당연하다 여기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진행될지 기준이 되는 값이다. 사회가 정직과 신뢰가 바탕이면 그것을 강조할 이유가 없다. 그것이 기본이니까. 오히려 사기치는 것이 특이한 경우로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광고들은 디폴트 값이 사기, 과장, 과대 - 불신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남들과 다르다고 강조하고 강조한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 불신이 디폴트 값으로 자리잡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