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존실/잡념들-생각정리 350

적응

....결국 나도 사람이다.사회에 적응해야지.비판은 힘의 역학관계가 명확할 때, 가능성이 있을 때 하는 것이다. 변화시킬 힘이 있을 때. 그전까진 사회를 아무리 비판해봐야 끝에 남은 건 도태뿐. 사회를 개인이 이길 수 없으니까. 비판하는 이가 없는 사회는 죽어버린 사회지만 알 게 뭔가.외모나 과열된 경쟁 의식이 문제라는 걸 알지만, 그 흐름 속에서 그걸 비판해봐야 본인만 실패자, 투정 부리는 도태남이 될 뿐.고고히 홀로 이 사회를 완전히 벗어날 것이 아니면 대세에 맞추는게 편한 길이다.정상은 정상이고, 비정상은 비정상이다.제 아무리 비정상이라 외쳐봐야 본인만 도태다.사회에 순응하면 안된다.비판의식을 가져라.뭐 이런 것들이 나쁘진 않는데, 결국 사회 속에 살아갈 사람이라면 적응했어야 한다는 걸.이 사실을 ..

당연함과 익숙함의 대가

익숙하다는 건 당연시 된다는 것.당연하다는 것은 소중함을 잊게 된다는 것.당연한 일상 생활이라는 것은 없음에도 우린 일상 생활은 당연하다는 듯이 영위한다. 늘 하던 것이고, 늘 이루어지던 것이므로.깨끗한 옷, 깨끗한 집, 늘 맛있는 식사.그리고 편리한 사회적 인프라까지도.그것들은 모두 당연한 일상에 가려진 사소함이다.그 사소함들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을 당연하게 잊는다.망가진 인프라.망가진 삶의 양식.익숙함과 당연함으로 사소함을 잊은 대가를 우린 비일상이라는 미래로서 분명하게 치루게 될 것이다.p.s그래서 옛 사람들이 이성을 중시하고 감각을 그렇게 경계했는지도 모르겠다.p.s1이성이 광기의 시대를 가져오고, 그 이성이 돈의 가치로만 일의 가치를 측정하는 걸 보면 또 모르겠다.

선택, 노력 그리고 결과

신동엽씨가 말했던,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언이 있다. 인생에 정답은 없어요. 선택만 있는 거예요. 선택한 것에 책임지고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이만큼 인생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말해주는 문장이 있을까. 선택. 우린 선택을 하고, 노력으로써 그 과정에만 관여할 수 있다. 결과 그 자체는 우리 손을 떠난 것이다. 그러니 결과에 붙잡혀 있으면 안된다. 오지 않은 결과는 결국 결과가 아닌 상상일 뿐이고, 다가온 결과는 다음 선택의 참고자료일 뿐이니까. 노력. 노력은 정직하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노력은 정직하지만, 노력의 결과는 정직하지 않다. 아무리 노력해도 기회가 오지 않을 수 있고, 노력의 결과가 운빨의 결과에 뒤집힐 수도 있다. a를 넣어서 a만큼 결과가 바로 나타난다면, 그것만큼 지루한 인생이 어디있을까...

남의 인정

남의 인정에 매이게 되면 후회만 남는다. 열심히 달리다 문득 뒤돌아 봤을 때, 내가 왜 달리고 있지? 하는 의심과 후회뿐이다. 그러니 나 자신의 잣대로 보고 평가하라. 남이 뭐라든 어떻든 이 일은 내게 주어진 이상 내 업무고, 내가 처리하고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다. 성공 여부 와 스스로의 선(line)만 볼 뿐 타인의 여부따윈 중요치 않다. 그냥 스스로의 만족감이다. 그 뿐이다. p.s 그러나 타인의 인정을 너무 등한시해도 문제가 될 것이다. 타인과 함께인 사회 속에서 정말 외부 평판 상관없이 뚝심있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중도를 지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문제다. 그래도 순서를 매기자면, 1번은 나 자신의 잣대고 2번은 타인의 평판 순으로 판단하면 좀 더 살아가기 편하지 않을까.

공부와 행복

흔히 말하는,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지극히 원론적인 말. 공부는 인생을 위한 것이다. 헌데 우리는 공부를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한 수단으로 배워왔다. 공부 못하면 저런 일이나 한다. 저런 곳 간다. 공부 못하면 고생한다.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면 좋은 직장 얻는다. 미래의 신부가 바뀐다. 등등... 공부는 늘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했다. 여기서 좋은 직업은 흔히 말하는 고생을 적게 하면서 돈을 왕창 버는 직업이었고. 그러니 직업에 의한 차별은 늘 정당한 것으로 포장됐다. 니가, 학창시절 공부 안 한 대가인데 왜 투정부리냐?로. 공부는 타고난 머리, 개인의 노력, 가정 환경의 결과 였는데, 그것은 늘 순수한 노력에 의한 공정한 기회로 포장됐다. 말로만 공부는 인생을 위한 것이라고 했지. 실..

사연있는 캐릭터

사연은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든다. 그래서일까. 난 사연있는 캐릭터가 좋고, 사연있는 사람이 좋다. 그 사람의 사연을 듣고, 보고, 공감하며 이해해보는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그 사람의 매력에 푹 빠져든다. 사연은 하나의 또 다른 이야기다. 사연은 그 사람을 하나의 이야기로서 존재케 한다.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를 가진 사람은 그 사람만의 매력이 있다. 난 그러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야기를, 사연있는 캐릭터를, 그리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워커홀릭 - 세 종류의 워커홀릭

일에 미치지 않으면 미칠 거 같았다. 사랑하지 못해서 미칠 거 같고, 꿈도, 목포도 없어서 미칠 거 같고, 미치지 못해서 미칠 거 같았다. 일에라도 미쳐 있지 않으면.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공허한 시간들이 인생을 갉아먹을 거 같았기에. 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일로 하루를 보낸다. 그것엔 어떤 희망도 목표도 없다. 오직 이 하루를 사람답게 살아냈다는 안도감만 있을 뿐이다. p.s 워커홀릭에는 세 가지 종류의 워커홀릭이 있는 것 같다. 일에 대한 보상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그 보상을 위해 경쟁을 하는 자발적 워커홀릭. 일에 대한 보상을 위해, 경쟁을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문처럼 하루를 살아내기 위한 비자발적 워커홀릭. 그리고 업무와 관계된 수 많은 직간접인들의 밥그릇을 위해서 일을 놓을 수가 없..

저마다의 매력

사람은 저마다의 매력이 있다. 어떤 사람은 목소리가, 어떤 사람은 외모가 어떤 사람은 성격이, 어떤 사람은 분위기가. 난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을까. 난 누군가에 어떤 매력이 있다고 칭찬 받아본 적이 있나. 사람은 저마다 매력이 있다. 저마다의 매력을 하나로 모은다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글을 덮는다. p.s 매력은 타인의 인정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의존적이고 하잘 것 없는 것이지만, 사회적 동물로서 사람은 독립적으로만 살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매력은 자존감에 관여하여 독립성을 형성시키기도 한다. 참 모순적이다. 그래서 매력을 매력적이라 부르는 걸지도 모르겠다.

감정적-불꽃같은 삶

감정적이라는 말. 그것은 부정적인 느낌을 담고 있다. 그것은 마치 '이성적'인 사람에 반대되는 느낌이며, 사람이라면 이성적 마음을 응당 지녀야 한다는 것이 전제에 부정된 느낌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우리가 감정적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여기게 된 것이. 분명 강렬했던 감정들은 우리의 시야를 어둡게 한다. 하나에 매몰되게 만들어 상황을 악화시키고 최악의 상황으로 내닫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은연중에 감정적인 상황을 회피하고 부정한다. 잃지 않기 위해. 손해보지 않기 위해. 귀찮아지지 않기 위해. 하지만 그 강렬한 감정들이, 그 좁디 좁은 시야에 가로막힐 정도로 숨 막힐듯한 그 매몰이 왜 그리 빛나보일까. 그건 아마도 그 강렬함 만큼이나 쉬이 사그라들어버리기 때문은 아닐까. 마치 다시는 돌아..

맞춤형 매체와 사회성 고립, 약해지는 중재능력

맞춤형 매체가 증가함에 따라 사람들은 사회성을 잃어 버리고 있는 것 같다. 인터넷에선 내 입맛에 맞춰 세상이 변하니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니까.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더 이상 지지고 볶는걸 좋아하지 않는다. 조율하는 과정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하긴, 지지고 볶는 - 조율하는 과정이 즐거울 이유가 있을까. 싸우고 화내고 부딪치고 양보하고 포기하는 과정들이 반복되는데. 그래도 억지로라도 맞춰갈 수 밖에 없었다. 사회 활동이든 결혼이든 삶을 유지하려면 집단 생활이 필요했으니까. 허나, 이젠 필요없다. 음식은 배달하면 그만이다. 쇼핑은 택배로 주문하면 된다. 여가 생활? 온갖 즐거운 매체가 매일매일 쏟아진다. 업무에 필요한 협업은 최소한, 필요한만큼만 한다. 맞춤형 컨텐츠, 맞춤형 쇼핑, 맞춤형 매체. 나만..

단순하게

A를 말하면 A로 받아들이고 B를 말하면 B로 받아들이는,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대화의 의중을 파악하고 목적을 살피게 된다. 흔히 말하는 빌드업 이라는 걸 생각해 회피하기 바쁘다. 세상 사람들이 그러하니 나 역시 그리해야 한다. 아니, 내가 그렇게 돼서 그렇게 지례짐작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단순하게 보고자 하면 단순하게 볼 수 있으나, 대체적으로 그 빌드업이라는 것들이 결코 나에겐 좋은 의도를 지닌 것이 아니기에. 물론 너도 좋고 나도 좋으면 완벽하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득보는 자와 손해보는 자로 나뉘게 되고 거기서 대화가 오간다. 슬쩍 던져보고 슬며시 반응을 살핀다. 우습다. 대화가 아니라 연극을 하는 꼴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왜 사람이 정치적이 되는지 ..

권력의 착각

어느 자리에 오르게 되면 착각하게 된다. 본인이 말하면 알아서 딱딱 처리되기에. 직접 하지 않기에 현장 감각을 잊게 되고 어려움이나 힘든 걸 경험하지 않기에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말만으로 처리하는 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된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 말 한마디면 자연스레 이루어지니까. 그러나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 순간, 그것이 권력이었음을, 그토록 편안한(달콤했던) 것을 알게 된다. 오르되, 잊지 말아야 한다. 직접 해본다는 그 감각과 경험을 각인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좁아진 시야로 권력만 탐하는 망령이 되어 떠돌게 될 것이다.

부정적 감정들

부정적인 감정들을 품는 건 독을 품는 것이다. 그것들은 스스로 정신을 갉아먹으며 피곤하게 만든다. 그것들은 분노와 고통을 수반한다. 세상에도. 스스로에게도. 그 독이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면 그것도 괜찮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정신을 괴롭게 한다면 내려놓자. ....... 시간이 갈수록 분노는 사그라들고 고통만이 남는다. 내려놓자는 말은, 진정한 복수는 용서라는 뻔한 개소리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한 말이다.

공동체 해체와 도덕심 몰락

공동체가 해체 되면서 도덕심은 몰락하고 있다. 공동체 중심 사회에선 개인의 삶보다 공동체 유지를 더 중요시한다. 그렇기에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 여기고, 공동체를 위한 희생은 숭고한 것으로 포장된다. 그렇기에 공동체를 중시하는 사회에선 자연스레 서로를 감시하는 구조가 이루어진다. 모난 돌이 정맞게 된다. 사회 구성원들은 자발적으로 사회적 눈치를 보게 된다. 사회적 지탄이 두려우니까. 공동체 사회에서 공동체로부터 배척 당할까봐. 그러나 공동체가 해체되고 상호간의 연결고리가 느슨해지면서 사회적 지탄은 개인적 지탄으로 바뀌게 된다. 사회적 지탄에서 사회적은 희석되고 개인 대 개인의 지탄만 남는다. 사회적으로 부도덕하면 어떤가. 솔직히 나에게 부도덕하지만 않으면 되지 않는가. 그래서 수많은 연예인들이, 유튜버들이..

군계일학

군계일학. 닭의 무리 중에 한 마리 학 이라는 뜻으로 무리 속에서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를 지창할 때 쓰는 말이다. 낭중지추와 비슷한 뜻이기도 하다. 헌데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무리를 지으며, 유유상종이라는 말처럼 비슷비슷한 이들끼리 뭉쳐있는 것이 습성이다. 군계일학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를 두고 보면 빼어난 어떤 이를 지칭하는 말이나 무리를 염두해두고 보면 의미가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닭은 닭끼리 있을 때 어울리는 법이며, 학은 학끼리 있을 때 어울리는 법이다. 학이 닭 무리 속에 있다는 것은 그 학이 무리에 어울리지 못하는 이질적인 존재라는 걸 의미한다. 그 학은 어째서 그들의 무리에 어울리지 못하고 닭의 무리에 있게 됐을까. 한 마리의 학이 닭의 무리에 있어서 뛰어난 재능을 ..

돈과 관련된 2가지 재미

무릇 돈과 관련된 재미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돈 쓰는 재미고 하나는 돈 모으는 재미다. 돈을 쓰는 것은 돈으로 경험이나 편리함, 시간, 재화, 서비스 등을 제공받는 것으로써 돈이 수단으로 존재한다. 허나 돈 버는 재미는 돈을 모으는 것 그 자체로 미래에 대한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거나, 노동에 따른 보상을 받는 개념으로 퀘스트나 목표를 달성하는 쾌감을 느끼는 것으로써 돈이 목적으로 존재한다. 어느 쪽을 더 선호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현재를 중시하는 이는 돈을 써서 당장의 편익(쾌감)을 얻는 걸 선호할 것이고, 미래에 대한 가능성(혹은 희망)이나 심리적 안정감과 같은 심리적 요인을 선호하는 이는 돈을 모으는 것을 선호할 것이다. 이는 단순한 취향일 뿐, 딱히 비교우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능성..

고백

웹툰에서 달달한 고백씬을 보며 문득 오래전에 했던 첫 고백이 떠올랐다. 처음 동아리 방에서 본 후, 선후배로 지내며 썸인지도 모를 썸을 탄 지 1년하고도 6개월쯤 더 지났을 무렵, 나는 그녀에게 고백을 했었다. 언제부턴가 자연스레 내 옥탑방에 들어오더니, 내 삶에도 자연스레 녹아들어 오더라. 우린 서로 많은 걸 하진 않았지만, 같은 공간에 자주 존재했었다. 물론 그 공간은 주로 내 옥탑방이었지만. 데이트인 줄도 몰랐던 겨울 심야 영화관이라든가, 노래나 게임을 같이 했던 멀티룸, 첫 dvd방까지도. 모두 미숙하기만 했던 나를 이끌어준 것이 바로 그녀였다. 하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지난 날들이 그녀 나름대로 내게 어필하던 썸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자유롭게 놀고 싶을 때 곁에 있던 나를 끼워 넣은건지. 어쩌..

습관은 기질을 압도한다

습관은 기질을 압도한다. 제가 즐겨보는 웹툰 중에 이런 말이 있어요. 일부 공감이 돼서 가져왔어요. 습관은 기질을 압도한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기질이 아니라 습관이다. 똑똑한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고, 똑똑한 사람처럼 결정할 수 있으며, 똑똑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면, 그건 그냥 똑똑한 사람인 거다. - 미래의 골동품 가게, 134화. 위 말은 영화 에서 배트맨이 'It’s not who you are underneath, but what you do that defines you.(네가 누구인지 결정하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다)'라고 한 말과 일부 맥락이 닿아있지요. 저도 과거엔 그랬던 적이 있지만, 많은 이들이 겉모습보다 속마음이 중요하다고 해요. 뭐, 겉모습과 속마음..

적당히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 부류의 인간.

적당히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적당히'다. 사람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검은 인간, 회색 인간, 흰 인간.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색인간에 속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소엔 적당히 도덕적아지만, 자신에게 불이익이 될 것 같으면 돌변한다. 다만 그 불이익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인가에 따라 반응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그래서 회색 인간이다. 흰색도 아니고 검은색도 아닌 회색인간. 제 3자의 입장에서, 자신과 무관한 경우에, 자신의 삶에 영향이 없는 경우에 한해서 사람들은 무한하리만큼 도덕적인 인간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이유는 사회적인 인간으로서 검은 인간보다 흰 인간인 척하는 것이 살아가는데 더 좋기 때문이다. 또한 떳떳해진다는 (양..

불신이 디폴트 값인 사회

신뢰와 정직을 강조하는 광고가 많아질수록 역설적이게도 그 사회는 정직하지 못한 사회라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또 역설적이게도 신뢰와 정직을 강조하는 이들일수록 그렇지 못한 이들이다. 디폴트 값이라는 것이 있다. 기본값. 사람들이 당연하다 여기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진행될지 기준이 되는 값이다. 사회가 정직과 신뢰가 바탕이면 그것을 강조할 이유가 없다. 그것이 기본이니까. 오히려 사기치는 것이 특이한 경우로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광고들은 디폴트 값이 사기, 과장, 과대 - 불신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남들과 다르다고 강조하고 강조한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 불신이 디폴트 값으로 자리잡게 되었을까.

빈익빈 부익부 - 부의 양극화 위험성

필자는 빈익빈 부익부의 위험성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고, 그것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 적이 있다. 이번엔 다른 의미로 빈익빈 부익부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뉴스나 기사, 경제학 교과서에선 빈익빈 부익부는 안 좋다고 말하곤 한다. 돈이 순환되어야 경제가 발전하는데 순환되지 못한다(부자든 빈자든 옷은 1벌씩 입고, 밥은 1끼씩 먹는다.)거나 경제학적 효율성을 통해 사회 전체의 삶의 질을 올리는 것을 추구하는데, 오히려 삶의 질이 떨어뜨린다거나 인간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가 지적했듯이 국가의 정책에 있어서 사회적 제도 개선방향이 두 방향으로 잘못 나뉘게 되는 이유도 있다. 그런데 과연 빈익빈 부익부는 안 좋을 것일까? 사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빈익빈 부익부를 좋아할 것이다. 바로 부자들이다. 부..

자존감과 자존심

이 티스토리를 보면 알겠지만 필자는 자존감에 대해서 자주 강조했다. 자존감은 살아가는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것 중 하나다. 그것은 삶을 대하는 자세이며, 삶을 뒤바꾸어 놓는 삶 그 자체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 그래서 그에 대한 반발로 자존심만 강해지는 경우가 많다. 자존감이 약한 사람은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많이 입는다. 자존감은 스스로를 믿고, 스스로의 품위를 지키는 키는 것이고, 자존심은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스스로의 품위를 지키는 것이다. 둘의 차이는 주체가 나이냐, 타인이냐 이다. 자존감은 스스로를 믿기에 자신을 존중하여 자신의 품위를 지키려 하지만, 자존심은 자신의 품위를 타인에게 존중받아야만 한다. 그래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스스로를 존중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에..

관계에서 끼리끼리 모이는 이유

정서적으로 불안한 사람은 의존할 사람을 찾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자. 사람을 만날 땐 경제적 지출도 있지만, 개개인의 정신적, 육체적 지출도 있다. 집에서 편히 쉬고 싶은 사람은 기꺼이 밖에 나가 움직여야 하며, 상대방의 상태나 기분 등을 일정 부분 맞춰줘야 한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들끼리 만난다면 이 부분은 서로 맞추기가 매우 수월하다. (성격차이가 큰 경우 빼고) 하지만 어느 한 쪽이 그렇지 못한 경우는 어떤가. 과거 필자가 사람과의 관계가 끊기는 이유는 경제적 문제 그 자체라기 보단 경제적인 지출로 인해 선택권이 한쪽으로 기울게 되기 때문이라 말한 적이 있다. 마찬가지다. 한쪽이 육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면 우리는 당연히 그 사람을 배려 - 맞춰줘야만 한다. 이건 ..

바닷가와 명상

연휴를 맞이해 부산에 놀러 왔다 가요. 마지막 날, 오전에 일어나 바닷바람을 맞으며 탁 트인 바닷가를 걷다보니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네요. 지난 날을 생각하면서요. ......울고 웃었던 날들. 사회적 체면 때문에 부끄러운 진실들을 감추는 어른들. 그리고 얼마나 도덕적인가 옥신각신 싸우던 날들. 싸우는 이들. 울고 웃는 이 모든 이들이 사람이라는 걸 생각해요.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사람. 이를 바로 잡는 것도 사람. 옳다 그르다 싸우는 것도 사람. 갈등을 일으키는 것도, 그것을 극복하는 것도 사람. 우는 것도. 웃는 것도. 감정들을 드러내는 것도, 숨기는 것도 사람. 살아간다는 것 그 자체가,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모든 감정들이 사람이라는 걸요. 그 사람이라는 걸 한 단어로..

변화하지 않는 대한민국

요새 사회가 시끄럽다. 사회 곳곳에서는 저출산으로 인한 문제가 가시화되고 있다. 단지 그 문제가 영향력 있는 이들의 호소가 아니라면 주목받지 못하고, 또 그만큼 미디어가 관심 가져주지 않을 뿐이다. 군인 부족에 의한 군무원 문제라든가, 지방의 노동인구라든가, 건설현장-기술직들의 고령화는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온 문제 아닌가. 수도권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으니 모른 척 했을 뿐. 정치인들도 내 표랑 직결되지 않으면 알빠노 자세고. 인력이 부족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오랜 기간 동안 인력을 갈아 유지하는데 익숙해져버린 사회는 변화하려 하지 않는다. 대체 인력을 어떻게서든 끼워 넣어 갈아넣으려고만 한다. 비용을 원치 않고, 변화를 원치 않으며, 사회적 인프라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최후의 1인..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나이

더 이상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나이. 문득 뒤돌아보면,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때가 있다. 나이에 상관없이 사람이면 실수하는 것이 당연할진대, 대한민국은 실수가 용인되는 나이대와 용인되지 않는 나이대가 있는 것 같다. 어린 아이가 실수하는 것은 '어리니까 그럴 수 있어'. 노인이 실수하는 것은 '나이먹었으니까 그럴 수 있어'. 하지만 중장년층이 되면 실수해선 안 된다. 그 나이 먹고도 이런 실수나 하냐고 되묻는다. 완벽함을 요구하고, 완벽한 사람이 되길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사회에서 쓸모없는 부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더 이상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나이가 됐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이 정신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대. 나이를 먹어가면서 ..

관계 - 감정들의 작용

대게 긍정적 감정들보다 부정적 감정들이 강하게 작용한다. 그래서 행복하긴 어렵지만 불행해지긴 쉽다. 행복은 모든 것이 만족되어야 하지만, 불행은 한 가지만 불만족스러우면 되니까. 이는 관계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연인들은 때때로 상대방이 좋아할 짓 100가지 하는 것보다 싫어할 짓을 안 해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좋아하는 행동은 기본적인 관계에서 올라가는 거지만, 싫어하는 행동은 기본적인 관계조차도 안 되니까. 잘하려고 하지 말고, 못하지만 말자. 관계에서든, 일에서든.

사는 곳이 중요한가.

천외천(天外天)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무협물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이 단어에 익숙하실테지요.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뜻이죠. 우물 안 개구리라는 속담을 쓰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보면 돼요. 그런데 이 말이 현재에도 충분히 적용되더라구요.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한 방문객의 방명록에 대한 답변 때문이에요. 아이들의 상상력은 주변에서 보고 듣는 것만큼 발달하지요. 주변이 판사와 의사, 세무사, 회계사와 같은 전문직들이 많은 학군에 사는 아이는 그 전문직에 대해서 잘 알게 될 거에요. 어떤 고충이 있고, 어떤 이득이 있고, 또 어떤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지, 미래에 갖게 될 경제력까지도. 물론 그것을 안다고 해서 전문직을 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요. 하지만 구체적으로 정보를 알면 판단하는데 있어서 큰 도움..

성공을 향해 발버둥치는 이유

낡은 환경은 사람마저 낡게 만든다. 대한민국은 밑바닥의 인간들에게 무자비하다. 그들은 존재치 않는 인간이며, 눈에 띄어선 안 된다. 대한민국은 자신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만 타인에게 자상하다. 우리가 성공을 향해 발버둥치는 이유는 낡은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함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밑바닥의 인간들과 엮이지 않기 위함이다. 성공한 자들은 저마다 카르텔을 형성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은 서로를 계급화하며 지리멸렬하고 있다. 평등한 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지만 은연 중에 어디보다도 철저한 계급 사회가 대한민국이다. 이러한 사회는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계급적 하락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게 만든다. 이는 비즈니스적 결혼, 비즈니스적 인간관계, 저출산 등으로 이어진다. 더 이상 대한민국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

가난에서 가난으로

가난에서 가난으로. 가난하지 않은 자가 가난을 입에 담는다는 것이 어쩌면 오만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를 향해 가난을 팔아 돈을 번다고 돌을 던지곤 한다. 마치 가난을 빼앗기기라도 하는 듯이. 그럼에도 누군가는 가난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가난은 사유재산과 함께 인류가 나타난 이래로 있어 왔던 것이며, 지금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가난은 가난한 자만의 전유물이 되어선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볼드모트처럼 금기시되는 단어처럼 변해가고 있을 뿐이다. 오래전에 필자는 '가난이 패션인가'라는 글을 통해 상품화되어 가는 가난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가난은 어떻게 바뀌어 왔는가. 조세희 작가분이 쓴 의 배경이 되는 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