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낮잠을 잔 후, 늦게서야 글을 쓰기 시작한다.
내일 출근 하려면 일찍 자야만 하는데. 12시가 지났으니 오늘인가. 그러고 보니 글을 쓴 지도 오래 되었구나 싶다. 그나마 쓴 것도 편지뿐이다. 여전히 난 편지를 쓰는게 좋다.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터놓는듯한 글들은 나름의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니까. 물론 그 편지로 늘 읽어주시는 분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의 소소한 일상들이, 글들이 그 분께 소소한 즐거움을 준다면 더욱 좋고.
살다보니 점점 단순해지는 것 같다. 흐르는대로 살아왔고, 흐르는대로 살아가다보니. 그나마 있던 어릴 적 취미는 점차 시들어졌다. 누군가 평생 살아가려면 평생 취미로 즐길 수 있는 악기 하나, 활동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정말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단순히 감상하거나 소비하는 활동과는 다른, 생산적인-어느 일적인 활동 말이다. 사람들은 결국 창조적 존재니까. 여기서 생산적인-일적일 활동이라는 것은 글을 쓴다거나 그림을 그린다거나 연주를 한다는 것.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무언갈 소모해서 즐길 수 있는 일거리를 만든다는 것과 같은 적극적인 활동을 의미한다. 세상의 수 많은 컨텐츠들을 보거나 듣기만 해서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연극을 보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내가 연극을 하는 것도 충분히 즐겁지 않은가. 그런 의미다.
여튼. 다시 돌아와서 취직을 하고, 집-직장을 반복하며 살아가다 보니 뭔가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핑계라고 하면 할 말은 없는데. 그냥 활동하고 싶지 않다고나 할까. 얼마 전 편지에서 살아가지지 말고, 살아가자고 했었는데. 어찌됐든 업무라는 것은 내가 생각하고 처리해야 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러한 일들이 끝나고 나면 좀 편해지고 싶은 기분이다. 일을 새롭게 벌려놓지 말고 그냥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어도 되는 활동들을 원하게 된다. 그러면 취미는 한정적이고 단순해진다. 새롭게 익히는 것이 아닌 늘 해오던 게임하기, 재밌다는 작품들 보기, 인터넷 커뮤니티 하기 등등 슥 보고 지나칠 수 있는 작업뿐이다. 어느 순간부터 계획세우고 실행하는 것조차도 희미해지고, 생각조차도 멈추게 되고, 그러다 보니 글도 점차 덜 쓰게 된다. 살아간다는 건 참으로 피곤한 일이다.
여기서 문제는 굳이 '피곤한 삶'을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선택지가 있다는 것이다. 하던 대로 퇴근 후 적당히 쉬다가 출퇴근만 반복하든가, 피곤해도 뭔가 시도해보고 살아가든가. 그럼 결국 당장의 편한 선택지를 택하게 된다. 그나마 여유가 생기는 주말도 경조사 참가라든지, 모임이라든지,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들... 뭐 그런 것들을 챙기다 보면 평일날 퇴근 후 남는 시간에 대한 선택지는 더욱 한 가지로만 귀결된다.
사실 지금도 약간 피곤한 느낌이 드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굳이 내일을 위해 잠으로 마무리 짓고 싶지 않아 글을 쓰게 되는 것이다.
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시간이 아깝다.
요즘 대한민국이 많이 시끄럽다.
터지는 일들이 참으로 많다. 이젠 정말로 될대로 되라는 주먹구구식 국가가 되어 가는 것 같다. 국민들도 더 이상 관심없고. 아니 관심이 있긴 한데, 그냥 냉소적으로 변해버렸을 뿐. 정말 앞날에 대한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진짜 국가를 이끌어 가야 할 자들이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 그냥 대충 10년정도 굴러먹다가 그 후엔 망하든 말든 알 바 아니라는 것일까. 하긴 나조차도 망하든 말든-과 같은 냉소적으로 변해버렸으니까. 과거엔 그래도 사회가 어떻고 저떻고 생각도 하고 글이라도 좀 썼었는데 요즘엔 쓰지 않는다. 말해봐야 입만 아프니까.
그래서일까. 이젠 책임의식도 사라져 가는 것 같다.
사람을 갈아넣어 유지하던 거대한 인프라 국가가 그래도 사람이 많을 땐, '너 아니어도 할 사람은 많아.' 따위로 가스라이팅 하며 버텼는데, 이젠 그게 불가능해졌다. 누군가 말했듯이, 이젠 개인들의 사고 방식도 바뀌었다. '그런 것도 못하냐? 나약한 놈!' 따위로 가스라이팅 당해 본인의 나약함에서 책임을 찾고 악으로깡으로 버텨내던 개인들은 이제 없다. '그래 나 나약해. 나약한 놈 맞으니까. 나약하지 않는 니가 그냥 다 해라~' 마인드로 바뀌었다. 과거 악으로깡으로 버티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가. 그저 갈려나갔을 뿐, 누구 하나 기억해주지도 않고, 인정해주지도 않는다. 그런 상황을 보고 자란 세대들이 어느 누가 '악으로 깡으로 버텨서' 이 인프라를 유지시키려 하겠는가. 사람 많을 때도 사람 갈아넣고 유지하던 이 인프라를. 우린 이제 우리가 누리던 이 편한 인프라를 내려놓을 각오를 해야만 한다. 그리고 비싸진 인건비를 감당할 각오를 해야만 한다. 허나 어느 누구도 그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 국가부터도 입도 뻥긋하지 않고, 앞장서서 있는 사람 없는 사람 긁어모아다 유지하려고만 하는데. 결국 내가 말하는 책임의식도 어찌보면 구 시대의 가스라이팅 잔재일 수도 있다. 허나, 그래도 사회에서 자랐으니 사회에 기여하는 구성원으로서 어느 정도 책임의식이라는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몇 해 전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이득볼 땐 그렇게도 싱글벙글 벌어가놓고선 문제가 생기면 정부 지원, 세금 지원 그런 걸로 떼우던 안면몰수 기업들이 많았으니까. 이젠 개인들도 그렇게 변해가버리는 것 같다. 이익은 내 것이지만, 손해는 떠넘겨버리는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이기도 한데, 그 중 하나는 공인들의 태도가 아닐까.
정치인들도 문제지만, 공인들은 사회적 영향력으로 돈을 벌어먹고 사는 존재다. 자신들의 발언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사회적으로 영향을 끼치기에 달달한 광고 수입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 광고가 결국 자신들의 발언과 행동으로 타인을 설득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달달한 광고 수입을 받고 싶으면서 자신들의 태도 하나하나가 왜 논란이 되어야 하냐며 화를 낸다. 나의 행동과 말 한마디가 사회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기에 PPL을 통해 간접적으로 설득(광고) 하는 것이고, 그래서 기업들이 비싼 돈을 지불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기업들이 공인이 논란이 될만한 행동이나 언변을 하지 않도록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행동이나 말에 문제를 지적하면 왜 하나하나 따지냐며 내가 정치인이냐며, 왜 멋대로 의미를 부여하냐며 화를 낸다. 물론 요즘 사람들이 날이 서 있어서 껀수 하나만 잡히면 죽일듯이 물어뜯는다. 참으로 가혹해진 사회다. 과연 대 유뷰트 시대가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개개인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대 미디어 시대를 열었으나, 컨텐츠 생산자들의 책임감은 휴지통에 갖다 버리게 만들었다. 어차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내 '구독자'라는 사람만 있으면 나머진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까. 돈줄이니까. 사회적 논란은 내 알 바 아닌 것이다. 벌금? 그까짓거 내면 그만이다. 그것도 구독자들이 알아서 모금까지 해준다. 대 미디어로 인한 혼란비용은 사회가 알아서 부담하시고, 컨텐츠 생산자는 단물만 쭉쭉 빨고, 플랫폼 사업은 이에 기생해서 수수료 장사만 하면 쏠쏠하니까. 이게 참 아니꼽긴 한데, 그렇다고 이를 규제하는 것은 거대 권력의 입맛대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정녕 각자의 책임의식에만 맡길 수 밖에 없는 노릇일까.
책임의식을 가지면 호구가 되는 이 세상에서?
혼란만이 가득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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