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존실/창문공작소 15

소중한 존재들

"난 네가 좋아." "하지만 난 네 가족까지 책임져 줄 순 없어. 물론 너에겐 가족도 소중한 사람이고, 나도 소중한 사람이겠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둘 다 소중한 사람일 거야. 하지만 난 그릇이 작아서 너 하나만 소중해. 너 하나만 책임질 수 있어." "너에게 소중한 존재라고 해서, 그 존재들이 나에게도 소중한 존재들인 것은 아니야!" 그 사람의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의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나 조차도 때때로 애증이 섞이는 내 가족들을 누구에게 이해해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차라리 몰랐더라면. 차라리 이 사람을, 이 사랑을 몰랐더라면 싶다. 행복했던 지난 순간들을 모두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아프다. 그 사람은 분명하게 말했고, 이제 선택은 오직 나의 몫으로 남았다. 이젠 결심..

재회

우리가 서로에게 진정 마음이 없었더라면 자연스레 헤어졌을 것이다. 여느 연인들이 헤어지듯이. 그러나 우린 길고 긴 감정의 줄다리기 끝에 마침표를 찍었다. 내 감정과 네 감정들은 서로 엉켰고 서로를 향해 생채기를 냈다. 우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서로를 향해 맞춰주는 것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고, 자그마한 이유라도 만날 기회를 붙잡으려 했고, 만나러 가기 위한 준비시간은 늘 설랬다. 조금씩 커져가는 마음만큼이나 서로에 대해 기대감이 커졌던 탓일까. 품게 되는 기대가 커질수록 실망감도 커졌다. 우린 감정의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이제 우린 감정의 줄을 내려놓는다. 서로 등을 돌린 채로. 더 이상 우리의 감정들이 더 뒤엉키는 일은 없을 거라 믿었다. 그것이 서로에게 좋은 거라고,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다 그..

도구

무언가 억지로 끼워 맞춘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세상엔 온갖 도구들이 넘쳐나고, 그 도구들은 쓰임에 맞춰 만들어진다. 하물며 그 도구들은 또 자신들과 알맞는 또 다른 도구들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어쩔 땐 쓰임에 전혀 맞지 않는 도구가 사용될 때도 있고, 혹은 서로에게 맞지 않는 도구를 억지로라도 끼워 맞춰야 할 때도 있다....그건 내 인생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맞지 않는 것일지도.이 세상과 맞지 않는 내 인생을 억지로 세상에 맞춰 끼우려 하니 자꾸만 불협화음이 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끼워 맞춰야만 한다. 안되면 깎아서라도, 갈아내서라도. 그렇지 않으면 영영 버려지기 때문이다. 수 많은 도구가 쓰임에 맞춰 쓰여지고, 쓰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

물 먹는 하마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다. 내리는 비 사이로 하얀 입김과 담배연기가 어우러져 피어오른다. 우리집은 비가 내리는 날에는 비가 새곤 했다. 위에서 아래로 자연스레 비가 내리듯 빗물은 우리집도 자연스럽게 내렸다. 그래서 비가 쏟아질 때면 우리 가족은 총동원되어 바가지, 플라스틱 통, 우산통 등을 가져와 빗물에 받쳐 놓곤 했다.뚝,뚝, 톡,톡, 통,통....빗물을 저마다의 바가지와 그릇을 악기처럼 연주했다. 악기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주를 이루었지만, 변주가 시작된다는 것은 내가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비가 오는 날, 가족들이 빗소리에 맞춰 악기들을 연주해야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어린 나도 잘 알고 있었다.그건 콩쥐 팥쥐에 나오는 구멍 뚫린 장독대였다. 우리는 그 장독대를 채우기 위해 부지..

비와 너와 라면

비가 내리는 날, 쭈그려 앉아 라면을 끓이며 너를 떠올렸다. 지금과는 달리 라면은 가난을 상징했지만, 그것은 너만큼이나 머나먼 이미지였을 뿐이다.비와, 너와, 라면.서로에게의 추억들이 누군가에겐 가난함, 그 하나에 지나지 않았을까.난 가난을 모른다. 실제로 가난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부모님께서 애써 숨긴 덕분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난 가난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원하는 것을 다 살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비싸고 좋은 것을 갖기 위해선 돈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 자명한 이치였다.그런 나에게 있어서 가난은 말그대로 교과서의 이미지와도 같았다. 빡빡하게 산다는 것은 말 그대로 빡빡하게 사는 것일 뿐이었다. 어차피 가난은 상대적인 것이었고, 절대적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의 가난은 교과서 속..

노래 가사와 단문들

"추억은 다르게 적혀." 그렇게 차갑게 말을 내뱉은 너는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다.나에겐 추억이라 불리던 것들이 너에겐 구질구질한 기억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그 구질구질한 기억들을 너는 음식물 쓰레기마냥 쓰레기통에 서슴없이 버렸다. 마치 그 기억들이 너를 엄습하기라도 할듯이.내 그 추억들은 쓰레기봉투에 묶여 밖으로 내놓아졌다. 종량제 봉투 25 L.-그렇게 마중나간 나의 마음이 혼자 돌아온 뒤로, 눈물에 번진 구름같은 노을빛이 내리며, 너의 얼굴과 추억들이 향기처럼 술잔 위로 피어오른다.나는 분명히 우리가 같은 소설을 써 내려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장면에선 오른쪽을 내가, 왼쪽을 네가 번갈아가며 써냈고, 어느 장면에선 한줄씩 번갈아가면서 써내려 갔다. 그 소설책은 문체가 제각각이고, 스타일도 제각..

미제로 남아버린 함수

내 안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희미해져 갈 때쯤 널 만났다.나에게 언어는 무척이나 어려운 존재였다. 너를 향한 생각과 감정들을 정제해서 한 문장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 그래서 난 늘 네 앞에선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저 너에게 하는 말들이라곤 시답잖은 신변잡기뿐이었다. 그럼에도 넌 새삼 신기하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곤 했다. 날 바라보던 너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나 역시도 신비로운 느낌에 빠져 드는 듯했다. 나는 사실 진한 흑발과 깊이를 알 수 없는 듯한 느낌을 주는 까만색의 눈동자를 좋아했지만, 너의 노란 빛이 감도는 눈은 까만색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매력적이었다. 동양에는 흔치 않은 노란 빛깔의 눈은 용기와 기개가 있다고 불리는데, 굉장히 쾌활했던 널 생각해보면 정말 너답다는 생각..

공시생과 가난한 사랑 노래

우리집은 가난하지 않았다. 사실 가난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학자금 대출을 받았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일부 용돈을 충당하는 것은 내 또래의 대학생이라면 다들 하는 것이었다. 나도, 내 주변도 다 그렇게 빚을 지고 대학생이 되었고, 그 빚을 가진 채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모두가 허덕이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난 가난하지 않았다. 내게 있어서 가난은 남들처럼 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 마이너스로부터 시작하는 인생이 아니었다. 마이너스로 시작하는 것은 남들처럼 자연스러운 출발이었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약간의 짐과 고달픔이 늘어난다는 것 뿐이었다. 약간의 용돈으로 술집과 옷가게, 음식점을 다녔고, 가끔씩 여유로운 데이트를 했다. 그저 하는 만큼만 했다. 가난이라는 것은 마치 판타지 소설이나 신화처..

그녀의 손에서는 봉숭아 향이 났다.

싹둑. 싹둑. 내 머리를 자르는 그녀의 손에서는 봉숭아 향내음이 났다.그녀의 손톱이 진한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미용사였다. 그것도 나이가 많은.허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용사는 손님의 요구에 맞춰 머리를 잘 자르기만 하면 될 뿐이지, 나이가 많고 적고가 무슨 상관인가. 그녀와 나의 관계는 머리를 자르는 미용사와 머리를 자르러 온 손님 한 명,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아니, 없을 터였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 의미는 변화되었다.찾아가는 이유도 점차 늘어났다. 염색을 하고 싶어서, 매직을 하고 싶어서, 앞머리를 다듬고 싶어서 등등.... 이유가 늘어날수록 내 머리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혹한 환경에 처했다. 그녀는 손상된 내 머리를 위해 트리트먼트와 헤어 에센스를 사용해주..

오빠, 잘 지내요? (2)

어느 순간부터 선배의 연락이 끊겼다.이 선배의 느낌은 정말 말 그대로 선배느낌이었다. 차분했고, 다정했으며, 어른스러웠다.적절한 조언과 가끔씩 던져주는 돌직구는 내 상황을 파악하고 헤쳐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상담자로서의 이 선배는 마치 동네의 어르신 같은 느낌이었지만, 또 나와 대화를 하거나 장난치는 것을 보면 어린아이 같기도 했다. 아, 좋은 선배구나. 그런 선배가 어느 순간부터 연락도 잘 안 됐다.졸업식 때 본 이후로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 문자를 보냈다. 늘 하던 대로, 자연스럽게. 오빠, 잘 지내요? 답장이 왔다. 잘 지내지. 너는? 이 답장 하나가 뭐라고, 왠지 이런 일, 저런 일, 털어놓고 싶었다.지금 당장만 해도 남친과 싸워서 말도 안하고 있는 일, 화해는 하고픈데, 꼬여버린 이 관계..

오빠, 잘 지내요?

문득 글을 쓰고 싶은 밤이 있다.아무런 이유없이 감성적이 되어서 글을 써재껴야만 할 것 같은 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서울을 도망치듯 나왔다.마치 졸업과 함께 나란 존재가 사라져버린 것처럼. 나는 모든 짐을 집으로 보낸 채 간단한 옷차림으로 그렇게 서울을, 대학로를 도망쳐버렸다. 집에 틀어박히고, 누구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고향에 있는 친구에게도, 그리고 서울에 있는 지인들에게도. 특히나 도망치던 날 자꾸만 떠오르던 너조차도. 어느 날 너에게 문자가 한 통 왔다.오빠 잘 지내요? 라고. 너는 늘 그런 아이였다.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는 걸 믿는 나이기에, 늘 나는 헤어짐으로부터 도망치곤 했다. 헤어짐이 싫어서 잠수를 타는 일이 있었다. 이런 나에게 가끔씩 오는 문자는 그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