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존실/창문공작소

미제로 남아버린 함수

어둠속검은고양이 2019. 3. 28. 00:58

내 안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희미해져 갈 때쯤 널 만났다.

나에게 언어는 무척이나 어려운 존재였다. 너를 향한 생각과 감정들을 정제해서 한 문장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 그래서 난 늘 네 앞에선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저 너에게 하는 말들이라곤 시답잖은 신변잡기뿐이었다. 그럼에도 넌 새삼 신기하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곤 했다. 날 바라보던 너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나 역시도 신비로운 느낌에 빠져 드는 듯했다. 나는 사실 진한 흑발과 깊이를 알 수 없는 듯한 느낌을 주는 까만색의 눈동자를 좋아했지만, 너의 노란 빛이 감도는 눈은 까만색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매력적이었다. 동양에는 흔치 않은 노란 빛깔의 눈은 용기와 기개가 있다고 불리는데, 굉장히 쾌활했던 널 생각해보면 정말 너답다는 생각을 했다.

너의 그 신비로움이 매력을 바뀌게 된 시기는 언제부터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상수값에 지나지 않았던 너에 대한 함수식은 이젠 알 수 없는 식이 되어 버렸다. 그 알 수 없는 식은 이미 희미해져 버린 사랑을 나타내는 식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깊은 우애를 나타내는 식일 수도 있었다. 너를 만날 때마다 난 함수식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어떤 값을 대입해봐도 알 수 없었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알 수 없는 답을 말할 수도 없었고, 이런 내 생각과 감정들을 한 마디로 담아낼 수도 없었다.

겨울 추위가 시리게 다가올 무렵이었나.

언제부터인지 희미해져 버린 감정만큼이나 희미해져 버린 너와의 마지막 날이었다.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나의 대답에 대해 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내가 내 함수식을 풀지 못해 헤맸던 것처럼 너도 헤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몇 번이고 못 만나게 된 상황에서 나의 조심스러운 태도와 물음은 너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나의 함수식은, 너의 함수식은, 우리의 함수식은 그렇게 결과를 맺지 못한 채 미제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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