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은 가난하지 않았다.
사실 가난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학자금 대출을 받았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일부 용돈을 충당하는 것은 내 또래의 대학생이라면 다들 하는 것이었다. 나도, 내 주변도 다 그렇게 빚을 지고 대학생이 되었고, 그 빚을 가진 채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모두가 허덕이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난 가난하지 않았다. 내게 있어서 가난은 남들처럼 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 마이너스로부터 시작하는 인생이 아니었다. 마이너스로 시작하는 것은 남들처럼 자연스러운 출발이었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약간의 짐과 고달픔이 늘어난다는 것 뿐이었다. 약간의 용돈으로 술집과 옷가게, 음식점을 다녔고, 가끔씩 여유로운 데이트를 했다. 그저 하는 만큼만 했다.
가난이라는 것은 마치 판타지 소설이나 신화처럼 이야기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것들이었다. 마치 교과서에서 가난이라는 파트를 따로 배우기라도 한 듯, 하루 3끼니를 걱정해야 한다거나, 이번달 고지서에 나오는 전기세나 가스비를 내지 못해서 끊기면 어쩌나 하는 불안해 하는 모습으로 고착화 되어 있었다. 학자금 갚을 날들이 걱정이 됐으나, 늘 하던대로 난 지하철을 탔고, 학식을 먹었고, 이따끔씩 술집을 가거나 데이트를 했을 뿐이다. 지금 당장 절대적 결핍과 궁핍이라는 녀석과 마주할 일은 없었다. 가난의 상징과 단골 소재가 되어버린 판자촌에 살지 않았으니까.
당장 이번 달 고지서를 걱정해야 하거나, 오늘 하루 3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것, 아픈 데 돈 때문에 병원가는 것을 주저해야 하는 것 따위의 가난 이미지는 판자촌에 가서야 등장할 법한 것들이었다. 사실 가난하다는 것은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었다. 단순히 자산이 많고 적음의 현실을 가리키는 단어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세상은 가난하다는 것을 창피한 것으로 가르쳤고, 약자라는 이미지를 강요했으며, 부정당하는 대상으로 존재하길 바랐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가난을 늘 부정했고, 가난한 자가 되기를 무서워했다. 실직 상태를 무서워했고, 늘 연봉을 걱정했다. 가난한 자가, 가난한 상태가 된다는 것은 마치 사형을 선고받는 것과 같았다.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 노래'처럼 인간다움을 버려야 하는 것처럼 느꼈다. 우리는 인간다움 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어릴 때부터 주변 눈치를 보면서 우리가 가난한지 가난하지 않는지 끊임없이 확인했다. 남들보다 뒤쳐진 학교, 뒤쳐진 연봉은 가난으로 향하는 출발선에 서는 것과 같았다.
지금의 나는 가난하다.
주변에서 하는 만큼만 하는 것도 따라가지 못했고, 결국 난 낙오자라는 멍에를 뒤짚어 썼다. 떳떳하게 남들처럼 돈을 벌 능력이 증명되지 못했고, 겁은 많아서 가난으로 향하는 출발선에 설 용기를 낼 수 없었다. 그렇게 선택한 길은 공시생이었다. 남들이 다 하는 그 공시생이었다. 이 시험에서만큼은 내가 능력이 있다는 것을 검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믿음과 기대감이었다.
다들 그랬다.
집에서 알뜰살뜰 쥐어짜서 받은 돈으로 가장 저렴하게 생활했다. 생활비는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가난해졌다. 단 하나 차이가 있다면, 대학교에 저당잡힌 빚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공시생이 가는 곳은 항상 정해져 있었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대학생 시절 가던 술집과 옷가게와 음식점은 내가 갈 수 없는 곳들이었다. 24시간이 모자란 공시생이라 말은 하지만, 사실 시간이야 낼려면 얼마든지 낼 수 있었다. 시간이 모자라다는 말은 성공으로 가는 출발선에 설 수 있도록 해주는 보증수표였고, 나는 남들만큼 즐겨서는 안 됐다. 이 곳은 그런 곳이었다. 당연하게도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교재와 학원비 등이었고, 그 다음이 주거비와 식비였다. 남들만큼 즐기던 것들은 순위에 올려 놓은 수조차 없었다.
이젠 공시생이라는 말이 가난의 상징과 단골 소재가 되어가고 있었고, 나는 그 한복판에 서 있었다. 합격만이 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것도 다른 수 많은 가난한 자들을 밀어넣고나서야 벗어날 수 있는 길이었다. 공시생들은 가난한 사랑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하염없이 부르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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