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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

어둠속검은고양이 2020. 4. 2. 19:55

무언가 억지로 끼워 맞춘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세상엔 온갖 도구들이 넘쳐나고, 그 도구들은 쓰임에 맞춰 만들어진다. 하물며 그 도구들은 또 자신들과 알맞는 또 다른 도구들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어쩔 땐 쓰임에 전혀 맞지 않는 도구가 사용될 때도 있고, 혹은 서로에게 맞지 않는 도구를 억지로라도 끼워 맞춰야 할 때도 있다.

...그건 내 인생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맞지 않는 것일지도.

이 세상과 맞지 않는 내 인생을 억지로 세상에 맞춰 끼우려 하니 자꾸만 불협화음이 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끼워 맞춰야만 한다. 안되면 깎아서라도, 갈아내서라도. 그렇지 않으면 영영 버려지기 때문이다. 수 많은 도구가 쓰임에 맞춰 쓰여지고, 쓰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는 고장났다는 이유로 쓰레기통으로 던져진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매 순간마다 버려지고 있다.

그건 너와 나 사이도 마찬가지였다.

수 많은 사람들이 으레 적당히 사귀다 적당한 시기에 헤어지듯이 너와 나의 관계는 그다지 대단치 못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마모시킬정도로 상대에게 헌신적이지 못했고, 상대와의 불협화음을 끔찍히도 싫어했다. 그 불협화음이 싫어서 나는 귀를 막고서 모른 척 했고, 넌 내가 아닌 너와 알맞는 도구들을 찾아서 여기저기 쏘다녔다. 인생은 짧고, 세상은 넓은데,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맞추려고 고생을 할 필요가 있나. 억지로 맞췄더라도 얼마 못 가서 맞춘 부분이 어그러지고 말았을거라 투덜대며 애써 외면한다.

너와 나의 태도는 정반대였지만, 생각은 같았으리라.
넌 너에게 꼭 맞는 사람을 항상 찾아다녔다. 그 오랜 기간만큼이나, 그 노력들만큼이나 너의 그 갈증들은 쌓여만 갔다. 너는 오아시스를 찾아서 넓을 사막을 배회하는 순례자처럼 보였다. 그러다 이따끔씩 넌 날 찾아왔다 가곤 했다. 아쉬운대로 갈증을 해소하려는듯이.

본래 잘 맞지도 않았던 우리지만 조금이나마 갈증 해소에 도움이 된다니 내가 어떤 식으로든 일말의 쓰임이라도 있구나 싶었다. 늘 그렇듯 목을 축인 넌 또 다시 고행의 길을 떠났다. 너는 물을 영원히 솟아나오는 오아시스 찾아다녔다. 황량한 사막같은 너와 꿀처럼 달콤한 오아시스는 분명 서로 잘 맞을 것이다. 마치 서로의 쓰임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처럼 말이다.

우리들은 스스로를 일종의 부품으로서 인식했다.

나는 못, 너는 볼트, 너는 몽키스페너, 넌 벽돌.... 그래서 우린, 세상사람들은, 너처럼 꼭 맞는 이를 찾아다녔다. 우리의 본래적 쓰임에 꼭 맞는 일만 하려고 한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우리의 쓰임에 가장 적합했으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본래적 쓰임에 알맞는 서로를 찾아다녔다.

우린 간혹 이 쓰임에 어긋나는, 도구의 행동을 볼 때마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가령 볼트가 예술작품으로 조명받는다거나, 못이 송곳 대신으로 쓰인다거나, 몽키스페너가 망치처럼 못질하는 도구로 쓰이는, 그런 경우였다. 우린 그런 쓰임들을 대수롭지 않은 듯 무시했으나 힐끔힐끔 곁눈질로 보곤 했다. 그 쓰임에 맞지 앟는 행동들이, 도태되어야 할 행동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내심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린 지켜만 볼 뿐, 우리 스스로를 거스르진 못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깎아내거나 붙이는 법을 잊어버렸다. 흐물흐물 거리던 액체에서 두드리고 식힌 끝에 못이 되고, 볼트가 되었듯, 이리저리 굴러다던 돌조각이 다듬어지면서 벽돌이 되었듯, 우린 우리가 처음 나올 때처럼 우릴 깎아내거나 좀 더 매끄럽게 다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이미 명확한 부품이 되어 버린 우리에겐 금기시 되는 행위였다.

우린 도구로서의 목적과 가치를 잃지 않기 위해. 본래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대량 생산체제가 확립된 이곳에선 나와 똑같은 도구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나와 같은 도구들은 훨씬 더 날카롭고, 훨씬 더 단단했으며, 훨씬 더 매끄럽고, 빛이 났다.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적합한 부품인지 보여주기 위해 늘 윤활제를 바르고, 더 맹렬히 갈고 닦았다. 그러다가 우연히라도 자신들이 이 쓰임에 부합하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면 간택되던 것이다. 그렇게 옆에 있던 도구들이 하나둘 간택되어 나갈 때마다 채 간택되어지지 못한 자들은 고뇌에 휩싸여 우울해하곤 했다. 그건 도구로서 온전히 못하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우린 예술작품에 쓰이게 된 볼트라든지, 망치 대신으로 쓰이게 된 몽키스페너와 같이 새로운 시도를 항 생각은 못했다. 그건 너무나도 도박이었다. 우린 새로운 시도를 하기에도, 그렇다고 도구로서 간택되기에도 애매했다.

그러다 결국 하나둘씩 아득바득 억지로라도 끼워 맞췄다. 새로운 쓰임이라던가, 처음처럼 새로이 변화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게 억지로 끼워 맞춘 도구들은 금새 마모되고, 삐걱거렸다. 그래도 우겨넣었다. 아무 곳에도 쓰여지지 못한 채,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순 없었으니까. 나는 그 억지로 우겨넣는 것이 무척 싫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다른 도구들처럼 빛이 난다거나, 더 단단하다거나, 더 날카로운, 간택이 되어질 이유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저 움짝달싹 하지 않은 채,가만히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나와 달리 넌 열심히 찾아다녔다.

넌 너와 딱 맞는, 태초부터 서로의 쓰임에 맞게 나온 것과 같은 영원함을 찾아다녔다.
분명히 너에게 딱 맞는 이가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이렇게나 많은 부품들이 널려 있으니까.

그러나 분명 빛이 나고, 날카롭던 부품도 결국엔 마모될 것이다.
그 시기가 오면 딱 맞아 떨어지던 것도 벌어지고, 틀어지게 될 테지만, 부디 넌 마모가 되질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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