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존실/창문공작소

재회

어둠속검은고양이 2021. 6. 8. 05:04

우리가 서로에게 진정 마음이 없었더라면 자연스레 헤어졌을 것이다. 여느 연인들이 헤어지듯이. 그러나 우린 길고 긴 감정의 줄다리기 끝에 마침표를 찍었다. 내 감정과 네 감정들은 서로 엉켰고 서로를 향해 생채기를 냈다.

우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서로를 향해 맞춰주는 것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고, 자그마한 이유라도 만날 기회를 붙잡으려 했고, 만나러 가기 위한 준비시간은 늘 설랬다.

조금씩 커져가는 마음만큼이나 서로에 대해 기대감이 커졌던 탓일까. 품게 되는 기대가 커질수록 실망감도 커졌다. 우린 감정의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이제 우린 감정의 줄을 내려놓는다.
서로 등을 돌린 채로.

더 이상 우리의 감정들이 더 뒤엉키는 일은 없을 거라 믿었다. 그것이 서로에게 좋은 거라고,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다 그리 믿으면서.

그리고 무더운 여름 날, 너와 난 다시 만났다.
싸우고 헤어졌던 그 거리에서.
주변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 추레해진 모습으로.

네가 당황스러워 하듯이 나 역시 이렇게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하는 생각에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만나고 싶지 않은 이유가 너처럼 너없이 이렇게 살아간다는 모습 때문은 아니었다. 너와 난 이미 등을 돌렸으니까.

그냥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만남은 어떤 식으로든 헤어짐이 있는 법이고, 헤어지고 난 후 재회할때 마다 좀 더 발전된 모습이 보여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었다. 그러나 널 통해 돌아보게 된 내 자신은 오히려 퇴보했다. 그건 성공이나 실패 따위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외적 요인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요인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 스스로 통제하며 얼마나 삶에 충실했느냐였다.

나는 늘 나 자신이 부끄러웠기에 수많은 사람들을 지나쳐 오곤 했지만, 그럼에도 나의 이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며 곁에 남겨둔 것은 네가 유일했다. 그래도 네 덕분에 나는 좀 더 발전할 수 있었다. 퇴보와 발전을 반복하면서도.

이젠 너 역시 지나쳐야 할 사람이 됐다.
더 이상 솔직하게 내 모습을 비출 수 없다.
이젠 내 삶을 충실하게 살아내며 발전된 후에나 널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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