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다.
내리는 비 사이로 하얀 입김과 담배연기가 어우러져 피어오른다.
우리집은 비가 내리는 날에는 비가 새곤 했다.
위에서 아래로 자연스레 비가 내리듯 빗물은 우리집도 자연스럽게 내렸다.
그래서 비가 쏟아질 때면 우리 가족은 총동원되어 바가지, 플라스틱 통, 우산통 등을 가져와 빗물에 받쳐 놓곤 했다.
뚝,뚝, 톡,톡, 통,통....
빗물을 저마다의 바가지와 그릇을 악기처럼 연주했다.
악기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주를 이루었지만, 변주가 시작된다는 것은 내가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비가 오는 날, 가족들이 빗소리에 맞춰 악기들을 연주해야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어린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콩쥐 팥쥐에 나오는 구멍 뚫린 장독대였다.
우리는 그 장독대를 채우기 위해 부지런히 살았지만, 그 장독대는 끝내 채워지지 못했다.
그 장독대가 채워지기 전까지 우리 가족의 비 오는날 연주는 계속 됐다.
그리고 이제 막 그 장독대를 깨부숴버리고 나오는 길이다.
이젠 우리 가족이 함께 연주할 일은 더 이상 없다.
'본디 인간은 자연에서 나왔으니, 햇빛이 나오면 햇빛을 쬐고, 비가 내리면, 비를 맞는 것이 자연의 이치가 아니던가.' 어디 산에서 수련하고 있는 도사가 씨부릴 법한 말을 떠올리지만, 이 개소리는 담배 연기와 함께 흩어진다.
입에 문 담배에 손이 다가오더니 담배를 가져간다.
그리고 지 입술에 그대로 꽂더니 연기를 뱉어낸다.
"너도 담배피냐."
내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담배를 빨아 내뱉는다.
비가 새는 우리집 옆에는 이 애가 사는 집이 있었다.
비오는 날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우리집과 다르게 그 애 집은 아무렇지 않았다.
정확히 말해선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물 먹는 하마나 깔아놓고 자주 비우는 수 밖에.
그 애 집에는 항상 물먹는 하마가 물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그 집에 눌러갈 때마다 그 하마가 햇빛은 보고 사는지 걱정했지만 이따끔 맞은편에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온다는 사실에 안도했었다.
우리가 살던 동네의 집들은 다 그랬다.
경사진 언덕에 줄지어 따닥따닥 붙어 있어 집들은 늘 햇빛이 모자랐고, 빗물은 넘쳐났다.
반듯한 언덕길은 포장이 되어 있었지만, 높낮이가 제각각인 계단은 손잡이가 없었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어르신들이 돌아가면서 낙상사고를 당했다.
올해는 그 애의 아버지가 당첨됐다.
이젠 어디로 갈거냐는 질문에 나는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물었다.
그러자 그 아이는 내 담배를 또 뺏어 문다.
"야, 담배 끊어."
"너나 끊어. 그리고 담배 좀 사서 펴라."
"원래 뺏어 피는게 더 맛있는거야."
"지랄..."
담배갑에 열어보니 담배가 없다.
돛대였나보다.
"나 간다. 너도 이제 가라."
내 두 마디에 뭔가 말하려다 꼭 다무는 그 애의 분홍빛 입술이 보인다.
그 탐스러운 입술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길을 걷는다.
어릴 때 나는 콩쥐 팥쥐의 장독대를 가득 채우는 상상을 하곤 했다.
나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 아이까지. 그 장독대는 매우 넉넉해서 그 아이의 집에 있는 물먹는 하마도 넉넉히 담을 수 있었다. 그리곤 그 아이와 함께 머리에 이고 가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더 이상 콩쥐의 장독대를 채울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장독대를 산산조각 내버렸으니까.
장독대 대신에 그 아이는 나에게 작은 플라스틱 통을 내밀었지만, 나는 차마 그걸 잡지 못했다.
분명 그걸 받으면 그 작은 통은 금새 넘칠 것이기에.
아마 그 통도 부숴지고 말 것이다.
그녀라면 분명 나완 달리 물먹는 하마를 햇빛으로 채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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