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존실/떠오르는 586

실수에 관대하지 않는 사회

실수에 관대하지 않으면 사람은 수동적이게 된다. 모든 사람은 경험주의자이다. 사회는 완벽주의자를 원한다. 허나, 사람으로 구성된 사회 역시 경험주의자일 수 밖에 없다. 실수에 관대하지 않는 사회는 시도와 가능성을 지워낸다. 용서와 관용이 없는 사회가 진심 어린 사과도 지워내듯이. 실수에 관대하지 않은 사회는 수동적인 사람을, 수동적인 사회를 만들어낸다. 수동적인 사회는 죽어버린 사회다. 병실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식물인간처럼.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 모 아니면 도가 됐을까. 다수가 침묵한 대가는 양극단주의자에게 끌려가는 사회다. 그리고 그 침묵은 관대하지 않은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다.

완벽주의자들의 자존감

완벽주의자들은 자존감이 대체적으로 매우 약하다. 왜냐면 자존감이란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인정하고 스스로 존중할 때 생겨나는 것인데, 나 자신을 인정한다는 것은 나라는 불완전한 인간을 먼저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 자체가 불완전한데, 완벽주의자들은 불완전한 것을 인정치 않고 완벽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완벽주의자들은 대체적으로 한 가지 일을 하는데 탁월하다. 꼼꼼하고 빈틈없이 마무리 짓는다. 허나,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하면 뭐 하나 완벽히 끝맺음하지 않고 이것저것 다 손대고 있으므로 신경이 분산되고 쉽게 멘탈이 약해진다. 완벽하게 끝맺음한 결과가 나오질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게으른 완벽주의자로 변신한다. 당장의 쉬운 일들은 완벽하게 해놓지만, 해야만 하는 일들, 당장 성과가 안 ..

잃는 것을 두려워하면 잡아먹힌다.

잃는 것을 두려워하면 잡아먹힐 뿐이다. 기세에서 밀려 조금씩 조금씩 내주다가 결국 전부를 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내 뜯어먹혀 가고 있는 자신을 합리화하기 시작한다. 서로가 서로를 교묘히 뜯어먹는 숨겨진 야만의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역설적으로 야만성을 드러내야만 한다. 너 죽고 아니면 내가 죽는 올-인 정신은 때때로 필요하다. p.s 물론 그건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드러난 야만성은 공공연한 공격의 대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숨겨진 야만성에 숨어 상대를 뜯어먹는 이들은 충분히 쎄고 쎘다. 비열한 시대다.

수동적

문득, 아침마다 익숙해져 간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삶에 익숙해지고 새로운 것을 하지 않게 된다. 그저 스케줄대로, 수동적으로 살아갈뿐. 무언가에 대한 흥미가 사라지고 그저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익숙한대로 시간을 지낼 뿐이다. 나이 든 이들이 옛 노래만 듣거나 봤던 드라마만 보는 것도. 혹여 일에만 매달리는 것도, 어쩌면. 그렇기에 좀 더 긍정적으로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자극을 찾아 다녀야 한다. 그것이 삶을 피곤하게 만들지라도.

자존감에 색상입히기

자존감이 있어야 기본적인 사람이 된다. 기본적인 사람. 사람으로서의 출발선. 그리고 그것에 자신만의 색을 입혀야 매력적인 사람이 된다. 그 색이 검은 색이든, 흰 색이든, 그 어떤 색이든 간에. 그 색이 안 맞는 사람은 나를 피할 것이고, 그 색이 맞는 사람은 나에게 다가올 것이다. 색이 있어야 판단이 서고, 그제서야 그 사람의 매력이 보인다.

고이면 썩는다.

제자리에 고여 있으면 썩는다는 말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고여버린 이들이 있다. 나는 한 때 그들을 위해서 우직하게 그 자리에 서 있는 소나무 같은 사람이 되길 바랐다. 그러나 사람은 나무가 아니었다. 사람은 움직이는 동물이었고, 한 때는 나 역시 고여 있었으나 결국 나아가는 사람이었다. 스스로가 나아가지 못하면 그 누구도 곁에 있어줄 수 없다. 스스로 빠진 구렁텅이는 스스로 헤쳐나와야만 한다. 주변 사람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이 없다. 그저 해줄 수 있는 것은 기다려주는 것 밖에.

동물-바지에 관하여

사족보행 동물에게 있어서 바지는 어떤 형태일까. 하나 재밌는 논쟁거리에 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강아지가 추울까봐 바지를 입혔어요' 라고 말한다면 강아지가 입은 바지 형태는 어떨까. 아마도 대다수가 뒷다리부터 꼬리, 골반을 감싸안는 형태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면 앞다리는 어떤가. 말 그대로 앞'다리'지 않은가. 바지는 밑으로는 다리를 넣어 가랭이를 지나치고, 위로는 통으로 터져 있는 의류를 가리킨다. 그럼 '사족'보행인 강아지들의 바지는 뒷다리부터 출발해 꼬리와 골반만 감싸는, 몸통을 세로로 감싸는 것이 아니라 네 다리 모두 집어넣고 몸통을 가로로 절반만 감싸안는 형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 누군가는 그런 형태면 골반을 가릴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사족보행 동물들의 골반은 뒷쪽 윗부분에 걸쳐 ..

좋아했었다.

이른 오전에 집을 나서 시원한 공기를 맞으며 생각했고 종종 직장에서 보이는 한 여성분을 보며 또 생각했다. 정말, 어쩌다, 간혹. 그립다고, 좋아했었다고. 오늘 그 여성을 보며 내가 왜 그녀를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은 그녀지, 그 여성분이 아니니까. 그녀는 모자를 즐겨 썼었고, 마스크를 자주 썼다. 꽁꽁 감췄지만 슬쩍 보이는 하안 피부는 날 설레게 만들었었다. 그리고 제멋대로인 그녀가 나는 무척 좋았다. 이젠 추억을 너머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그녀지만, 그럼에도 이따끔 내 삶 속에서 이렇게 나타나곤 한다. 그리운 느낌이지만 그립진 않다.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 그리운 느낌이다. 그녀를 참 많이도 좋아했었다. 참 많이도.

왕관은 무게를 견뎌야 빛난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라고 하죠. 왕관은 원하지만 무게를 짊어지고 싶어하진 않는 것 같아요.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재물을 원하지만 책임과 의무는 원치 않죠. 당연해요. 자연스러운 본능이지요. 하지만 자연스러운 본능이라고 해서 그게 옳다거나 당연하다는 건 아니에요. 본능대로 행동한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지요. 저도 의무나 책임을 더 짊어지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더 큰 권력이나 더 많은 재물을 탐하지도 않죠. 정확히 말하자면, 재물은 다다익선이라 생각하고 더 많이 얻길 바라지만 그것이 더 큰 책임과 의무를 행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구태여 얻으려고 하지 않을 거란 거에요. 하늘에서 툭 떨어진다면 고맙게 받겠지만 말이에요. 떳떳해야죠. 내가 일하고, 일한 만큼 정직하게 벌..

질투와 경쟁의식

옛 사람들이 왜 '질투는 추악하다'하며 경계했는가. 질투의 끝은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정적이며 자기파멸로 이끈다. 상대방을 나에게서 지우든지 내가 지워지든지. 반면 경쟁의식은 자기 발전으로 이끈다. 저 사람보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 믿고 나아가게 만든다.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게 만든다. 더 나은 상대방이 있고 더 나은 자신이 남아있다. 둘 다 상대에게 비롯된 부정적 감정이지만 그 끝은 정반대의 결과를 만들어낸다. 질투하기 보단 경쟁의식을 갖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가난과 사랑

가난이 대문으로 오면 사랑은 창문으로 도망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난 여전히 창문으로 도망치지 않는 그런 사랑을 믿고 싶다. ..... 그래도 내 능력 부족으로 사랑하는 상대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봐야만 하는 것은 무척 괴롭다. 능력을 이유로 상대를 놔주는 것은 상대를 위함일까 아니면 괴로움을 견뎌낼 자신이 없어 회피하는 이기심일까. ........서로에게 못할 짓이다. 어느 순간부터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생존이 되어 버린 것 같아 슬픈 현실이다.

군체의식적 국가, 대한민국

나댄다는 말로 사람들의 개성 표현과 변화하려는 의지나 행동을 죽이더니 오글거린다는 말로 사람들의 감정 표현과 감성을 마저도 죽였다. 씹선비라는 말로 염치와 예의를 죽이고 사람들을 천둥벌거숭이들로 만들어 놓더니 설명충이라는 말로 가르침과 설득도 막아버리고 사람들을 전부 확증편향자로 만들어 놓았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자유를 외치지만, 타인의 사고와 행동을 통제하려 든다. 대화가 아니라 집단적 방백만이 존재할 뿐이다. 대한민국은 군체의식적 국가다.

용서와 관용이 사라진 사회는 사과마저 지워낸다.

용서와 관용이 사라진 사회는 사과마저 지워낸다. 요즘엔 잘못된 짓, 못된 짓을 하고도 뻔뻔하게 구는 이들이 많다. 당연하게도 1차적으론 그들이 문제이지만, 한편으론 우리 사회는 뻔뻔함을 권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문해본다. 뻔뻔하게 굴어도 사과하지 않아도 그래도 되니까. 그래도 쉴드 쳐 줄 사람들은 쳐 줄 테고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으니까. 법적 처벌만 피하면 그만이고 그깟 솜방망이 처벌 받는다 해도 벌금 몇 푼으로 때우면 그만이니까. 그래서 뻔뻔하게 구는 인간들은 판사 앞에서만 사과를 하고, 판사 앞에서만 반성의 눈물을 흘린다. 그래도 되니까. 사과하면 득달같이 달라들어 물어 뜯기 바쁘니까. 사과하면 용서와 관용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상처입은 개마냥 기회를 노리고 목덜미를 물어 뜯으려고 달라드니까. ..

엄격해지는 사회

전부터 느끼던 것이지만, 갈수록 타인에 대해 관심이 없어진 듯하다. 물론 나도.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더 이상 설득이나 교화, 교정 등을 하려 하지 않는다.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문제되는 건 니 인생이지 내가 아니니까. 그래서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는 일을 더 주고, 일을 안 하는 사람, 성질 더러운 사람은 굳이 상종하지 않는다. 참고 참는 사람에겐 계속 참길 바란다. 참지 못하면 왜 말 안 했냐고 여지껏 참았던 사람 탓으로 몰아간다. 역지사지를 해야 할 이유도, 생각도 잊어버렸고, 공감도 잃어버렸다. 타인에게 관심도 없고 오직 자신의 일, 자신의 입장만 남아있을 뿐이다. 고마움도 사라져버렸고, 타인에게 관대한 사람은 만만히 보고, 책임을 뒤짚어 씌우기 바쁘다. 배려도, 고마움도, 관대함이나 여유조..

화려한 인생

보기도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 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화려한 인생이 무언가 더 가치있고 행복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일까. 화려한 인생만을 좇다가 망가져가는 이들이 많다. 보기 좋은 떡을 만들기 위해 플레이팅에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듯 화려한 인생을 살기 위해선 외적으로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든다. 화려한 인생은 화려한 인생을 살아갈 때 이득이 있는 사람들(예컨대, 연예인)에게나 맞는 법이다. 혹은 화려한 인생으로 치장하느라 인생을 허비해도 부담이 없는 이들이거나. 화려한 인생을 좇다가 불나방처럼 사라지는 이들이 많은 시대다.

말의 무게

말의 무게는 무겁다. 아니 무거워져야만 한다. 그러나 감정조차 가벼워지고, 목숨도 가십거리로 소비되어 버리는 이 가벼운 시대에서 무거운 것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직업이, 외모가, 인기가 등가 교환처럼 면죄부로 작동하는 이 때, 어찌 말이라고 면죄부가 없을까. SNS로, 언론으로, 유튜브로, 온갖 다양한 미디어 매체로 - 우린 어느 시대보다도 더 밀접하게 서로에게 얽혀있다. 그러나 우린 어느 시대보다도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다양해진 매체만큼이나 책임감은 흩어졌고, 헛소문은 빠르게 확장되고, 소비된다. 모든 것들이 가벼워지는 이 시대에 무거운 것을 찾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다양해지는 매체만큼 말의 무게는 무거워져야만 한다.

고향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건 마치 최후의 요새처럼 어떠한 안정감을 가져다 준다. 사실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그냥 내 근원과 연관된, 그런 막연한 믿음 같은 것이다. 사람들에게도 작게나마 어떤 회귀본능 같은 게 있지 않을까. 드문드문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런 장소들을 아련하게 느끼고, 그리워하는 걸 보면 말이다. 어쩌면 익숙해서, 편해서. 힘든 타향살이를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뭔가 좋은 일이다. 든든하다. - 흙으로 와서 흙으로 돌아가리라.

어릴 적 음식들 - 음식을 먹는다는 것

튜닝의 끝은 순정이란 말이 있다. 자동차를 멋지게 꾸미기 위해 튜닝을 하다가 결국엔 순정 상태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대학생 때는 어떤 음식을 먹어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자극적이고 맛있는 음식을 좋아했고, 또 한창 배부르게 먹곤 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지금, 이젠 음식을 가득 먹는다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맛있는 걸 먹어도 양을 조절하고, 기름지고 자극적인 것보다는 무난한 걸 찾게 된다. 젊을 땐 온갖 산해진미를 먹지만, 결국엔 어릴 때 먹었던 그 음식으로 돌아온다. 어릴 때 아버지가 사오던 통닭이, 육개장 컵라면이, 어머니가 끓여주던 돼지고기 김치찌개가, 집밥이 생각난다. 결국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훌쩍 커버린 지금, 어릴 적 문방구에서 사먹던 과자를 구해서 먹어 보지만 그 맛은 안 난다...

인간관계에 대한 부정적 생각들

사람은 생각보다 간사하다. - 만만히 보이면 선을 넘어도 되는지 간부터 슬쩍 본다. - 착하게 굴면 호구 취급, 화내면 사이코 취급한다. 생각보다 고마워 할 줄 아는 인간은 적다. -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당연한 것이 된다. - 잘해주면 더 큰 걸 원한다. - 받은 건 쉬이 잊지만, 도로 뺏긴 건 절대 잊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온다. - 어설픈 호구보단 차라리 까칠한 사람으로 살아라. - 적을 만들 필요는 없지만, 짐을 대신 짊어질 필요도 없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없다. - 피치 못하는 척 끝은 거절로, 하게 되면 어렵게 해 준 척. - 보답을 바라지 말고 해준 것은 끝나는대로 잊어버려라. 사람은 생각보다 질투가 많다. - 자랑은 적을 만들지만, 앓는 소리는 동정표를..

생각보다 멀지 않은 죽음들

죽음을 망각하는 것이 삶이라지만, 결국 우리의 삶은 죽어가는 것이다. 이 사실을 우리가 망각하는 이유는 이 사실을 직시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매번 두려움과 고통에 휩싸여 삶을 살아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죽어간다. 살아간다. 반댓말처럼 보이지만 동일한 사실을 가리키고 있는 이 문장들 속에서 우린 한 면만을 보고 한 면은 애써 외면한다. 살아가야 하니까. 그렇기에, 문득 내 주변 사람들에게서 세월의 흔적을 느낄 때면, 이 낯설음 속에 같이 살아갈 날이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하곤 몸서리친다.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최악의 문제점

대한민국 최악의 문제점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외양간 고치는 척하기 라는 것이다. 늘 '이번 고비만 넘기자.'식으로 임시방편으로 떼우고 넘어간다. 근본대책은 세우지 않는다. 그래서 위기상황을 극복할 땐 엄청난 힘을 발휘하지만 늘 똑같은 문제를 반복한다. '나만 아니면 돼.' '이번 잡음만 어떻게든 넘기자.' 문제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지만 금새 잊혀진다. 대한민국 사회가 정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