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존실/잡념들-생각정리

사는 곳이 중요한가.

어둠속검은고양이 2023. 3. 27. 00:10

천외천(天外天)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무협물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이 단어에 익숙하실테지요.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뜻이죠. 우물 안 개구리라는 속담을 쓰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보면 돼요. 그런데 이 말이 현재에도 충분히 적용되더라구요.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한 방문객의 방명록에 대한 답변 때문이에요.

아이들의 상상력은 주변에서 보고 듣는 것만큼 발달하지요. 주변이 판사와 의사, 세무사, 회계사와 같은 전문직들이 많은 학군에 사는 아이는 그 전문직에 대해서 잘 알게 될 거에요. 어떤 고충이 있고, 어떤 이득이 있고, 또 어떤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지, 미래에 갖게 될 경제력까지도. 물론 그것을 안다고 해서 전문직을 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요. 하지만 구체적으로 정보를 알면 판단하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지요. 어렸을 때, 전문직이 좋다. 대기업이 좋다. 이런 말을 많이 듣고 자랐어요. 그래서 제 꿈은 그런 '좋은' 직업들을 가져서 능력 있고, 돈이 많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지요. 그냥 막연한 꿈이었어요. 하지만 그 직업들의 단점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각종 수고로움을 알았더라면 제가 다른 꿈을 가졌을까요. 그건 알 수 없어요. 저는 이미 다 자란 어른이니까요. 그래요. 아이들의 인생은 한 번 뿐이죠. 그래서 그 앞날을 위해서 우리는 많은 경험들을 시켜주려고 하고, 또 많은 정보를 제공하려고 해요. 그리고 그런 경험들과 정보들은 사는 곳의 영향이 있죠. 요즘 인터넷의 발달로, 유튜브의 발달로 수 많은 정보들을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현장감 있는 그런 정보들은 여전히 현직자에게 듣는게 더 정확하죠. 우리 나라가 학군을 중요시 하던 이유도 이에 비롯된 것이구요. 전문직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 듣고, 보고, 배우고 자란 아이가 다른 직업을 선택했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을거에요. 그리고 그만한 이유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현장감 있는 - 신뢰성 있는 정보들을 접하고 종합적으로 판단을 내린 것이니까요. 다만 그 아이가 전문직을 직업으로, 꿈으로 선택해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지요. 하지만 전문직 외의 직업에 대해 잘 몰라서 판단을 내리지 않을 것일 수도 있어요. 자신들이 접해오던 것들이 전문직 뿐이었으니까요. 어쩌면 유튜버나 배우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졌을 지도 모를 아이일 수도 있죠.

사는 곳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에요. 연예인들이 많이 사는 곳, 전문직들이 많이 사는 곳, 정치인들이 많이 사는 곳 등등 그 거주지들은 저마다의 특징이 있고, 그런 정보들을 좀 더 쉽게 접할 수 있게 해주죠. 덕분에 아이의 재능을 더 빨리 알아볼 수도 있어요. 연기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아이가 해안가 어느 작은 섬에 살았다면, 과연 그 아이가 연기를 정말 잘하는지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연예인들이 많이 살고, 방송국이 있는 곳에 살았더라면, 어쩌면 지나가던 연기 배우가 그 아이를 눈여겨 보고 연기의 길로 끌어들였을지도 모르지요. 사는 곳이라는 건 이런 거예요. 아이에게 어떤 정보를 제공해주고, 또 아이가 앞날에 어떤 것을 택할지 큰 영향을 미치지요. 반대로 낚시에 뛰어난 실력이 있는 아이가 방송국 주변에 살았다고 해보죠. 그럼 그 아이의 낚시 재능을 누군가 알아봤을까요. 사는 곳이 좋다고 해서 아이에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니에요. 그 아이의 재능이 무엇인지 빠르게 파악하고, 그 재능을 알아볼 수 있는, 그 재능을 키워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곳이 중요하죠. 거기다가 아이의 흥미도 까지도 고려해야 하죠. 아무리 낚시에 재능이 있다고 해도, 본인이 곧 죽어도 낚시가 싫다면 결국 낚시를 직업으로 삼을 순 없어요.

결론적으로 사는 곳은 중요합니다.
이게 제 결론이에요.

그렇다면, 어떤 곳이 중요할까요.

여기서부턴 지극히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다양한 사람이 어루진 곳이 제일 좋다고 생각해요. 제가 첫 말에 천외천(天外天)이라는단어를 제시했어요.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직군들이 있고, 또 그 직군들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연으로 이 직군에 선택하게 되었음을 아는 게 중요하지요. 전공과 무관한데 돈 때문에 직업을 택하기도 하고, 단순히 흥미 때문에 직업을 택하기도 하고, 전공을 따라서 직업을 택하기도 하고, 여러 이유가 있겠지요. 물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명예나 돈도 많이 버는 직업들이 있어요. 또 그런 직군들이 모여 있는 주거단지도 있지요.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그 주거단지에 있다고 해서 아이가 그런 직군을 가진다는 보장이 없고, 아이가 그런 직군에 흥미를 가진다는 보장도 없어요. 다만 앞으로 직업을, 인생을 선택할 때 정보 제공의 도움이 될 테지요.

제가 서울에 와서 아르바이트를 잠깐 했는데, 충격받은 적이 있어요. 유명한 사립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였는데, 그 학교에선 공부 뿐만 아니라 예체능을 한 가지 이상씩 하도록 시키더라구요. 여름엔 수영대회, 겨울엔 스키대회를 열고, 악기도 한 가지 이상 다루게끔, 본인이 선택해서 쭉 연습하도록 교육 과정에 넣더라구요. 또 주말엔 학부모들끼리 코치 한 분 섭외해서 아이들끼리 농구 연습하도록 교육하고, 한 달에 한번씩은 도슨트를 고용해서 박물관이나 미술관 투어를 다니더군요. 뭐랄까 굉장히 신선했어요. 전 공부 밖에 안했거든요. 학교에서도 명문대 진학율 때문에 공부만 시켰죠. 체육 시간은 공 하나 던져놓고 알아서 놀라는 식이었구요. 그게 당연했어요. 모든 것은 국영수, 모의고사가 중심이었죠. 그 때 깨달은 것이 바로 천외천(天外天)이었어요. 세상엔 이런 식으로 교육하는 곳도 있구나! 하는 걸요. 사립초 다니고 예체능을 한 가지씩 배운다고 해서 제가 살았던 곳보다 무조건 좋다고 할 순 없지요. 하지만 인생을 놓고 봤을 때, 어릴 때의 이 경험들이 삶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해보고 안 하는 것과 몰라서 안 해보는 것은 천지 차이거든요.

하지만 우리가 만수르가 아닌 이상 사는 곳을 매번 옮길 수도 없고, 모든 경험들을 다 시켜줄 순 없으니, 약간의 운(?)이 필요하죠. 내 아이의 재능과 흥미가, 아이가 사는 곳과 상당 부분 일치하는 곳이라면 앞날을 빠르게 선택하겠지만, 불일치 한다면 탐색의 시간이 좀 길어지겠죠.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직군이 모이는, 사람이 많은 곳이 좋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이 어떤 사람이 파악하는 것이 1순위라는 거예요. 아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싫어하고, 어떤 재능이 있고, 어떤 것에 흥미를 보이는지. 성격과 욕망, 그리고 재능까지 여러가지를 살펴봐야 하죠. 그리고 그것들은 자라면서 또 변화가 일어날 거에요. 그래서 참 어렵죠. 아이 하나만 보고 결정할 것도 어려운데 현실적인 것도 고려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아이의 정서적인 면도 고려해야 하죠. 우리나라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너무 포기하는 경향이 있어요. 고등학교 때 공부만 하다가 그래도 이름 좀 있는 대학교를 졸업했던 사람으로서, 지금 느끼는 것은 고등학교 때 공부도 좋지만, 더 많은 경험을 해봤어야 했는데..하는 아쉬움이에요. 학생 때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잖아요? 저 때는 '공부하면 미래의 배우자가 바뀐다.'라든가 '대학교가면 다 할 수 있다'라는 식으로 막연하게 대학교를 목표로 잡아놓고 그것이 다 이루어지게 해줄 거라는 환상을 심었죠. 학생 때 연애도 해보고, 야자를 빼먹고 놀러도 가보고, 친구와의 관계를 돈독히 해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대학교를 가면 또 대학생만의 생활이 있겠지만, 당장에 대학가는데 쓸모없어 보이던 고등학교 때의 그 경험들이, 사교성이나 의사소통 능력, 사회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그것들이 대학생활, 성인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발휘하거든요. 막연한 미래를 그려놓고 현재를 포기하면 오히려 그 미래마저도 불안정해지죠.

아이의 재능, 흥미, 적성 그리고 그에 맞는 환경조성까지. 아이의 미래를 위해 많은 것들을 고려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현재에 충실할 수 있게 만들어주느냐죠. 아이에 대해 파악하고, 그 아이를 위해 사는 곳을 고려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정서적인 면을 헤치면서까지 바꿀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정서적 불안은 모든 것을 불안하게 만드니까요. 토대가 안정되어 있어야 기둥을 세울 수 있지요.

결론 내리자면, 사는 곳은 중요하고, 중요한 이유는 아이의 앞날 선택을 위한 정보 제공 및 환경 조성 때문이다. 허나, 사는 곳 택하기엔 현실적 제약이 있으며, 이를 그나마 완화할 수 있는 것은 다양한 직군들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러나 그 전에 아이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그 아이를 파악하고 그 아이에 맞는 곳으로 이사간다할 지라도, 그 아이의 정서적인 부분을 해치면서까지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다. 입니다. (- 한창 교육열이 과열될 때 기러기 아빠가 유행했었는데, 상당부분 결과가 안 좋았죠.)

부디 이 글이 고민에 많은 도움이 되길 바라며 이만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