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언어도 감정을 정확히 나타낼 순 없지만, 그 비스무리한 지점에서 지칭할, 표현할 단어가 생겨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바로 이 언어의 문제기 때문이다.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나와 타인으로 나뉘어진 이상 우린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비스무리한 동류를 가리키는 언어가 있기에 우린 서로를 이해한다고 믿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있기에 나 자신을 넘어 우리, 사회라는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언어의 문제는 단순히 표현할 수단이 생긴다는 것을 넘어 더 복잡하고 중요하다.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많아지고, 정교해질수록 자신을 더 명확히 표현할 수 있고, 그 명확함 끝에서 우리는 서로에 대한 이해의 간극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래 전 '이해 받으려 하지 말고, 이해하려 들지 말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에 대한 이해의 생각은 아직까지도 변함이 없다. 우린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상대를 이해하자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도달하고자 하는 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결과값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나타날 수 없는 것일지라도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 자체가 무의미하지는 않다. 결과값으로만 과정의 의미 유무를 따진다면 우리의 삶 역시 죽음으로 결과값이 정해져 있는 즉,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삶은 과정에 있다는 말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해라는 영역이 철저한 본인의 주관적 선(line)으로 구분되어진다 할 지라도, 그 비스무리한 동류를 공유한다는 감각으로 우린 우리의 삶을 좀 더 평화롭고 풍부하게 바꿔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이해한다'는 것을 선행하기 위해 우린 우리의 감정과 상대의 감정을 명확히 표현할 언어를 만들어야 하고, 서로 익혀야 한다.
언어는 침묵을 벗겨내고, 세상을 향해 표현할 자유를 선사한다.
세상을 공부하려면 언어 공부가 먼저다.
p.s
이는 서로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상대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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