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심 없는 비교는 자신만 갉아먹을 뿐입니다.
반면에 투쟁심이 강한 비교는 목표가 생기고 삶의 원동력이 되지요.
1.
많은 이들이 괴로움에 빠지는 이유는 지난한 경쟁의 결과, 소수의 승자가 아닌, 다수의 패자에 속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꽤나 많은 것들을 인내하며 이뤄온 것들은 결과에 의해 쉽사리 버려집니다. 좋은 학교에 입학했는가. 좋은 곳에 취직했는가. 좋은 배우자와 결혼했는가. 많은 재산을 모았는가. 등등... 특정한 질문에 충족이 되지 못한 순간, 그것을 이루기 위해 행해왔던 모든 과정들이 노력 '부족'하다는 말로 폄하되어 쓰레기통에 쳐박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투쟁심이 삶의 원동력을 끌어낸다 한들, 보이는 결과와 부정의 벽에 가로막히다 보면 퇴색되고 맙니다.
그 결과 투쟁심이 강한 비교는 자존심만 상처 입히고, 투쟁심도 잃어버리고, 자신만을 갉아먹는 비교만이 남게 됩니다. 끝없는 비교에 갉아먹히다 보면, 다 내려놓게 되는 시점이 옵니다. 흔히들 말하는 히키코모리화 되는 것이지요. 삶의 의욕은 상실됐는데, 죽지 못해서 살고는 있고, 그렇다고 뭔가 박차고 올라갈 의지는 안 생기고, 반대로 완전히 내려놓은 것은 아닌 지라, 완전한 자유로운 영혼처럼 살지는 못하는 미생의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런 이들에게 우리는 모두 돌을 던집니다. 다 핑계며, '의지부족', '노력부족'이라 말합니다. 모두가 다 경쟁하며 살아가고 있고, 자신도 그렇게 아둥바둥 살아가고 있으니, 이것이 올바른 길이라 여기고 있기에, 이 길에서 벗어난 이들을 향해 돌을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포기를 포용하게 되는 순간, 자신이 걸어왔던,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이 올바른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흔히 말하는 '중소기업 일자리가 남아 도는 것'을 보면 일정부분 맞는 말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경쟁해왔던 이들은 '좋은 일자리'라는 목표를 생각하며 살아왔고, 그게 올바른 삶이라 믿고 자라왔습니다. 그들에게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갈 테지요. 추구하던 목표를 향해 가다 좌초했는데, 그 목표가 잘못됐다고 수정하라는 것은 노력해왔던 삶을 통째로 부정하는 것이 될테니까요. 물론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아야 한다는 것 역시도 맞는 말입니다. 언제까지고 주저앉을 순 없지요. 노숙자, 자연인들은 한 때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던 투사들일 겁니다. IMF로, 회사의 도산으로, 사업실패로 쌓아왔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내려놓게 된 것이지요. 아버지들이 어째서 귀농을 하고 싶어하고, '자연인'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산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현재 아버지들은 IMF와 사업실패에서 살아남은 이들입니다. 하루가 지나면 사라지고 없는 직장 동료들 사이로 어떻게든 그것을 헤쳐나오신 분들입니다. 그들도 경쟁에서 지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모두들 '경쟁 시스템' 속에서 신음하고, 고통받고 있으나, 우리는 자신을 속이고, 신음받는 이들을 외면합니다. 돌을 던집니다. 그러나 이 사회체제는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경쟁'은 인류 발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며, 자본주의는 이 경쟁을 아주 적절하게 인간의 욕구와 결합시킴으로써 공고히 하고 있고, 이에 성공했습니다. 자본주의가 아니더라도, 인류 발전과 함께 해온 이 경쟁체제는 인류가 끝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2.
사회-국가의 목표는 개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서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효율적인' 인간을 만드는데 있습니다. 국가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려운 이들에게 지원하는 까닭은 이들에게 있을지 모를 가능성을 발굴하기 위함입니다. 그 가능성을 극대화하여 사회에 도움되는 일원으로 만들기 위해서요. 이는 개인은 집단을 위해서라는 사고방식 - 개인 - 가족 - 집안 - 지역사회 - 국가 - 궁극적으로 인류에 이르기까지 보다 넓은 범위의 생존을 위한 개인의 도구화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사고방식에 길들여져 버렸습니다. 능력경쟁을 당연시합니다. 그러니 '돈버는 능력, 취업능력'과 같은 것들은 경쟁 체제의 '성공의 지표'가 되었고, '경쟁'이라는 것은 신성불가침이 되었습니다. '경쟁'에 대해 지적을 하지만 어디까지나 지적일 뿐, 결코 개선할 의지도, 노력도 없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분신과도 같은 것이니까요. 도태된 인간들의 발악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능력 부족은 노력부족과 자질부족, 이 2가지로 귀결시킵니다. (환경은 국가에서 해결해주려고 하고 있으니까요.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것은 국가가 완벽하게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입니다.) 그렇기에 능력 부족에 대한 차이(차별)은 당연시하게 되지요. '경쟁'이라는 단어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 과연 있을까요. 그나마 외모만이 경쟁에 편입되지 않으려 발악하고 있습니다만, 이미 외모도 경쟁이라는 사고방식이 팽배합니다. 겉으로 점잖은 척 아니라 주장하지만, 우리는 외모에 따라 달라지는 태도를 너무나도 많이 봐왔습니다. '외모도 경쟁'이라 하면, 외모에 따른 차별 역시도 정당하게 됩니다. (아직까진 '도덕'에 의해 대놓고 못할 뿐입니다.)
- 차이와 차별은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능력에 의한 결과는 차이입니다. 글 쓰는 능력, 돈 버는 능력, 집 짓는 능력 등등 이는 결과의 차이로 나타납니다. 능력과 결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지요. 차별은 이러한 능력과 별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글 쓰는 능력이 돈벌이가 될 수도 있지만, 전혀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글 쓰는 사람보고 돈 못 번다고 무시한다면, 이는 차별이겠지요.
3.
모든 이에게 맞는 사회체제는 없습니다. 사람을 태어난 이상, 우리는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며, 다수에게 알맞다고 생각되어지는 사회체제에 적응하라 강요당하며 살겠지요. 경쟁에 특화되어 있거나, 경쟁심이 강한 이들은 잘 적응하며 살아갈 것이고, 경쟁심과 투쟁심을 잃어버린 이들은 도태되어 사라져 갈 것입니다. 현 사회체제에 잘 적응한 사람들은 사회체제에 관하여 한 점의 의심도, 의구심도 없을 것이고, 목소리를 낼 생각도 없을 것입니다. 항상 '현실의 부적응자'들이 목소리를 낼 뿐입니다. (부적응자라 써서 미안합니다. 다수에게 맞춰진 사회구조의 폭력을 말하기 위해 그들이 가하는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소확행'이라는 말이 유행한 것은 '과도한 경쟁'으로 인해 자신의 삶에 투입할 자원이 부족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치 컴퓨터의 메모리를 한 프로그램에 몽땅 할당하여 쓰기 때문에 부족해진 메모리공간으로 지뢰찾기, 메모장, 계산기 같은 아주아주 간단한 프로그램이나 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 사회에서 '성공'했다 불리는 이들에게는 '소확행'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소확행이라 말하겠지만, '실패','마지못해- 아둥바둥'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들의 소확행은 매우 낯설게만 보일 것입니다. 마치 금수저에 흙 묻혀 놓고, 흙수저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쓰다보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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