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달 전쯤엔가 조던 피터슨 교수가 지적한 타고난 지능(IQ)와 직업의 연관성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어떻게 보면 식상한 주제이면서도, 여기서의 이끌어진 문제의식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던 주제이기도 했다.
조던 피터슨 교수의 주장은 매우 단순했다.
직업별로 사람들의 IQ를 측정한 결과, IQ와 직업적 연관성은 상당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주장하는 바는 첫번째로,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사회적 통념'을 어느 정도 부수었으며, 두 번째로 '타고난' 지능에 따라 그에 적합한 직업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입밖에 내지 않는 사실이기도 하다.
멀리갈 것도 없이, 행시나 사시 합격자들에 대한 이야기만 봐도 알 수 있다. '그정도 머리가 있으니까, 합격했겠지. 어지간한 머리로는 합격 못한다.'와 같은 이야기를 하며, '타고난' 지능을 추켜세운다. 단지 '너의 지능은 그런 시험을 합격할 정도로의 머리가 아니야.'라든지, '머리는 타고 나야 돼.'와 같은 확정적 답을 내리지 않을 뿐이다. 타고난 머리로 직업이, 인생이 정해진다는 사실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조던 피터슨 교수가 말했듯이, IQ와 직업은 해당 직업의 '적합도'를 말하는 것 뿐이지, 직업의 귀천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사회가 발전할수록 '머리 쓰는 것'을 요구할 뿐이고, '머리 쓰는 직업'이 희소성에 의해 더 많은 연봉과 명예를 거머쥐는 것 뿐이다. 단지 희소성의 차이다.
(어느 직업을 갖느냐가 삶의 경제적 척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앞서 말했듯 지능은 '적합도'일 뿐, 절대적인 잣대가 될 수는 없다. 적합하지 않는 것을 얻으려면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능력을 가지고 타인과 경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육체적 노동은 많은 부분이 '자동화'되고 있다. 사람보다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하게 활동하는 기계 팔이 있는데, 부정확한 사람을 쓸 필요가 없다. 이러한 기계 팔은 전기세만 꼬박꼬박 내주고, 수명이 다한 철골을 가끔씩 교체해주기만 하면 될 뿐이다. 사람에 비해 훨씬 더 '효율적'이다. 육체적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기계팔과 싸워서 이길 정도의 효율성을 갖추지 않으면 희소성이 없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결국엔 남는 것은 기계팔이 할 수 없는 영역들, 복잡다단한 사고를 요하는 직업만이 남게 되는데, 이러한 복잡다단한 사고의 영역을 요구하는 직업들은 타고난 지능, IQ와 연관성이 높다. IQ가 높을수록 이러한 사고영역의 직업에 적합도가 높은 것이다. IQ가 그다지 필요없는 영역들, 단순 반복 작업과 같은 영역은 자동화 설비로 넘어가게 되고, 궁극적으로 육체 노동의 종말이 다가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조던 피터슨 교수가 지적한대로, 복잡한 사고가 필요없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먹고 사는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복잡한 사고가 필요없는 직업은 일종의 사양 산업이고, 여기서 종사하는 사람들은 사양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직업들 대체할 비슷한 수준의 다른 직업들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것은 이미 수많은 기계팔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타고나 지능'을 개발시킨다는 것도 대안으로 보기 어렵다. IQ가 성장에 따라 조금씩 변화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전적으로 IQ를 크게 성장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시대가 발전할수록 사양화된 산업이 존재하고, 그에 맞춰 새로운 산업이 떠오르곤 했다. 이에 맞춰서 정부는 유예기간, 보조금 등으로 사양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을 어떻게 새로운 산업에 '이직'시킬지 늘 고민해왔다. 그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정부로서 당연하게 조치해야 할 것들이었다.
다만, 지금의 문제는 '다수에 속한 인구'가 버려질 위기에 쳐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소수의 높은 지능을 가진 인류만 먹고 살 수 있다는 점인데, 이것을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진화'라고도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적자생존, 사회에 적합한 인류만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매우 비정하지만서도 이것이 현실이다.
과거 육체적 능력이 발달된 사람들이 전쟁과 사냥에서 살아남았던 것처럼, 현대 사회에서는 지능이 발달된 사람들이 살아남는 것이다. 그렇지만 마냥 이대로 내버려둘 순 없는 까닭은 현대문명이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다수 사람들이 행하는 소비와 욕망에 그 토대를 두고 발전하고 있으며, 소비 주체인 다수가 사라지는 순간 현대 사회는 심각한 혼란에 직면하게 될 거라는 점이다.
난세에 영웅이 탄생하듯이 사회가 혼란해지면 그 혼란한 사회에 적응을 잘하는 사람들이 또 살아남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제일 좋은 방법은 혼란한 사회가 오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다. 과연 다수가 속해 있는 직업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마당에 어떻게 다수를 높은 사고력을 요구하는 직업으로 이직시킬 수 있을 것인가. 애초에 그러한 직업들에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가.
문명의 발전과 효율성은 많은 인간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지만, 다시 굶주림으로 몰아가고 있다. 육체노동과 굶주림에서 해방되는 직전의 혼란을 인류는 과연 버텨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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