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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 - 수단과 목적성

어둠속검은고양이 2021. 3. 27. 10:40

순수하게 목적성만을 띈 인간관계가 있을 수 있을까?
과연 인간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의미에선 인간관계를 포함한 모든 것들은 수단이 될 수 밖에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단이라는 속성이 섞여 있다. 순수 100% 목적성은 없다는 말이다.

꼭 순수할 필요가 있겠냐만은 대부분 사람은 '순수'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순수라는 단어 자체가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오염되지 않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등의 의미를 담고 있고, 오염이나 불순물이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섞이지 않았다는 의미는 무언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흰색과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전적으로 믿을 수 있거나 신뢰를 할 수 있는 듯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앞과 뒤가 다른 사람은 그의 불확실성에 우리가 쉽게 신뢰하지 못하듯이 앞과 뒤가 같은 - 순수한 사람은 한결같아서 알기 쉽기에 신뢰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득관계를 떠난, 순수함의 상징이 되는 우정이나 사랑에 대해 더 큰 가치를 내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슬프게도 인간관계는 목적성에 있어서 순수할 수가 없고, 대부분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수단으로서의 가치에 의한 판단이 섞여 있을 수 밖에 없다. 단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혹은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싶어서 묻어두고 있을 뿐이다. 구태여 이것을 말해봐야 긁어 부스럼이라고나 할까. 그냥 살아가면서 상황에 따라 자연스레 행동이나 말로 살짝살짝 드러낼 뿐이다.

오히려 서로를 수단으로 본다는 것이 어쩌면 인간관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보다 더 신뢰를 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순수할 수 있다. 서로가 수단으로서 이득을 보고 있는 관계라면, 서로 이득을 볼 수 있다는 전제하에 누가 먼저 손절을 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득이라는 목적의 공통분모를 공유하고, 수단인 인간관계가 오로지 그것만이 고려된다는 점에서 수단과 목적 둘 다 순수성의 지니고 있고, 그렇기에 신뢰할 수 있다.

반면 인간관계 그 자체가 목적성을 지니기엔 변수가 너무나도 많다. 당신의 심리, 나의 심리, 당신의 상황, 나의 상황,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등등... 인간관계가 목적 그 자체가 되기도 힘들뿐더러, 그것이 목적을 지니는 것 자체가 계속 유지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알겠다. 인간관계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고 치자.
그렇다면 지금 이 글에서 왜 수단과 목적을 구태여 구분짓고 이것을 구구절절 따져가고 있는가. 그건 앞서 말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순수를 좋게 보는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가 수단이라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수단이 되길 원치 않는다. 목적 자체가 되길 원하고,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이 되길 바란다. 그렇게 됨으로서 누군가는 불확실적이지 않은 어떤 확고한 믿음을 가질 것이고, 누군가는 사랑받길 원할 것이고, 누군가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관계가 목적이 된다는 것은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서, 결국 모든 인간관계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수단이 될 수 밖에 없고, 인간은 수단이 될 수 밖에 없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 것은 매우 복합적인 원인과 상황이 섞여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토대로 행동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과 감정이 행동의 출발선으로서 존재하는 이상 인간과 인간관계는 늘 수단이 될 수 밖에 없다.

가령, 같이 노는 것이 즐거워서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면 이 관계는, 이 친구는 나의 즐거움 충족이라는 것에서 수단이 된 셈이다. 내가 힘들 때 친구가 위로해주고 부축해준다면 이 친구는 감정을 추스리게 해주는 고마운 수단이다. '수단'이라는 것에 대한 반감 때문에 단어가 좀 딱딱하게 들리지만 넘어가도록 하자. (사실 수단이나 목적이라느 단어는 가치중립적인 단어다.) 대다수의 관계는 홀로 딱딱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서로 살아가는 것이 이득인즉, 서로의 이익이 맞아 떨어지기에 관계를 유지하고 살아간다. 물론 이것들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계산하면서 살아가지는 않는다. 그냥 감정이 따르는대로, 마음 가는대로 자연스레 행해지는걸 일일이 두드려보니 그런 것이다.

그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관계가 아닐까? 그러나 이 역시 대부분의 자신의 사랑(소유욕) 충족을 위한 유일무이한 수단으로서 관계가 존재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에게 직접적인 대상이자 유일무이하다는 점에서 목적성에 가장 근접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치면 우정도 '그 친구'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는 점에서 유일무이할 수 있고 이 또한 우정으로서 그 친구와의 관계을 원하는 것으로서 목적성을 지닌 관계라 볼 수 있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맞다.

그러나 역시 사랑이든 우정이든 모든 사람들의 관계 형성이 자신의 감정과 생각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관계든 사람이든 결국 목적(근본)이 될 수 없으며 결국 그러한 것들의 해소를 위한 수단이 될 수 밖에 없다. 단지 수단들 사이에서 '얼마나 더 아끼는가' 순위에 의한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렇기에 관계가, 사람이 수단화 되는 것은 숙명과도 같은 것이니 나와 세상이 분리된 순간부터 새겨진 낙인과 같다. 씁쓸하지만 수단이 아닌 목적의 대상이 된다거나 목적 그 자체의 인간관계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이는 단지 있다고 자신을 속이는데 지나지 않는다.

p.s
그러나 단 하나, 부모의 자식에 대한 내리사랑만큼은 관계가 수단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순 없다. 물론 이 내리사랑도 순수한 의미에서 대상-사람이 목적인 사랑이라고 못박기는 어렵다. 부모의 자격 여건을 갖추지 못한 자들은 상상외로 넘쳐나며, 내리사랑을 하는 부모일지라도 정도의 차이지, 수단의 의미가 섞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식을 소유하고자 하는 부모는 많다.

내리사랑이라는 관계가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가 될 가능성이 있는 단 하나의 관계며, 이는 목숨의 직접적인 희생을 한 끝에서만 증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건 마치 자연 세계에서 새끼를 까고 숭고한 죽음을 맞이하는 생명체와 유사하다. 그런 생명체를 일컬어 과학자들은 DNA의 각인이다 뭐다 할테지만, 생명체에게 후손은 대를 잇기 위한 수단일지도 모르겠으나, 인간은 희생과 포기라는 선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식을 택한다는 점에서 후손을 위한 DNA의 각인과는 궤가 다르며, 그렇기에 대상 자체가 목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리사랑으로서 대상이 목적이 되거나 관계가 순수하게 목적적으로만 이루어진 경우는 흔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