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여-름

어둠속검은고양이 2020. 6. 26. 12:30

언제부터였을까.
여름에 더 이상 바닷가와 활기찬 열기를 떠올리지 않게 된 것은.

부모님의 직업상 제대된 여행 한 번 가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근처 바닷가라도 여행가지 않을까 내심 기대에 차서 방학을 기다리곤 했었다.

우리 가족은 늘 바빴다. 부모님 직업 특성상 남들처럼 날 잡고 멀리 여행 가는 것이 힘들었다. 우리 가족은 늘 당일치기로 여행을 다녀와야 했고, 그렇기에 여행 가는 곳은 늘 집에 차로 1시간 거래 내외로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나의 여름방학 가족여행 보고서 숙제는 초등학생 내내 같은 곳이었다. 그래도 가족끼리 자동차를 타고서 어딘가로 이동한다는 것은 조금은 특별하고, 신나는 일이었다.

우리집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는 다들 그랬을 거라 생각한다. 고속도로와 네비게이션이 덜 발달됐었고, 마땅히 놀러갈만한 곳도 많지 않았으니까. 그 땐 주 5일제 근무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 작은 경험들이 더 크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나의 가족여행 보고서의 내용을 늘 비슷했다. 커다란 4절지에 싸인펜으로 제목, 가훈, 가족 구성원, 여행 목적, 일시 및 장소를 쓰고나면 내용칸에다 사진을 4장정도 딱풀로 딱 붙이고선 느낀 점을 끝으로 보고서를 마무리 했었었다. 지금이라면 컴퓨터를 이용해 더 멋지고 깔끔하게 제작할 수 있겠지만, 그 땐 직접 싸인펜으로 글씨를 써야만 했다. 자를 대고서 나름 반듯하게 쓴다고 쓰는데, 쓰다보면 기울기가 달라져서 힘들게 다시 작성하곤 했다.

그래도 이건 하루 날 잡고 하다보면 끝내 수 있는 방학숙제였지만, 방학탐구생활이나 방학일기는 그럴 수가 없었다. 방학탐구생활 속에는 책 읽어야 하거나, TV 방송을 꼬박꼬박 챙겨봐야지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 있었다. 지금이야 인터넷 강의로 슥삭슥삭 넘겨서 해결할 수 있지만, 인터넷 강의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엔 방송을 매번 챙겨본다는 것이 힘들었다.

그럼에도 방학탐구생활을 위해 TV 방송을 보는 순간, 비로소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는 걸 깨닫고선 즐거워했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면 왠지 모르게 여름방학 동안에 바닷가로 꼭 한번은 여행을 가야 하거나, 이른 아침부터 타오르는 이 열기를 부지런히 즐기기 위해 밖으로 나가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길어져 버린 낮 시간.
시작된 여름방학.
바닷가와 아침부터 뜨거운 열기.
이 모든 것들은 어린 날, 부푼 마음으로 여름을 맞이하게 만드는 마법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여름은 나에게 덥다는 것과 시원한 카페만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냥 생활양식이 바뀌었다.
이젠 주변에 넘쳐나는 카페들로 우린 언제든지 음료 한 잔에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게 됐다. 사람들에게 
이 덥고, 짜증나는 날씨에 밖을 걸어다닌다는 행위는 어쩔 수 없는 경우메만 해당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무더운 여름날 피서간답시고 성수기에 여행을 가는 것은 이젠 셀프 고문을 가하는 합리적이지 못한 소비가 되어버렸고, 이젠 번거로움 없이 바로 그 자리에서 쉴 수 있는 홈캉스나 호캉스가 대세가 됐다. 다들 홀로, 혼자만의 공간에서 편하게 지내는 것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호캉스나 홈캉스는 집돌이인 나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그 활기찬 열기와 피서지를 떠올리던 여름 날이 무척 아쉽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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