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시장경제에선 소비력이 곧 권력이다.
소비자들 눈치를 안 볼 수 있는 기업이 있다면 이미 그 기업은 충성도 높은 고객을 확보하고 있거나 소비자들의 눈치를 안 봐도 될 만큼 더 큰 시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면 그 기업 아니면 대체제가 없는 독과점 상황이거나.
대부분의 기업들이 여성의 눈치를 보는 이유는 여성들의 소비력 때문이다.
마케팅에서 여성은 세 명의 소비자라는 말이 있다. 여성 그 자신, 여성의 남편, 여성의 아버지다. 그들의 소비는 자본주의가 정한 이상적 가족 형태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남자가 벌어오고, 여성은 내조하는 것이 이상적인 가정이었기에, 가족의 소비를 담당하는 것은 여성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소비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자식들과 그들의 남편 - 가족을 위한 소비도 겸한다. 결국 남자는 생산하고, 여성은 소비하는 것으로 분업화되었다. 그 결과 여성은 자신들이 생산하는 것 이상을 소비하는 형태로 바뀌었고, 남성은 생산 능력과 자산 증식의 능력을 기르는 형태로 바뀌었다.
금융지식이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떨어지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회생활이라든지, 저축 - 자산증식 계획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벌이 내에서 최대한의 효율을 이끌어 낼 '현명한 소비'가 중요할 뿐이다. 그렇기에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소비를 많이 하면서도, 남성에 비해 많은 것들을 고려하면서 꼼꼼하게 소비한다. 남성들은 이런 소비적인 여성들을 얻기 위해서 돈 버는 능력, 자산 증식 능력을 갈고닦지만, 정작 소비할 땐 대충대충 산다. 그래서 까다롭다.
그러나 사회는 바뀌어가고 있다. 남자는 돈을 벌고, 여성은 내조한다는 이상적인 가정은 이제 구닥다리가 되었다.
사회는 이제 여성들도 사회전선으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먹고 살기 팍팍해졌고, 경제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직업 만족, 자아실현을 위해서 직업을 갖게 되었다. 돈벌이는 한정되어 있으나 노동시장은 과포화 상태가 되었고, 이제 남성들은 밥그릇 놓고 여성들과 싸우게 되었다. 밥그릇이 작아진 남성들은 여성들의 소비력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도태되었고, 여성들은 밥그릇 작은 남성과 살 바엔, 자기만족을 위한 소비를 할 수 있는 - 가족을 위한 소비를 할 필요가 없는 독신주의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러나 남성 여성 모두 여전히 소비성향-생산 성향은 남아있어서, 여성들은 필요 이상의 소비를 꾸준히 하고, 남성들은 소비보다 저축을 선택한다.
남성들은 미래의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 저축하는 셈이고, 여성들은 미래의 남편이 짐을 짎어질 것을 기대하면서 소비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점차 모호해져가고 있다. 남성들이 결혼을 포기하면서부터 저축보다 소비가 커졌으며, 기업들 역시 빠르게 남성들을 현혹할 수 있는 상품들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남성들의 소비력은 여성들의 소비력을 따라갈 수가 없다. 반대로 은행이나 금융기관들은 여성을 위한 금융상품들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여성들이 과거에 자라온 환경상 금융지식과 담을 쌓고 지냈기에 대체적으로 좋은 상품을 가리지 못하고 흑우가 되어 금융기관의 배를 불리고 있다. 소비는 상대적으로 공부해야 할 일이 적지만 (돈 내고 구매하면 끝이다), 금융상품은 복잡하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금융기관들은 상대적 흑우인 여성들을 선호하지만, 여전히 절대적 파이의 크기가 남성들이 더 많기에 굳이 여성을 위한 직관적이고 단순하게 상품을 구성하려 들지 않고, 설명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쉬운 사람이 공부해서 오라는 식으로 목을 뻣뻣하게 세운다. 그리고 여성, 노약자들을 대상으로 상품을 속여 판다.
여하튼 간에 소비력이 권력인 이 시대에 기업들은 여성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이상적이던 과거의 가정의 모습이 파괴되고 있는 현재에도 그렇다. 여전히 사람들의 성향은 '여성은 소비하고, 남성은 생산한다'는 가부장제의 경제소비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그런 여성들을 얻기 위해서 돈벌이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돈벌이가 충분한 남자들은 여성들과 결혼해서 잘 살고, 돈벌이가 애매한 남성들은 여성들과 맞벌이를 하든가, 혹은 결혼을 포기하게 된다. 출산율을 올리고 싶으면 결혼할 수 있을 만큼의 좋은 '남성들의' 일자리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여성들에게 질 좋은 일자리가 없는 것도 문제지만, 출산율-결혼율에서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남성들의 일자리다. 여성들의 질좋은 일자리가 늘어나면 여성들은 혼자 사는 것을 택한다. 어찌됐든 가사와 육아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손해보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 여성들이 생산 대신 소비를 택한 대가로 자아실현을 포기하고, 육아와 내조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으며, 남성들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 가부장제는 여성들을 바닥으로 내몬 대신 보호받을 대상으로서 세상 풍파로부터 지켜줘야할 존재로 두었으며, 남성들에겐 권위와 권력을 준 대신에 그만큼 의무의 갑옷을 입길 강요했다. 천편일률적이던 삶의 방식이 현대에 와선 더 이상 맞지 않다.
다만, 소비력이 권력인 사회적 추세는 정치권에도 반영되고, 정치권은 늘 여성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결국 이것을 풀어나갈 답은 없다. 자연스러운 흐름을 막을 수 없으니, 이 흐름들을 어떤 방식으로 현대사회에 맞게 정착시킬 것인지 논의했어야 했는데, 나이드신 정치권은 그럴 생각도, 의지도 없다. 흑백논리식으로 악으로 규정해놓고, 악을 물리치면 세상에 평화가 찾아온다는 그런 단순 명쾌한 권선징악적 정치만 하고 있을 뿐이다.
출산율이든, 결혼이든 아무래도 좋다.
그냥 각자도생 하고, 가족을 부양할 만큼의 능력 키우는 것 밖에 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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