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존실/잡념들-생각정리

선(line)과 해상도

어둠속검은고양이 2021. 2. 26. 03:49

뭐든지 선(line)이 중요하다.

얼마 전 필자는 '공부란 세상에 대한 해상도를 올려주는 행위'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분명 공부를 한다는 것은 지겹지만, 그것은 나의 세계를 열어주고, 나와 사회의 만남의 장을 넓혀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신조차도 죽어버린 이 세계 속에서 나를 구원할 것은 나 자신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를 이해하고, 내가 있는 이 세계를 이해한 뒤에야, 나의 지표를 명확히 세우고 세계 속으로 나를 밀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세계의 만남의 가능성을 증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신라시대 골품제를 생각해보면 된다. 그들은 뛰어난 능력이 있음에도 출생의 한계 때문에 그 능력을 펼칠 수 없었다. 이러한 제한들은 시대가 흐르면서 하나씩 하나씩 풀렸고, 마침내 현대에 이르러서 모든 제약이 풀렸음에도, 현실적인 조건들 - 제약들은 여전히 남아있다. 경제적 이유로, 제도적 이유로 교육 받지 못한 이들이 많고, 그들 중에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가능성이 여러가지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닫혀진 상태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린 개방적 마인드, 세계 시민의 마인드를 강조한다.
더 많은 세계, 더 많은 개방성, 더 높은 가능성들을.

그러나 그 가능성들은 현실이 받쳐주지 못할 때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온다. 자유를 맛본 새들이 새장 안에 있을 수 있을까. 새장 안에서 태어나 새장에서 쭉 자라온 새들은 새장 안에서 안락함을 느낀다. 오히려 새장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 한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영역이니까. 마찬가지다. 공부를 통해 나의 한계와 나의 가능성을 깨닫고, 세계를 이해했는데, 그 세계를 체험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초고사양 게임을 즐기기 위해서 엄청난 그래픽 카드과 컴퓨터, 모니터로 풀 세팅 했는데, 돈이 없어서 95년도의 고전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95년식 컴퓨터와 모니터였다면 그냥 95년도 고전 게임을 즐기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것은 외부인이 보기엔 충분히 비극적이지만, 사용자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선(line)이 중요하다.

공부는 해상도를 높여준다는 의미에서 중요하지만, 그 해상도가 나에게 어떤 의미로 활용될지는 또 다른 문제다.
애초부터 낮은 해상도를 인정하고, 그 낮은 해상도에 최대한 맞는 삶을 살아가면, 사용자에게는 그것이 최적의 삶이다. 높은 해상도를 지닌 사람이 높은 해상도에 맞춰서 그 삶을 살아간다면 그 역시 매우 좋은 삶이다. 그러나 해상도는 높아졌는데, 그 해상도에 맞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사용자에게 괴로운 것은 없다. 그리고 그런 경우를 우린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흔히 말하는 고학력 백수가 그렇다. 그들이 배워온 것들이 꼭 사회 속에서 써먹으려는 목적인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배우던 것들과 자기 자신들이 앞으로 삶에 있어서 무쓸모하며 의미없는 것이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밥벌이를 위해서 그것들을 다 내려놓아야만 하는 심정은 어떨 것인가.

결국 인문학이니, 삶의 공부니, 세상의 해상도니 하는 것도 내 삶이 받쳐주지 못한다면 독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