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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비정형화 그리고 에로스적 사랑에 정형화된 시선들

어둠속검은고양이 2018. 5. 2. 08:22

사랑이란 무엇일까?

아주 아주 진부한 물음으로 이 글은 시작한다. 그러나 이 질문만큼 대답하기 어렵고, 또 대답하기 쉬운 질문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야기한다. 365일 내내 이야기하는 것도 모자라서, 수 천 년 전부터 사랑 타령을 해왔으나, 여전히 사랑에 대한 명쾌한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우린 늘 모른 채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에서부터 그(그녀)가 날 사랑해줄까요? 혹은 이런 것이 사랑일까요? 와 같은 확신을 내려주길 바라는 질문까지 사랑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수 많은 질문을 던지고 갈구한다.


사랑은 사람 수 만큼 존재한다. 이전에, 사람만큼 비정형화된 것은 없다. 단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우리는 사람으로 '인지'하고 있을 뿐, 사람은 정형화되지 못했다. 지금은 80억명이던가? 80억명의 사람과 80억개의 삶이 있고, 이 수 많은 비정형화의 존재처럼 사랑 역시도 동일하게 비정형화 되어 있다. 마치 개개인의 고유한 특성과도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우리가 사람을 '인지'할 수 있는 공통적인 분모가 존재하듯이 사랑 역시도 공통적인 분모가 하나 존재한다.


바로 감정의 교류다.


우리는 사랑을 에로스(eros), 필리아(Philia), 스토르게(Storge), 아가페(Agape), 루두스(Ludus), 마니아(mania), 프라그마(Pragma)와 같이 6가지 혹은 플라토닉 러브(Platonic)를 넣어 7가지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 모든 종류의 사랑은 우리가 사랑이라 '인지'할 수 있도록 사람과 마찬가지로 공통점을 지닌다. 대상과 대상을 생각하는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이고,그 대상과 감정적 교류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감정의 교류가 저마다 다르기에 정의가 불분명해지는 경향이 있다. 중요한 것은 감정의 교류가 저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사랑의 형태를 에로스적인 사랑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으며, 특히 감정 교류의 극대화가 성관계인 것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솔직히 이 부분에 대해서 연구해보거나 들어본 바가 없어서 모르겠으나, 다수가 성관계에서 감정의 교류가 극대화로 일어날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도 이성애자, 동성애자, 무성애자, 퀘스처너리 등등 다양한 사람이 있듯이, 사랑의 형태, 그 중에서도 감정의 교류도 다양할 것이라 생각한다. 


전에 무성애자를 다룬 기사를 하나 본 적이 있다.

수 많은 사람들의 오해 중 하나가 무성애자는 성욕이 없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었다. 그 기사 제목이 '케이크는 섹스보다 달콤하다' 였던가? 무성애자들에게 섹스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선택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비유를 하자면, 배가 고픈데, 연인이 짜장면을 같이 먹자고 한다. 짜장면을 싫어하는 것은 아닌데, 딱히 좋아하는 편도 아니다. 본인은 짬뽕으로 바꿀 수도 있고, 아니면 연인이 권유하는 짜장면을 그냥 먹을 수도 있다. 그런 것과 동일선상이다. 그렇기에 케이크는 섹스보다 달콤하다 라는 제목을 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연인과의 감정적 교류의 최고조가 꼭 성관계일 필요가 있나? 뭐, 무성애자도 여러 종류가 있는 것으로 안다.


다시 돌아와서, 사람도 다양하고, 그 사람만큼이나 사랑도 다양하다. 단지 좀 더 편하게 구분짓기 위해 6가지 - 7가지로 유형으로 구분해놓았을 뿐이다. 그리고 감정의 교류 역시도 그 사랑만큼이나 다양하다. 하지만 사회는 '다수'에게 편하도록 돌아간다. 이는 사랑의 형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랑을 다룬 대다수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이성애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으며, 그 중에서 에로스적인 부분은 떼어놓지 않고 나온다. 이는 그나마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것(-영상으로 사랑을 표현하기 쉬운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에로스적 사랑의 종착역이 감정 교류의 종착역인 것처럼 판타지화하고, '정상'인 것으로 표현한다.


우리는 사랑을 알 수 없다.

뭔가 알 것 같기도 한데, 알 수 없어서 되묻고 이야기한다. 확신을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다. 그래서 우리는 수 많은 사랑이야기를 접하지만, 고정관념만 생겨난 채, 자신의 내면과 마주할 때 혼란을 겪는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감정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사랑은 오롯이 본인이 깨우쳐야 할 몫으로 남겨두며 글을 마친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을 보며 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