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 19(금) 대학로 CGV
영화의 소재 자체는 좋았다고 보여진다. 인간의 뇌는 실제적으로 많이 쓰지 못하고 있고, 만약 100%를 쓰게 된다면? 이라는 상상은 사실 흔하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상상력을 포착하여 소재로 삼아 시도한 점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으며, 나름 감독이 이러한 뇌 사용 100%에 대해 나름의 인과관계를 부여하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전개부분에 있어서 마이너스가 크다. 액션 느와르물처럼 보이나, 뇌 사용 100%라는 것을 통한 메세지 전달과 의문점을 던지는 것이 주된 목적으로 보이는 이 영화에서 액션은 단지 사건을 전개시키고, 시간을 끄는데 머무를 뿐이다. 굳이 없어도 될 것을 살짝 얹어놓은 느낌이랄까.
근데...그 액션마저도 없으면 이 영화 답이 없다.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그 뇌라는 것에 대한 메세지와 의문점을 던져주는데 있어서 필요한 시간은 15분이면 될 정도로 짧기에....라고 감히 써본다. 뇌에 대한 철학적 물음은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을 것이지만, 일단 이 영화에서 나오는 '강의' 자체만 '듣는다고 하면' 시간은 짧다. 사실 뇌의 사용량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다. 어떤 이들은 10%설이 맞다고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실질적으로 사용량은 상당부분이라는 것이다.....그러나 뇌 사용량은 어떻게 보면 중요치 않다. (영화에서의 핵심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설이 불분명할 때, '만일...'이라는 것에서부터 영화의 상상력이 시작되는게 아니겠는가?
초반에 영화가 시작되면서 등장하는 노먼박사(모건 프리먼)가 던져주는 과학철학적 물음과 끝부분에서 뇌에 대해 영상적으로 표현하려고 애쓰는 것, 이 두 가지를 빼면 나머진 꾸역꾸역 밀어넣은 액션이다. 게다가 그 끝도 조금은 미흡하게 봉합된 느낌이고. 지인으로 말을 빌려쓰자면, 처음과 끝만 생각하고 만든 영화 같다고.뇌 100%에 대한 상상력 빈곤....실질적으로 정말 100%는 어떻게 될 지에 대한 추측만 있을 뿐, 감히 어떤 상상을 할 수 있겠는가...우리가 쓰고 있는 뇌 용량에서의 한계적인 상상일 뿐이니...결국, 스케일 너무 커져버려서 이것을 미쳐 소화하지 못한 영화, 먼치킨이 되어버린 그런 영화다.
루시(스칼렛 요한슨)의 액션이 그나마 볼 만한, 딱 그런 영화. 내가 봤을 땐 극장에서 볼정도는 아닐 듯 싶다.
여기까지가 나의 주관적인 평가였고, 이제부터는 영화에서 던져준 의문점에 대해 고민해보려고 한다.
초반에 나온 노먼박사의 강의를 통해, 뇌에 대해서, 더 나아가 인간, 세포의 삶의 목적에 대해, 던져주는 질문은 이 영화에서 핵심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질문들이 뇌에 대해 스스로 의문점을 갖고 성찰해보게 만들어줘서 너무 좋았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노먼박사의 강의와 루시와의 대화 부분은 따로 다시 보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으며, 이것들이 없었다면 이 영화가 만들어질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렇기에 집에서 보면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세포는 영양이 불균형하거나 환경이 좋지 않으면 자급자족으로 영생을 택하지만, 환경이 좋으면 번식을 택하지.'
- 어째서 그럴까...환경이 좋든 나쁘든 간에 그거 세포자체로서 계속 존재해 나가면 될 것을 왜 굳이 어떠한 물질을 이루고, 각각의 물질 속에서 '인간'으로서 '동물'로서 혹은 '식물'로서 그러한 형태를 구성하여 살아가는 것일까. 굳이 그렇게 살아가면서 먹이사슬을 이루고 생태계를 이루고 흔히들 말하는 '진화'를 하려고 하는 것일까. 세포에게 있어서 '진화'라는 것이 분명 필요한 것인가. 애초에 우리 인간이 인식하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진화'의 의미를 부여하고,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일뿐, 세포, 물질 그 자체로 남아있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단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오랜 시간을 걸쳐서 세포에서 세포로 지식과 능력의 축적이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이다.(지구 멸망, 종의 멸망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세포는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하지만 환경이 좋지 않으면 스스로 자급자족을 하여 영생을 한다고 말했다. 결국 죽음을 피하고 영생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단지 환경이 편해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러한 스스로의 죽음회피 가능성, 영생을 포기하고 탄생-소멸의 과정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과연 세포의 관점에서 '효율적'인가. 혹은 달리 생각해 이 세포들은 발전이 없다는 것은 환경 변화에 의해 언제든지 소멸할 수 있다는 것이므로(여러 인종의 결혼을 통한 유전자 조합은 질병이나 변해가는 환경에서 뛰어난 적응력을 보여준다.) 그러한 소멸가능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포가 형태를 취하고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러한 소멸가능성에 벗어나기 위해 취한 형태 중 인간이 있었으니, 그 인간들에 의해 소멸 가능성이 더 커지는 듯하다.) 그런 맥락에서 살펴보면 '번식'이라는 것도, 일단 스스로 살아남기에 괜찮은 환경이 조성되었기에, '소멸가능성'을 더욱 낮추기 위한 방안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
왜 하필 '루시'일까?
- 제목을 루시라고 붙인 것에 대한 설명은 영화에서 노골적으로 나와있긴 하다. 최초 인류라고 불리우는 '종'의 이름이 루시라는 것. 그 루시에서 현재 뇌 사용 100%의 루시로 기나긴 세월을 통해 진화하였다. 즉, 최초에서 끝으로 가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주인공의 이름을 루시로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결국 이는 예수님의 말씀(?) "내가 알파이자, 오메가다"라는 부분에서 끌어온 것은 아닐지 싶다. 특히나 마지막에 루시가 루시를 향해 손가락을 뻗는 것은 결국 천치창조를 나타내는 행위로서 인간에서 신으로 다가갔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보여진다.
루시를 향해 손가락을 뻗는 루시
- 결국 이는 인간이 뇌를 100% 사용하면 신이 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는데, 앞서 말했 듯이 뇌 100%는 중요치 않다.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라는 부분이 중요한 물음인 것이다. 어째서 신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대체 인간이 어떤 존재이기에 가능할 것인가. 기독교적 사상에서는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본따 만든 유일한 피조물이므로'다. 그러나 이러한 피조물 사상은 결국 인간과 신을 나눠버리는 한계를 가져왔다. '유일한 신을 닮은 피조물'로서 존재의 의의가 생기고, 신을 닮았기에, 신을 향해 갈 수 있지만, 피조물인 이상 결단코 신을 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로 이 영화에서는 인간을 신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아니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신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서 사람을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간에 노먼박사가 '결국 인간은 존재보다 소유에 집착한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뇌 사용량이 10%에 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누누이 말했지만, 뇌 사용량 10%~100%는 중요치 않다. 단지 보기 쉽게 나타내주는 객관적(?) 지표라 말할 수 있다. 10%를 사용하는 인간은 일반적인 인간으로서 '소유'에 집착하는 존재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좀 더 많은 재산과 권력일 뿐이다. 100%를 사용할 수 있게 된 인간은 '소유'에 대한 것을 넘어선 존재다. '인간적인 부분'이 사라져 간다고 말하며 루시는 무엇을 삶의 목표로 해야할지 노먼 박사에게 묻는다.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요, 박사님.
- 노먼박사는 아무래도 후대를 위한 지식의 전승이 아닐까요. 하고 답한다. 늘, 수 십억년전부터 우리 세포가 그래왔듯이 후대로의 지식 전승이 어쩌면 다 일지도 모른다. 아니, '노먼박사'의 뇌 사용량 수준에서 답해줄 수 있는 최선의 답일 것이다. 100%에 이른 사람이 과연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있겠는가....'지식의 전승'이라는 것은 과거로부터 쭉 살펴본 바로, 범인(凡人)들이 내린 결론일 뿐이다. 그 차원을 넘어버린 존재가 어떤 목표를 지녔는가에 말할 수 없다. 인간은 '소유'에 집착하게 되면서부터 퇴화했다. 자본주의를 만들고, 그 자본주의 안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채, 소유하는데 급급하다. 대부분은 그 '소유'에, '일상'에 파묻히게 되면서부터 '존재'에 대해 망각하게 된다. 우리의 표상적인 삶의 목표는 '소유'이며, 세포로서의 삶의 목표는 '지식 전승'이다. 그러나, 이 지식 전승 마저도, 지식을 획득하고, 회득하여 축적한다는 점에서 '소유' 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어디에나 존재해
-루시의 마지막 말이다. 그것은 물질(matter)을 말하는 것이다. 세포라는 단위를 넘어선 물질.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데, 루시는 궁극적으로 물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소유'하는 존재를 넘어서 '신'이 되고, 그 신이라는 것은 결국 물질로서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들이다.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어디에든 없는 물질들. 영화에서 루시는 말한다. '계측 단위가 잘못되었어. 우리는 수학으로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1+1 = 2가 아니야.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가둬버린거야.'라고. 그러자 노먼박사는 묻는다. 그럼 계측 단위가 없으면 어떻게....설명할 수 있냐고. 루시는 답한다. '시간' 시간만이 유일한 계측단위라고.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기호, 수학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편리성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 끌어다 쓴 것들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에 매몰되어 수동적으로 변해가고, 소유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10억에서 1000억으로, 부자에서 더 부자로. 우리의 삶, 존재 자체를 설명해줄 수 있는 것들이 마땋치 않아 가져온 것들이 우리의 존재를 오히려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 물질(matter)은 물질일 뿐, '소유'가 필요한 물질이 아니다.(사실 살아가는데 우리는 소유가 필요하다....먹고살기 위해서) 물질은 어디든지 존재하나, 어디에도 없다. 루시가 말했듯 '공허'할 뿐이다. 그 물질에게 있어서 유일한 것은 '시간'뿐이다. 기나긴 시간을 통해서 '그것'은 세포로서 '진화'든 '변화'든 간에 무언가로 바뀌어 왔다. 그리고 앞으로 물질(matter)로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인류는 이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 영화를 통해 묻는다. 이러한 지식체계...인간이 쌓아온 것이라 굳게 믿어 온, 인간의 존재방식인 '소유'를 전면 부정하는 것들을 받아들인 준비가 되었느냐고 노먼박사를 통해 묻는다. 루시가 후대를 위해 전한 것은 일종의 '지식'이지만, 과연 그것이 기술의 지식일지, 사상의 지식일지, 과연 지식이긴 한 것일지..'존재' 본연에 대한 깨달음은 아닐지 싶다. 루시가 차세대 컴퓨터를 직접 만들면서까지(현 체계의 언어로는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 전해준 USB는 단순 USB가 아니라 우주를 담고 있는 USB다. (우주보다도 더 수많은 거대한 정보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인간, 존재를 상징)
군데군데 영화 속에서 나오는 철학적 대사가 단지 아무런 의미없이 넘어갈 대사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기 쉽다. 영화에서 너무나도 대놓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친철한데??) 그러나 그 대사에 대해 곱씹어보면서 다시금 생각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이 영화에 대해 평론하는 많은 이들이 영화 메세지를 설명하면서 쓴 에이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의 사상에 대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실은 나도 이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영화에 대한 대사를 곱씹어보며, 리뷰를 써보며, 알게 된 몇몇 사실들을 통해 이렇게 좀 더 깊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역시 영화는 아는 만큼 보이는 모양이다. 메세지와 소재는 너무나 좋았는데......그것과는 별개로 그 메세지를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문제였고, 영화의 구성이 문제였다. 전달하는 방식은 어떻게 보면 불친철하다.....대놓고 대사로 써놓는 것에는 친철하다 할 지 언정(?) 그것을 고찰해 나갈 수 있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던져주는 물음, 메세지만 보면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지만...영화로만 글쎄 올시다?
6~7점 정도로 평해본다.
이번 기회에 에이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를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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