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들어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지난 여름 더위를 내뿜지 못한 것이 아쉽기라도 하는 듯 햇볕은 열기를 뿜어낸다. 마치 지나가버린 사랑을 더 아쉬워하는 것처럼. 편지를 쓰던 내 손은 금새 땀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내가 쓰는 이 편지는 너를 향한 것일까, 아니면 사랑을 향한 것일까.
여름날의 더위가 뜨겁고 강렬하게 타오르다 채 열기를 남겨놓고 사라져 버리듯, 너 역시도 타오르던 흔적을 남겨놓는다. 하지만 이 열기처럼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저 느껴질 뿐.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넌 내 머리 속을 부지런히 뛰어다닌다. 하지만 모든 기억이 그러하듯 너의 기억들 역시도 사라져가고, 너의 모습만이 남아 나를 기다린다. 그리고 남는 것은 약간의 추억들이 새겨진 기록의 흔적과 장소뿐이다. 그러한 장소들과 기록의 흔적들이 너에겐 추억이었을까.
여름날 한껏 꾸미고 온 너를 난 눈치채지 못했다. 친구와의 저녁 약속이 있다는 너의 말에 꾸미고 나온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옷차람이나 향수처럼 자신을 드러내는 것들이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난 눈치채지 못했다. 정작 너를 만나러 갈 때면 그렇게 열심히 꾸미던 나였으면서.
우리의 관계가 다치지 않도록 넌 너의 선에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표현하고 있었지만 어리숙했던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너의 그 조심스러운 답변이 내가 너에게 조심스레 표현했던 것에 대한 거절의 표시로만 생각했다. 정작 나도 우리의 관계가 다칠까봐 너에게 조심스레 표현했으면서.
너를 향한 나의 행동들의 사소함은 그리도 신경쓰면서 어째서 너의 행동들에 담긴 사소한 진심들을 나는 눈치채지 못할까 싶다. 본인 스스로에 대한 것은 얼마든지 개선할 수 있지만, 본래부터 타고난, 사소함을 눈치채지 못하는 관게의 둔감함은 고치기 어렵다.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관계는 무수히 많은 사소한 생채기를 낸다. 그러나 생채기에 세월이 내려앉은 탓일까. 새로 생긴 생채기들은 전처럼 쉽게 낫지 않는다. 그 생채기는 너에게 새기는 나의 생채기라는 점에서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아직 소설은 끝나지 않았고 뒷장이 더 많이 남아있다든가
내가 신경쓰는 만큼 타인도 똑같이 신경쓰는 것이라든가
타인에 생채기를 주는 것에 무덤덤해져야 한다든가
불확실에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든가
라는 그럴듯한 말들을 주저리 써내려가보지만 태생적 타고남은 여전하다.
오랜만에 보고 싶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연락하지 못할 네 연락처만 머뭇거리다 덮어놓는다.
'기록보존실 > 떠오르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실과 의도, 그리고 대화 - 식민지 근대화론 (0) | 2019.08.14 |
---|---|
편의점 우산 (0) | 2019.08.13 |
화석이 되어버린 사람을 아시나요. (0) | 2019.08.04 |
신화가 되어버린 사랑, 그리고 현실 (0) | 2019.07.27 |
신기루 같은 사람 (0) | 2019.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