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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기, 에로스적 사랑에서 프랜들리 사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어둠속검은고양이 2019. 4. 17. 11:22

오늘은 간단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물론 이것은 나의 뇌피셜에 불과하다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얼마 전에 커플이 된 지 6년차쯤 된 지인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정확한 년차는 기억나지 않지만, 여튼 장수커플이다. 장수 커플이라면야 흔히들 나오는 주제가 결혼 아니겠는가. 취업도 했고 하니 결혼할 준비해야 겠다고 이야기 했더니, 아직 모른다고 했다. "그래도 결혼하게 된다고 해도, 워낙 서로에게 익숙하니까, 달라진다는 느낌은 별로 없을 것 같네?"라 물었더니, 그럴 것 같다고 답하며, "커플이든 부부든 어차피 권태기는 온다고 생각한다. 결국엔 정으로 사는거지"라는 말을 덧붙였다.

해당 지인은 권태기를 극복한지 오래다. 권태기 기간에 일련의 사정으로 잠시 떨어져 있게 되었는데, 떨어져 있었더니 극복하는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그게 왜 도움이 됐는지 이유를 물었다. "뭐랄까. 그냥 답답하달까, 보기 싫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부부였을 때 권태기가 오면 극복하기 힘들었을거다. 부부일 땐 보기 싫더라도 한집에서 같이 있어야 하니까. 오히려 떨어져 있었더니, 생각도 차분하게 정리할 수 있고 더 낫더라."라고 답변했다.

음...
당분간 떨어져서 홀로 생각을 정리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는듯 하다. 어찌됐든 자신을 자극하고 있는 사람과 계속 같이 있다면 생각정리가 안 될테니 말이다. 그 떨어지는 기간이 길어져서 무덤덤해지면 헤어지는거고, 갈무리를 잘 해서 만난다면 극복한 것일 게다.

여기서부턴 뇌피셜이다.

권태기는 왜 오는 것일까?
그건 아무래도 질리기 때문일 것이다. 질린다고 하면 마치 못된 것 같은 답변이다. 하지만 그것은 도덕적인것과는 별개의 그냥 감각적인 문제다. 뭐, 사랑도 감각적인 것이니까, 심각한 문제긴 하다. 질린다는 말을 좀 더 순화시켜보자면, '익숙해진다'는 말이다.

그것은 마치 연인간에 에로스적 사랑에서 프랜들리 사랑으로 넘어가는 것을 말한다.

대부분의 사랑에는 에로스적인 부분이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한 욕구들은 자연스럽게 상대방과의 육체적 관계로 이어지게 만들며, 이는 여러가지 새로운 경험과 긴장감을 만든다. 궁극적 목적(?)을 세우고, 이를 이루기 위해 또 작은 소규모 목표를 나누어 밀당이라는 프로젝트를 함께 이행하는 것이다. 프로젝트 참가자들은 물론 너와 나, 둘 뿐이며, 프로젝트의 결과도 우리 둘이서 책임져야 한다.

하지만 프랜들리 사랑은 긴장감이 없다. 대신에 안정감이 있다.
충분한 기간(?)으로 상대방에 대해 쏙쏙 잘 알고 있으므로, 신뢰가 쌓여 있다. 그래서 늘 예측이 되고, 그 예측 대부분이 적중한다. 뻔한 결과가 보이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만큼 지루한 것이 어딨을까. 긴장감은 사라지고, 의무감이 우릴 짓누른다. 이 순간부터 우리는 자신하고 있는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얘를 사랑하고 있긴 한걸까?"

결국 권태기는 사랑을 이루고 있는 구성 성분이 바뀌어 가고 있는 과도기라 할 수 있다.
에로스적 사랑에서 오는 긴장감, 신선함이 프랜들리적 사랑의 신뢰감, 안정감으로 대체되고 있는 상황이다. 비슷한 예가 바로 형제자매다. 우리는 형제자매에 에로스적인 마음을 품지 않는다. 오히려 증오(?)에 가까우며, 맨날 치고고 싸운다. 하지만 타인이 형제자매를 울리거나, 괴롭힌다면 우리는 분노에 휩쌓인다. 나는 괴롭혀도 되지만, 남들은 괴롭히면 안돼. 내로남불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가족으로서 사랑하고 있는 셈이다.

권태기는 (결국엔 타인인) 나의 연인을 진정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데서 오는 지루함인 셈이다.

극복방안은 있을까?

애초에 극복해야 할 어떤 감정적 문제가 아니라 생각한다.
정확히 권태기가 문제가 있다면, 서로 권태기가 오는 시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좀 문제다. 한쪽은 아직까지는 타인으로 인지하고 있어서 긴장감과 신선함을 즐기고 있는데, 한쪽은 이미 가족처럼 생각하게 돼서 밀당이고 뭐고 하고 싶지 않다면? (우린 형제자매와 밀당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서로가 상대입장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밖에 할 게 없다. 그래서 우리는 권태기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다. - 귀찮더라도, 좀 더 변화를 주려고 노력하고, 반대 입장도 신선함이 좀 떨어지더라도 이해를 해줘야한다. 평소에 하지 않았던 활동을 같이 해보는 것이 그래서 좋다고들 한다. (일상적인 데이트 말고, 봉사활동, 배낭여행과 같은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는 활동은 어떨까?)

하지만 예외도 있다.
정말 연애의 '설렘'만을 중요시하는 인간들. 자신을 자극시켜주는 감각만을 중시해서, 가족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권태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자신의 감각을 자극시켜주는 '도구가 질린다'고 느끼는 인간들. 그런 인간들은 연애를 오래하지 못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을 찾아다닌다. 빠른 손절각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도구로서 버려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