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단상을 하다, 무거운 주제로 따로 글을 쓰게 됐다.
오래 전부터 필자가 자주 언급했던 차별과 구별이다.
구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차이는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과 남성, 종교인과 비종교인, 어른과 아이, 외국인과 내국인, 지인과 타인 등등 우리는 성별로, 나이로, 종교나 사는 곳에 따라 차이가 나타난다. 그러한 차이는 자연스레 구별되어 진다. 하지만 그것들이 차별로 일어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과의 의사소통 속에서 사람의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그렇다.
이는 매우 단순한 현상이다. 예를 들어 친한 지인에게는 웃으며 친절하게 인사하지만, 그저 그런 타인에게는 무뚝뚝하게 인사하는 것이다. 즉, 나 자신 이외의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발언들에 차이가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다. 위의 예시는 너무나도 사소한 일이지만, 인사받는 입장에서는 괜시리 차별받았다고 여기게 될 수도 있다. "넌 왜 쟤한테는 반갑게 인사하면서, 나한테는 무뚝뚝하게 인사하냐?" 처럼 말이다. 물론 그 태도의 원인은 태도를 행한 사람만이 알 것이다.
이것에 대해 어떤 이는 인사하는 태도 자체를 문제삼아 차별이라고 말할 것이고, 어떤 이는 그 정도 태도는 충분히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없는 사소한 것이라 말할 것이며, 또 어떤 이는 태도보다는 원인에 집중함으로써, 외모를 이유로 인사 태도가 달랐다면 차별이라 말할 지도 모른다. 결국 차별의 문제는 타인이 용인할 수 있는 '정도'의 문제가 되는 셈인데, 당연하게도 이 '정도'의 문제는 사람마가 기준이 달라서 답이 없는 소모적인 논쟁만을 일으킨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저러한 태도는 차별이라 말할 수가 없다.
사실 차별의 문제가 '정도'의 문제가 되는 까닭은 우리 내부 안에서 차별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확하게 되어 있는 상태기 때문에 그렇다. 차별의 정의를 따지자면, '합리적인 이유'없이 나이, 신분, 성별, 종교, 인종, 국적, 출신 지역, 이념 등을 이유로 특정 사람을 우대, 배제, 구별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거나,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평등권을 침해하는 행위'다. 결국 인사하는 태도는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평등권을 침해나는 행위가 아니므로, 차별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심리적인 부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다른 애들에게는 자연스러운데 나에게만 유독 대하는 태도가 다르게 느껴질 때의 그 묘한 불쾌함 말이다. (사실 그것은 무시받는다는, 자존심의 상처받았다고 느끼는 본인의 감정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차별은 합리적인 이유없이 사회,정치, 경제적으로 평등권을 침해당하지만 행위이기 때문에 그 이외의 차별(?)은 다 허용이 되도 되는 것인가 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것은 앞서 말한 것과 똑같은 전철을 밞고 있는 질문이다. 명확하게 침해된다고 보여지는 행위 이외의 것은 모두 주관적인 부분으로서 '정도'의 문제이기에 소모적인 논쟁만 낳을 뿐이다. 이 부분은 그 때 그 때 당사자들간에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사회적으로 논쟁할 거리가 못된다. 만약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차별로서 논쟁을 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모든 행동과 발언이 앞뒤 구분없이 늘 일정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사람의 예외성, 고유성, 다양성을 망가뜨린다는 것과 같다.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고, 그 사회의 발전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서, 왜 차별이 논쟁이 되는가 하면, 앞서 말한대로 정치, 사회, 경제적 평등권을 침해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에 그렇다.
앞선 예시는 사소한 인사 태도를 문제 삼았지만, 이것이 인사 태도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의 삶 전체에, 생계에 영향을 미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주 흔한 예로 외모에 따른 차별이다. 가령 외모가 준수한 사람은 죄를 저질렀어도 상대적으로 낮은 형량을 받는다거나, 실수를 해도 원만하게 넘어간다거나, 서비스직에 상대적으로 고용이 잘 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들은 분명하게도 외모로 인해 외모와 무관한 부분에서 평등권을 침해하는 경우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반박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왜 차별(평등권을 위배하는 행위)을 해선 안되냐는 것이다. 애초에 사람은 구분짓고 살아가고, 그 구분지음으로 태도나 행동이 달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본성이기에, 차별이 자연스레 일어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성대로만 행동하는 동물이 아니다. 또한 어떤 행동이 본성이라는 것이 그 행동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어떤 행동이 자연스레 일어난다는 것과 그 행동을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은 별개다.
차별을 반대해야 하는 이유는 비교적 명확하다.
제도와 법은 사회를 통합하고, 유지하는데 목적이 있으며, 모든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에 어느 정도 사회를 유지하는데 맞춰줄 필요가 있다. 그러한 법과 제도는 기본적으로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기준으로 정하고 있다. 차별은 그러한 평등권을 침해하는 행위로서, 사회가 종속하는 정당성을 무너뜨리는 행위인 셈이다.
어떻게 보면 개인과 사회의 대립일 수도 있다.
차별은 어찌보면, 내 행동을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개인 권리인데, 사회 유지를 명목삼아 권리를 침해할 수 있냐는 것이다. 실제로도 사람을 고용하는데 외모를 보는 것은 회사 마음 아니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서비스직에선 외모도 경쟁력인데 합리적인 이유가 아니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다수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언젠가는 합리적인 이유에 외모가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외모는 차별이 아니게 될 것이지만, 차별 자체는 여전히 문제가 맞고, 반대해야할 것들 중 하나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외모에 대한 차별은 합리적인 이유가 되지 않으며, 사회에 살아가는 한 명의 개인으로서 사회를 무너뜨리는 행위인 차별을 정당화해선 안 된다는 것은 여전하다.
결론적으로 차이가 구별을 만들어내고 이는 다양한 부분에서 차별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차별은 합리적인 이유없이 명백하게 평등권이 침해되는 경우만을 뜻하는 말로서 사회가 종속할 수 있는 근거를 뒤흔드는 행위로서 반대되어야만 하지만, 그 외 사적인 부분은 차별과 구별 그 사이의 모호한 지점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당사자간에 해결할 문제일 뿐이다. 단지 외모 차별이 논란이 되는 까닭은 외모라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이유에 포함될 수 있느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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