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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의한 자유와 국가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현실

어둠속검은고양이 2019. 5. 20. 21:32

오래 전에 쓰려고 했었던 주제 중 하나를 꺼내본다.

바로 '자유'다.
이 단어가 주는 달콤한 울림은 매우 매력적이다.

그래서인지 정치권에서도 많이 쓰이는 단어이며, 흔히들 보수니 진보니 나눌 때도 나오는 단어다.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것은 자유의 유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처구니 없게도 이분법적인 사고로 가장 많이 왜곡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누가 어떤 자유를 원하는가?

기본적으로 자유는 국가에 의한 자유와 국가로부터의 자유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알다시피 국가가 나서서 자유를 보장해줘야 한다는 개념이고, 후자는 국가가 간섭하지 말고, 내버려 둬야 한다는 개념이다. 전자에서 중요한 것은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고, 후자에서 중요한 것은 '내버려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자유의 핵심점을 명확히 알고 구분해서 써야만 한다.

국가에 의한 자유라는 관념 저변에는 무정부상태의 자연은 무질서와 약육강식의 세계라는 성악설이 깔려있다. 이러한 사고는 '국가가 왜 존재해야만 하는가?' 와 같은 정당성을 가져온다. 만약 공권력이 없다면, 우리는 원초적 무력이나 자본에 의해 철저하게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뉘게 될 것이다.

이 때, 지배층은 진정한 '자유'가 실현됐다고 주장할 것이다. 간섭받지 않고, 내가 원하는대로 마음대로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어떤 의미에선 약육강식이라는 것이 자연 생태계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허나, 피지배층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자유가 아니다.' 지배층에 의해 구속하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채, 시키는대로만 해야 하는 삶이면 그것이 진정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는 명백하게 '자유'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했을 때, 자유롭지 못하다는 결론으로 치닿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평등하게',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국가 권력의 개입을 요청하게 되고, 이는 국가에 의한 자유를 실현하게 만든다.

허나, 이러한 '자유를 평등하게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은 수 많은 것을 '통제'하게 만든다.
사소하지만 간단한 예로, '시선을 통한 성희롱'을 들 수 있다. 분명히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어디든지 둘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선은 분명히 상대방을 자극하는 지점이 있을 수 있기에 공권력이 개입할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물론 직접적으로 눈을 감기고 다닐 수는 없으니, 사후 배상을 물어 스스로 통제하게끔 조정하고 있다.

또 다른 예는 '소음공해'가 있다. 누구든지 집에서 닭을 키울 권리가 있지만, 이 닭이 매일 아침마다 울음소리를 내어 내 단잠을 깨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언제든지 내가 원하는 때에 잠을 잘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사실 이 부분은 법령이 딱히 없어서 처벌 못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소음공해로 인해 보복전을 가하고 있다.)

좀 더 직접적으로는 최저임금, 부당해고 구제 등이 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월급으로 일할 권리가 있고, 또 다르게 내가 원하는 금액으로 사람을 고용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에 절대적으로 권력관계가 생기게 된다. '월급'은 현대 사회에서 목숨줄이다. 이 목숨줄을 자를지 말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한쪽에만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정부는 피고용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저임금을 적용하고, 부당해고 구제를 강제한다. 결과적으로 고용자는 자유를 통제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통제들은 군사, 경제, 사회, 문화, 법, 정치 등등 사회 전반적인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수 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규제들은 누군가에게는 자유의 보장이지만, 누군가에겐 자유의 통제이며, 이러한 통제들은 공권력 강화와 함께 이 거대한 공권력이 개인을 말살할지도 모를 가능성을 가져온다.

국가에 의한 자유는 모순적이게도 '통제'라는 수단을 통해서 자유를 보장하려는 양날의 칼인 셈인데, 일반적으로 '진보'라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이들은 이러한 자유를 추구한다.

반면에 국가로부터의 자유는 '자유'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했을 때, 매우 직관적이며, 명확하게 다가온다. 국가의 공권력이 어떤 이유에서건 개인을 억압하는 것이야 말로, 자유에 반하는 것이므로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 저변에 성선설이 깔려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인맥이든, 자본이든, 문화든, 무엇이든 간에)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매우 환영할만한 사고방식이며, 말 그대로 자유를 위해 통제하는 것 역시도 통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는 일반적으로 '보수'라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이들이 추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두 가지의 자유라는 개념을 진보와 보수가 각각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관되지 못하고 분야별로, 상황별로 다르게 적용된다.

대체적인 예로, 보수는 경제부문에 있어서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한다.
경제시장을 내버려두고, 정부가 개입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보수 정치인들은 경제시장의 완전한 독립을 원치 않는다. 경제시장이 정부로부터 완전하게 독립된다는 것은 경제시장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결과적으로 경제인들이 정치인들과 화목하게 지낼(?) 이유가 없어진다. 따라서 보수는 경제의 독립성과 자유를 끊임없이 요구하면서도, 정치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길 바란다. 그리고 경제가 어려울 때는 전과 다르게 정부의 개입을 강조한다. 국가를 강조하고, 경제의 중요성을 설파하여 정부가 지원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보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경제시장의 정부 개입을 강조하면서, 다수의 피지배층을 위해서 소수의 지배층과 싸우는 듯한 '선(善)'이라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경제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을 넓히는데 초점을 둔다. 그들은 피지배층의 자유를 위해 경제를 정부의 강력한 '통제' 아래에 두어야 한다고 설파하며, 경제를 통제하고, 정치인들의 영향력을 강화하는데 몰두한다. 당연히 이들도 경제가 어려울 때는 정부가 개입해야함을 강조하지만, 이들의 통제는 결국 자유를 억압하는 자기모순을 가져온다.

하지만 안보분야는 경제분야와는 또 다르다.

보수는 경제라는 시스템도 안보가 튼튼하게 이루어진 뒤에서야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앞서 말한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한 것과는 다르게, 안보와 국가를 위해 희생하기(국가의 개입)를 강조한다. 반면에 진보는 '국가에 의한' 자유를 강조하면서도, 안보분야에 있어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개인의 희생을 방지하기 위해 공권력 개입을 방지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국가의 존재 자체를 위태롭게 만들 가능성을 가져온다. 이는 안보 분야 뿐만 아니라 공권력(통제)을 통해 자유를 이룩하려는 자기모순이 지니고 있는 특성이다.

결과적으로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이 증대되길 바라기 때문에 '자유'를 강조하지만, 결코 이러한 자유가 정부로부터 완전하게 떠나서 이루어지길 바라지 않는다. 이는 보수와 진보 상관없이 정치인의 속성-권력이 그렇고, 인류가 국가별로 나뉘어 반목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어느 자유를 원하든 간에 사람들은 이러한 자유를 자신의 위치(권력관계)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한다는 것이며, 이는 정치인이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적용된다. 따라서 자유를 나누어 생각하고 이것이 일관적이라는 것은 이론에서나 가능하지, 현실에 맞춰서 그 때 그 때 달라질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저들이 '자유'를 강조하며 사상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소리인지 구분해야 되지는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