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전 심야영화로 악인전을 보고 왔다.
덕분에 오래전에 생각했던 법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들을 써내려간다. 영화 후기는 따로 쓸 예정이다.
이 글은 주제를 4가지나 다루게 될 것이라 두서없을지도 몰라 미리 양해를 구한다.
과거에 필자는 웹툰에 대한 장점으로 실시간 피드백을 꼽은 적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실시간 피드백이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서 독자들의 영향을 받게 되므로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이라 지적한 적이 있다. 그에 대한 일례가, 사이다패스라는 말이 유행하는 것이다.
사이다패스는 사이다와 같은 시원시원한 전개만을 원하는 이들을 카리키는 말이다. 빠른 전개로 갈등이 금방 해결되길 바라고, 그 해결의 주체도 '선'이나, 주인공과 같은, 일방적인 우리편이 이기는 전개만을 원한다. 만일 뜻대로 전개가 되지 않거나, 조금이라도 갈등이 복잡해져서 호흡이 길어진다 싶으면 어김없이 비난의 댓글과 별점테러가 이어진다.
이는 작품의 다양성을 크케 헤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아무리 작품을 독자들이 선택하는 거라지만, 독자들의 이러한 편식적인 선택은 결국 작품 시장 자체를 말아먹을 것이다. 작품은 작가와 독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으로, 독자와 작가는 그 수준에 맞는 작품을 가질 것이다.
이와 같은 사이다패스는 법 감정에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필자는 생각해본다.
답답한 현실이 싫어서 작품으로 시원함을 원하듯이, 법으로 처벌하는 것도 사이다처럼 시원해지길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쉽게 사이다 같은 판결을 내려주지 못한다. 사람마다 원하는 사이다가 다를진대, 어떻게 5천만명의 입맛에 맞는 법의 기준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기준으로 범죄에 대하여 그에 준하는 형벌만을 내릴 수 있다. 만일 피해자가 원하는대로 판결을 내리도록 한다면, 범죄자는 어떤 피해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피해자가 어떤 기분이냐에 따라 판결이 고무줄처럼 달라질 것이다. 이것은 그나마 피해자가 원한다는 명목상 이유라도 있지, 대부분은 아무런 상관없는 제 3자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본인이 '대리 사이다를 느끼고 싶어서', 범죄자라는 낙인을 명분삼아 강력한 철퇴를 내려줄 것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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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잔혹한 범죄에 대하여 '사형'을 요구하며, 사형 폐지국이 된 것을 인권'쟁이'들 탓이라며, 인권'충' 취급을 한다.
물론, 필자도 잔혹한 범죄자를 보면, 딱히 그들을 옹호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들에 대한 판결을 피해자들이 원하는대로 해줘야 한다는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감정적으로만 생각할 때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는데, 대한민국이 사형을 구형해도 집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EU와 맺은 범죄인 인도조약에 의해 사형 집행을 하지 않는다 서명했기 때문이다. 만약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지 않았다면 사형 집행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범죄인들이 EU로 도망가면 어떻게 손쓸 방도가 없게 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사형을 폐지국이 된 것을 '인권충' 탓이라며 몰아세우기 바쁘다.
이들은 사실 피해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누군가 처벌받음으로써, 대리 사이다를 느끼고 싶은 것 뿐이다. 이들의 모순점은 평소 주장에도 드러난다. 현재 경찰과 관련하여 많은 비리, 사건 사고가 터졌다. 이것을 보며 많은 이들이 '경찰에게 수사권이 필요하다고?' 하며 비웃는다. 견찰이라 욕한다. 그렇게 법무부와 경찰에 대해 신뢰도가 바닥이면서, 또 '사형' 집행은 요구한다.
정말 경찰과 법무부를 믿고 사형 집행을 맡길 수 있겠는가?
불과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살인 누명을 씌워서 없는 범인을 만들어내던 대한민국이다. 그 전에도 자신의 정치적 숙적을 제거하기 위해 누명을 씌워서 빠르게 사형을 집행해버렸던 것이 대한민국이다.
우리가 원하는 법 감정들이 단순히 대리 사이다를 위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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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필자도 사람인지라, 잔혹한 범죄자를 볼 때면 '저런 놈을 과연 인간 대우 해줄 필요가 있을까?' 화가 나기도 한다. 필자 역시 강력하게 처벌받는 사이다를 원할 때가 있으며, 이러한 현실이 참으로 답답하다 느낄 때도 있다. 현실이 답답한 것은 사실이니까. 그래서 더욱 사이다를 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는 법이 낡아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과거에야 수명이 50세, 60세라서 형량이 5년만 나와도 굉장히 큰 형벌이었다. 수명이 50세인 사람에게 형량이 5년이면, 인생의 1/10을 감옥에서 보내는 셈이니까. 하지만 수명이 길어진 이 때, 형량은 여전히 그 때와 동일하다.
게다가 현대에 와서 날로 강력해지는 범죄들에 대해 적절한 형량 기준이 세워지지 못했다. 과거야 사기를 크게 쳐도 경제적인 수준 때문에 억단위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수십억단위에서 수백억단위다. 하지만 이에 대한 형량은 아직까지도 낡아빠져서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사기 범죄와는 좀 다른 사례지만, 몇몇 유럽 국가는 경범죄의 벌금에 한하여 재산에 따른 비례 벌금제를 도입했다. 솔직히 100억 자산가에게 10만원 벌금이 과연 구속력으로 작용할까? 형벌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사람들이 강제로 법을 따르게 만들 수 있는 적절한 구속력이 필요하다.
실제로도 '사형'이라는 형벌이 그다지 범죄예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논문도 많다.
사형을 받을 정도의 범죄라면 대표적인 것이 '살인'일 터인데, 살인이라는 것은 우발적인 것도 있고, 실수인 것도 있고,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인즉, 살인자가 형량을 따져가며 살인을 저지를 것인가?
또한 형량이 필요이상으로 과하게 되면 오히려 범죄가 더 강력해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강도의 형량이 20년이라고 한다면, 강도를 안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강도를 저지르고 목격자를 죽이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20년이라는 형량이 부담스러워 완전범죄를 위해 살인을 행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범죄자가 없는 세상이겠지만, 어쩌겠나.
짐승들은 넘치고, 짐승으로 만드는 상황도 비일비재 하니 말이다.
어찌됐든 범죄에 따른 적절한 하나의 형벌 기준을 세워야 할 것인데, 과연 누가 '적절하게' 세울 수 있는가. 그것을 누가 적절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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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에 끔찍한 범죄가 발생했었다.
그 때의 그 범죄의 잔혹함 때문에 많은 이들이 분노했고, 사형을 요구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나마나 한 판결을 때릴 것이라며 한 마디씩 했고, '인권충' 때문에 사형폐지 됐다는 둥, 범죄자 인권을 감쌀 것이라는 둥 쉐도우 복싱을 해댔다. 그들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그 화살을 특정 단체들에게 쏟아냈다. 그들은 단지 분노를 즐겼을 뿐이다.
확실히 '눈에 보이는 것'은 자극적이다.
하지만 사기 범죄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분노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기 범죄야 말로 더 끔찍한 것인데 말이다. 경제적 사기 범죄는 직접적으로 죽이진 않지만, 간접적으로 많은 이들을 자살로 몰고 간다. 이는 분명한 경제적 타살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고, 수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이 사기범죄인데도 불구하고, '직접적으로 잔인한' 범죄에 대해서만 우리들은 형량을 따지고, 법원 역시 직접적인 살인에 대해서 엄중히 판결을 때릴 뿐, 수 많은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타살시킨 사기범죄에 대해서는 엄중하지 못하다. 결과적으로 사기 당해 자살한 사람만 자신의 죽음을 책임지는 꼴이다.
필자는 사기 범죄야 말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엄히 다뤄야 할 범죄라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인 자산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죽음과도 같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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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많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 했으나, 하나의 글에 담으려 하니 두서가 없다.
생각은 많고, 세상은 그만큼이나 복잡하다.
이만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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