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생명을 키운다는 것은 무거운 책임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그 무거움을 먼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인스턴트식 시대에 살아가면서도, 이 시대를 비판하는 까닭은 한없이 가볍다는 것에 있다. 우리는 삶에 연관된 많은 부분을 간편하고, 빠르게 얻는다. 그것은 반려동물에도 해당된다. 우리는 문득 기분이 내키는대로, 어느 동물병원 가서 한 동물을 손으로 지목한 뒤에 돈만 지불하면 '상품'을 넘겨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상품'을 질렸다는 이유로 혹은 필요이상의 비용이라는 가성비를 이유로 상품을 버리듯 유기해버린다. 사람이 쌔고 쌔서, 사람마저도 가벼워진 세상일진대, 동물이라고 가벼워지지 않을까. 돈만 지불하면 무엇이든 빠르고 쉽게 얻을 수 있는 세상에서 생명 역시도 하나의 상품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생명의 무거움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반려'라는 단어의 무게감을, 생명이 지니는 무게감을 알아야 한다. 반려동물은 내 남은 평생을 함께 가는 동반자라는 의미를 지닌다. 돈이 없다고, 병들었다고, 흥미가 떨어졌다고 반려자를 버리겠는가. 이혼이 흔해진 이 세상에서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반려'라는 단어가 갖는 깊이와 신뢰감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배신이며, 기만이다. 그것은 반대로 내가 버림을 받아도 마땅히 이해하고, 견디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허나, 반려동물에게서 주인이 '버림을 받을 수 있는' 선택지가 있을 수 있는가.
동물을 키운다는 것은 가족을 맞겠다는 것을 넘어서, '아이'를 하나 영원히 키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도 못하고, 혼자서 행동을 제어할 수 없는 한 생명체를 위해 늘 청소해주고, 밥을 챙겨주고,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고, 일정한 간격때마다 목욕도 시켜주고, 산책 및 놀이를 해줘야 한다. 이러한 활동은 내가 피곤하거나, 귀찮다는 이유로 생략할 수 없다. 우리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아기를 굶기거나, 방치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는 늘 아기 입장에서 필요한 욕구를 우선적으로 챙긴다. 마찬가지로 아기처럼 우리의 상황이나 욕구보다 우선시해야 하는 것이 반려동물인 것이다.
생명체를 하나 맡는다는 것에 얼마나 많은 귀찮음과 피곤함과 책임감이 부여되는지를 먼저 깨닫는다면, 우리는 반려동물을 키울 생각을 결코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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