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편지

어둠속검은고양이 2022. 12. 25. 14:00

배가 항해를 하다 목표했던 포인트에 닿으면 닻을 내린다고 한다. 닻이 내려져 흙바닥에 박히고 나면 배가 더 이상 항해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기 때문이다. 닻이 박혀 있는 동안 배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반대로 물에 휩쓸리지도 않고 계속 그 자리를 맴돌게 된다.

일생에 있어서 강렬했던 기억들은 사람의 뇌에 각인되어 치매가 와도 일부가 그대로 남아있어 행동으로 드러난다고 한다. 혹은 누군가에겐 평생의 이야기 소재로 남아 그 사람의 작품에, 글에 묻어나게 된다. 아니면 평생 술안주가 되어 '왕년에 내가 말이야~'처럼 술 취한 아저씨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어 버리거나.

나도 어떤 빌미가 있을 때면 그런 이야기를 꺼내어 글로 쓰곤 한다.
눈이 내린 날은, 겨울은 그녀와의 추억이 나타나는 계절이다. 그 때의 감정들은 이미 희미해졌고, 이젠 뒤돌아보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진 않지만, 그래도 그 때의 기억들을 다시금 되짚어보곤 한다. 심야 영화를 보고 난 뒤 집까지 밤새 눈 내리던 거릴 걸었던 날. 추운 겨울날 옥탑방에서 이불 뒤짚어쓰고 피자먹으며 영화를 본 날. 시험 공부 한다고 같이 밤을 지새운 날. 이상하리만치 그녀와의 추억은 상당 부분 추운 날씨와 내 옥탑방이 연관되어 있다. ........나는 그 사람을 사랑했다. 그 사람은 나에게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알 수 없지만, 내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사람은 어쩌면 내가 변할 수 있는 마지막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뭐 그녀와의 헤어짐 때문에, 슬픔 때문에 새로운 연인을 못 만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녀 이후로 시간 때문이든, 환경 때문이든, 그 무엇 때문이든 간에 여러 이유로 연인을 못 만나고 있을 뿐이다. 앞으로 나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우리가 첫사랑을 쉬이 잊지 못하는 것은 먹어가는 나이만큼이나 사랑에 대해 무뎌져가는 감정들과는 달리, 그 때 그 시절 감정을 최우선시 했던 순간들의 그 생생함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자신에게 제일 솔직했던 시기이기도 하고. 나이를 먹어갈수록 감정들은 무뎌지고, 머리가 먼저 돌아가게 된다. 흔히 말해, '각을 잰다'고 하는 그런 것이다. 도전, 성공, 실패, 용기와 같은 말들은 이제 사라져 버렸고, 실패하지 않기 위해 항상 각을 잰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라는 것은 이젠 수중에 있는 패와 상대방이 가진 패를 고려한 게임이 되어 버렸다. 이젠 이 지긋지긋한 게임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오랜만이네요. 일주일만의 편지인가요.
저번 주 일요일에 편지를 써볼까 했는데, 눈이 많이 와서 쓰질 못했어요. 눈이 내리면 할 일이 많아지지요. 단순하게 집 앞 눈을 치우는 것에서부터 해서 새로이 작업해야 하는 경우도 생기지요. 그러다 보니 미뤄지고, 이번 주 내내 눈이 내리다보니 또 미뤄졌네요. 추우면 활동하기 싫어지는 것도 한 몫했지요. 밖에서 일하고 들어오면 따뜻한 이불 속에서 나오기 싫더라구요. 피곤하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어느 새 크리스마스네요. 크리스마스 이브는 잘 보내셨나요? 저는 평소처럼 지냈어요. 추운 계절엔 휴일엔 좀 쉬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요. 세상엔 365일 내내 신경써야 하는 일도 있거든요. 오히려 춥기 때문에 일손이 더 필요하지요. 제가 있는 이 곳은 특별한 공휴일이나 주말도 변함없어요. 그냥 평소처럼 흘러갈 뿐이지요. 주말이니, 휴일이니 즐거운 성탄절을 보내는 것도 어떻게 보면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죠.

그거 아시나요? 사실,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탄생일과 상관이 없다고 해요. 3월 25일이라고 해서 카톨릭에서 굉장히 중요시 하는 축일이 있는데, 그 날은 대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거라는 계시를 내렸다고 해요. 그리고 1월 6일은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가 메시아임을 드러냈다고 하는 말이지요. 그러다 보니, 1월과 3월 사이에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 같고, 대강적으로 12월 25일 쯤 태어났겠다고 예측해서 그 날을 예수의 탄생일로 지정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도 뭐 어때요. 우린 연말의 즐거운 분위기를 즐기기만 하면 됐죠. 다음엔 주말에 겹치면 대체 공휴일로도 지정될 수 있도록 한다는데 좋은 현상이죠. 

오늘은 눈이 그쳤네요. 확실히 나이를 먹어 가나봐요. 점점 눈이 싫어지는 것 같아요. 일거리가 늘어나고, 신발이 젖고, 땅이 지저분해져서요. 예전엔 그런 것을 전부 차치하고서라도 눈이 좋았는데. 이젠 좋음과 싫음이 반반은 되는 듯해요. 다행히도 눈이 어느 정도 녹았고, 앞으로 당분간은 눈이 안 내릴 듯 해요.이번 주 내내 서울이나 수도권도 한파에 눈도 많이 내렸던 것 같은데, 당신이 계신 곳은 괜찮은가요. 연말은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올 겨울은 따뜻하게 잘 지내고 계신가요.

남은 크리스마스도 잘 보내시길 바랄게요.
다음엔 새해 인사를 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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