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영화

터널

어둠속검은고양이 2016. 8. 30. 14:49



2016. 8. 29(월) 충장로 메가박스


할 말이 많은 영화다.

그만큼 현실을 잘 반영했다는 뜻인지, 아니면 현실이 영화같이 기가 막힌 건지.....

사회풍자적인 영화로서 나름 쏠쏠한 재미는 있다.

하지만 치고 부수고 때리는 액션과 같은 재미, 스토리에서 오는 재미는 없었다.

외국의 재난영화를 보면 역동적인 재미가 있었는데, 이건 재난을 극복하는데서 오는 재미보단 사회 풍자를 위해 만들어진듯 하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연인과 같이 볼만한 영화는 아니다. 영화관에 볼 만한 영화는 아니다. 집에서 볼만한 영화지만, 결코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다. 부산행처럼 역동성, 스토리, 연출에서 오는 재미라기 보단 풍자에서 오는 재미가 강한 영화기 때문이다.

취향에따라 호불호가 조금 갈릴 듯 하다.



더 테러 라이브 그리고 터널.

배우 하정우의 단독에 가까운 영화.

하정우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 둘 다 사회풍자적인 영화였다. 여기서 어느 정도 점수를 먹고 들어가리라 본다.


스포 조금 있음


이 영화를 보면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 혹은 국가의 의무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도착하게 된다. 개개인이 공동체를 이루고, 그 공동체를 위해 각자 분업을 하고, 분업에 대해 지시할 명령체계가 필요하다. 그것이 국가다. 필자는 국가 이전에 개인이 우선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국가가 개인 하나하나를 다 살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지만, 현실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다. 현실적 제약이 너무 크다. 그렇기에 시민의 안전을 얼마나 잘 보장할 수 있느냐가 국가의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독재국가는 그 자체로 개인을 억압하기에 국가로서 문제가 분명히 있지만서도, 합법적인 한에서 국민의 안전을 확실하게 지켰다면 국가로서의 최소한의 책무는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결국 '현실적 제약(경제적 비용도 포함)' vs 단 한 명의 생명에 대한 갈등이야기다. 한 사람을 살리는데 1천억원이 들어간다고 할 때, 이 사람을 살려야 하나? 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의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당연히 살려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 1천억원이 개인의 재산이 아니라, '구체적인 세금'이라면? 이 세금이 지금 당장 굶주리고 헐벗은 아이들, 노인들에게 지원해줄 수 있는 돈이라면? 당신이라면? 사실 생명을 두고서 저울질할 수는 없다. 해서도 안 된다. 허나, 그놈의 '현실'을 생각하자는 말에 우리는 고민하게 된다. '모두'를 다 구할 것이라는 건 '이상'일 뿐이다. 마치 어머니와 아버지가 물에 빠졌을 때, 딱 한 명만 구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말과 같다. 개인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다. 하지만 그 사고의 개인과 동등하게 다른 개인을 지원하고 보살피는 것도 국가의 의무다. 어떤 것에 '자원'을 '우선적'으로 배분해야 하는가. 어떻게 '효율적'으로 배분해서,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내는가가 핵심이다.


씁쓸한 현실이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서 끝내 답변을 내릴 수가 없다. 그래, 마음만은 포기하지 말라고, 끝까지 가봐야하지 않겠냐고 응원하고, 소리칠 것이다. 이 빌어먹을 현실 상황에서 가장 이상적인 답변을 내릴 수 있으면, 국가 수장이 될 재목이다. 


이 영화에서는 풀 수 없는 그 답변, 그 질문보다도 '과정'에 답변을 이끌어내는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먼저 방송국 입장에서 터널 붕괴에 의한 한 사람의 고립은 가장 큰 이슈다. 하나의 거대한 이벤트인 것이다. 국민의 알 권리도 중요하고, 사건에 대해 계속 되짚어보면서 관심을 환기시키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 영화에서만큼은 그런 의도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박 특종'이 하나 발생했을 뿐이고, 그 뉴스를 보는 사람들도 오랜만에 국가적인 이벤트가 하나 발생했을 뿐이다. 


정부 입장에서는 예상치 못한 난항이다. 신도시 입주 계획이 예정되어 있고, 공사가 마무리 되어가는 시점에서 큰 사건이 하나 터졌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국민들에게 크게 어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서둘러서 사고 현장을 찾아가서 위로를 건넨다. 허나 영화를 보는 이들은 그것이 전혀 위로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설정샷을 위한 패션쇼일 뿐이다. 그러다 사고가 또 터진다. 구조하던 인부 중에서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다. 재빠르게 손익 주판을 튕긴다. 여론이 악화되고, 공사지체로 인한 경제적 손해가 커지기 시작하자, 빠르게 태세 전환을 한다. 


그런데, 이 영화 속 정부를 보다보면, 결국 그 정부를 만든 것은 국민이다. 터널붕괴는 먼 나라의 하나의 유흥에 불과할 뿐이고, 결국 잊혀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볼멘소리를 시작한다. 통상적으로 죽었을거란 판단하에 경제적 손실이 얼마냐고 따지기 시작한다. 여론이 부정적으로 돌아서니, 정치인 입장에서는 당연히 손익계산을 두드려 보는 것 아닌가. 국민 모두가 끝까지 구하라고 했다면 터널의 진행은 좀 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그리고 부실시공업체, 근본적 원인들.

건설현장에 있어보신 분들은 알 것이다. 어떻게 부정한 건설업체가 돈을 버는지를. 대략적인 공사현장에 들어가는 재료, 인건비에서 조금씩 뺀다. 10사람이 할 몫을 9사람, 8사람으로, 공법에 들어갈 재료를 조금씩 적게 넣는 수법으로......허나 이 영화에서는 그 업체에 대한 처벌이 드러나지 않는다. 짤막하게 뉴스로 기사화된 것을 보여줄 뿐이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처리했는지는 몰라도, 그 찝찝함은 그대로 현실로 옮겨온다.


공사장 인부가 죽은 후, 그 인부의 어머니가 아내 세현(배두나)을 찾아와 계란을 던지면서 욕한다. 어느 가족인들 속상하지 않으랴 싶다만, 대상을 잘못 짚으셨다. 그 사고의 최초 제공자는 부실시공업체다. 그깟 시체 때문에 내 아들이 죽었다고 당장 생각이 드실 것이다. 그깟 시체를 파내자고 하는 가족들이 원망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 근본에는 애초에 사고를 일으킨 주범들이 있었다. 상부로 향하는 것이 아닌 수평을 향한 폭력이다. 국민들도 마찬가지다. 피해자들에게 손가락질하고 욕한다. 우리는 항상 주장한다. 왜 피해자가 욕먹어야 합니까? 하고....허나, 저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제일 만만한 피해자부터 까고 본다. 그리고 터널은 영화지만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 '여러번' 있다. 그럼 법이나 제도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이 영화에 담겨 있다. 정부와 현실을 비판하고 풍자한 끝에 정부란 무엇인가? 의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와 같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거리를 안겨준다.



(스포있음)


첨언.

영화 리뷰를 쓴 후, 필자는 '왜'라는 생각으로 다시 되짚어 보았다. 첨언해본다.


왜 하필 '터널' 사고 였을까?

인물의 성격에서 드러내는, 재난상황에서의 인간미?


영화 초반부에 이정수(하정우)가 주유소에서 친철하게 대하면서 물 2병을 받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재난 영화라는 사실을 알고 보았던 필자는 '아, 저것이 터널에서 목숨줄이 되겠구나.'라고 능히 짐작이 갔다. 이러한 뻔한 복선보다도 우리는 이정수의 태도를 좀 더 볼 필요가 있겠다. 귀도 어둡고 행동도 매우 굼뜨신 할아버지가 주유소에서 일을 하고 있다. 아무리 연장자라지만, 화가 날 법도 한데, 이정수는 화를 애써 참는다. 주유를 잘못하여 9만원어치나 넣어버린 상황에서도 어차피 쓸 거니까 괜찮다고 부드럽게 넘어간다. 할아버지가 주는 물병 2개도 손사래칠만 한데도 기어코 좋게 받는다. 하정우의 이러한 성격은 터널에서도 계속 된다. 우연히 알게 된 또 다른 생존자에게 기꺼이 물을 나눠주고, 생존자의 강아지에게도 조금씩이지만 투털대면서도 물을 준다. 언제 구조대가 올 지 모르는 상황에서 물을 나눠주는 것은 엄청나게 큰 의미가 있다. 그 의미는 뉴스를 통해 단 한마디로 일축되어 버린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이정수씨' 라고. 사실 저 행위가 인간미, 존엄성 그 한 단어로 표현될 지 의문이긴 하나, 어쩌겠나. 여튼, 이정수의 '함께' 살아나가려는 태도는 세상이 이 사고를 바로보는 시선과 완전한 대립을 만들어 낸다.


세상은 포기를 강요한다. 경제적 이익도 없고, 정치적 단물도 다 뽑은 상황이다.

이정수는 포기하지 않는다. 함께 살아나가려고 했고, 구조대의 포기소식에도 혼자서 굴을 파기 시작한다. 단절된 터널에서는 희망을 갖고, 열려있는 바깥에서는 포기를 갖는다.

이러한 대립상황에서, 이정수가 보여주는 태도는 우리를 고뇌에 빠지게 한다.



세상과 터널을 잇는 유일한 인물, 그리고 주된 목소리가 아닌 쪽을 상징하는 김대경(오달수)구급 반장 - 민주주의의 함정


이 인물 역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유일하게 세상과 터널을 잇는 인물이자, 피해자와 이해관계가 얽혀 있지 않는 인물로서, 이정수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다가가려는 인물이다. 이러하 인물이 세상에 있을까? 마치 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인물이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 인물을 통해 희망을 갖는다. 정부의 뜻대로, 시키는대로 하지 않고, 윽박지르고, 기자에게 큰 소리로 비판하는 김대경은 이정수와 같이 희망을 놓치 않는 인물이다. 끝장 보는 성격의 인물이다. 비록 단 한 사람으로 나왔지만, 김대경은 주요 목소리에 묻힌, 국민들의 또 다른 목소리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허나, 힘이 없다. 주요 목소리가 아닌, 터널 공자 재개 반대쪽 40%쯤?의 목소리는 '민주주의'의 결과에 의해 무시된다. '민주주의'사회에서 '공동을 위한' 비용은 40%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40%조차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인데 말이다. 40%를 향해 '그럼 지원해줄테니까. 니들끼리 알아서 해.'라고 말하지 않는다. 포기를 강요하면서 지원과 권한 모든 것을 빼앗는다. '공동'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에서 말이다. 51%와 49%가 있다면, 49%는 민주주의의 결과에 의해 주류가 아니다. 비주류다. 그리고 51%에게만 온전히 사회 공동을 위한 재산과 권한을 가진 정부가 함께하게 된다. 영화 속 문제 대처 과정을 통해 김대경이라는 인물로 이 영화는 그 문제점까지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아니라, '소수에 대한 무시'로 이루어진 폭력적인 사회임은 자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가 일어났을 때, 과연 '국민투표'의 결과가 '올바른가'는 또 달리 생각해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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