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존실/잡념들-생각정리

탈코르셋 운동의 한계와 문제점, 그리고 혼전이 계속 되는 이유.

어둠속검은고양이 2018. 11. 26. 22:42

얼마전에 필자가 꺼내들었던 '탈코르셋'이라는 말에 대해서 다시 이야해보고자 한다.

며칠 전에 어떤 대자보를 하나 게시물로 본 적이 있다.


그 대자보는 일종의 선언이었는데, 필자가 생각하기엔 꽤나 잘 쓴 대자보였다.

일단적으로 '주체적 선택'이라는 단어에 대해 다시 재정의함으로써, 자신의 논지를 탄탄하게 뒷받침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옳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이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점이 너무도 멋져보였다. 필자가 생각하는 '내 목소리를 들어주세요. 난 이렇게 생각합니다.'는 표현의 자유를 제대로 보여주신 멋진 대자보였다.


이정도 대자보정도라면, 독자가 최소한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다 하더라도, 이 대자보를 쓴 사람의 생각을 한번쯤 생각해보고 기꺼이 존중할 마음이 가질 것이라 생각했다. 당신의 생각이 그렇다면야.


물론 이 대자보에 대해 필자의 한 의견으로서 할말은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려고 한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탈코르셋'이라는 운동의 한계라고 할까, 현실에서의 문제점이라고 할까. 이 부분에 대해 지적하기 위함이다.


--


과거에 필자는 탈코르셋 운동의 본질을 '타인의 평가에 대한 거부운동'이라 밝힌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심각한 문제점은 '탈코르셋'이라는 것이 타인에 대한 또 다른 평가의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탈코르셋을 지지하시는 분들 중에는 '머리가 긴 여성이나, 화장을 하고 다시니는 여성들'에게 돌을 던지신다. 온갖 모욕적인 말과 잣대, 폭력적인 규정지음으로 다가간다. '왜 머리를 짧게 안 짜르니?', '왜 화장을 안 그만두니?' 그들의 잣대로 해당 운동에 어긋나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평가한다.


진정한 '타인의 평가 거부'는, 평가하는 것을 그만둠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여성분이 머리를 싹 밀든, 가발을 쓰든, 머리를 흰색으로 탈색을 하든, 눈썹을 그리든, 위장크림을 바르고 다니든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완전한 자유로움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해 신경쓰지 않고, 나 역시도 내가 내 외모에 무슨 짓을 하든 타인이 개의치 않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 운동은 또 다른 줄세우기가 되어 가고 있다. 아쉽게도 말이다.


--


조금만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다.

과연 우리가 살아가면서 '외모'를 전혀 안 볼 수가 있는가? 만약 내가 화장품으로 눈을 2개를 더 그려서 4개를 달고(?) 다닌다면, 과연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다른 이의 생각'에 대해 필자가 고려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상호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의 행동이 순전히 나의 의지로, 나만의 행동이지만, 그 행동은 결코 나에게만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타인에게도 영향을 가져온다. 그런 사회 속에서 과연?


일종의 '타인에 대한 눈치'를 안 볼 수 있을까. 내가 식당에서 일을 한다고 했을 때, 눈을 4개를 그려서 다녔더니, 고객들이 음식을 먹다가 웃겨서 내뱉었다고 해보자. 어떨까. '눈을 4개를 그려서 다니는 것은 내 자유고, 내 외모에 대해 평가하지 마세요!' 라고 말한 순 있지만, 웃겨서 내뱉게 된 고객들은 뭐라 항변할 것인가.


물론 이 이야기는 극단적인 예를 든 셈이고,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탈코르셋'이라는 것이 '나의 주체적인 선택'으로서 '타인의 평가를 거부'하겠다는 지점이 과연 상호작용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사회에서 가능할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이론적 이상은 현실에 내려오는 순간, 무너질 수 밖에 없는 법이다.


탈코르셋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경쟁 사회'에서 '미모도 하나의 경쟁이 아니냐?'는 것이다. 남여를 떠나서 현재 사회에서 잘생기고, 예쁜 사람은 확실히 더 대접을 받는다. 그 대접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얼굴 수저'도 있지만, 나름대로 사회적 미에 적합하게 만드는 '노력'을 한 것도 있다. 아마도 대표적인 것이 화장일 것인데, 실제로 꾸미는 것은 굉장한 노력을 요한다.


--


탈코르셋 운동이 현실에서 '또 다른 평가 기준'으로 작용한다거나, 혼전에 혼전을 거듭하는 것은, 이 운동 하나에 담겨져 있는 출발선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에서는 '꾸밈'이라는 것 자체가 주체적이지 못했던 여성들이 '간택'받기 위해서 꾸며야 했던 것에서 출발한다고 본다. 하지만 이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방금 전에 필자가 썼듯이 '타인의 평가거부'운동으로 생각하고 접근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페미니즘의 주장은 일견 자신들의 생각과 궤를 같이 한다고 여겨질 수 있으나, 실상은 지향점이 전혀 다르다.


탈코르셋 운동에 대한 페미니즘의 지향점은 '꾸미지 않을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목적이다. 타인의 평가를 어떻게 보면 긍정하는 입장이다. '꾸미지 않을 수 있을 정도의 권력'을 쟁취함으로써 마치 '왕의 얼굴을 함부로 평해서는 안되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서 평가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평가 자체에 대한 거부가 아니다. 평가를 못하게 만드는 권력이 핵심이다. 그러니 탈코르셋처럼(?)하지 않는 이들에게 공격적인 이들이 나타난다. '내 편 아니면 적'


그러나 '타인의 평가거부'는 권력 쟁취가 주된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목을 조르는 그 가십들, 평가들, 경쟁들을 타파하겠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평가하는 사회 자체를 깨부수고, 힘 좀 빼고 살자는 것이다. 이는 권력쟁취와는 분명하게도 상반되는 지점이다. 즉, 중간지점까지의 '평가 거부'는 같은 노선이라고 볼 수 있으나, 결과론적으로는 전혀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탈코르셋 운동을 지지하는 또 다른 이유는 도덕적인(?)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

애초에 우리 사회는 어릴 때부터 열심히 노력하면 보답받는다는 믿음을 세뇌(?)시켜 왔다.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가고, 좋은 직장 얻어서 궁극적으로 '행복'해질 거야. 라고 주장해왔다. 그래서 능력에 따른 '(차이가 아닌)차별'은 정당한 것처럼 포장되어 왔고, 외모는 도덕적으로 놀려선 안된다는 것이 기존의 가치관이었는데, 이 '외모'라는 부분이 <뷰티산업 발달로> 기준이 애매해져 버린 것이다. 화장이라는 노력과 돈으로 up시킬 수 있게 됐으니까. 결국 '못 생긴 사람'은 노력하지 않는 사람으로 둔갑되어 버리는 것이다.


'뷰티 산업'에서는 끊임없이 하나의 아름다움 강조하고, 그 아름다운으로 줄을 세워 경쟁시킨다.

그게 돈줄이니까. 그러나 그 경쟁에서는 대부분의 이들이 탈락하게 되고, 정말 소수만이 '기준'이 되어서 승리자가 된다. 그리고 그 승리자들에게는 기본적으로 '타고난' 외모가 있다. 어릴 때부터 배워온 '노력하면 될거야'라는 가치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그와중에 경쟁이 심화되면서 '외모도 경쟁'이라는 사고방식과 '외모는 선천적인 것'이므로 왈가왈부 해서는 안된다는 사고방식끼리 싸움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탈코르셋 운동'은 뷰티산업 - 획일적인 미의 기준에 대한 항거다.


이렇듯이 '탈코르셋 운동'에 대한 지지는 다양한 이유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유가 다양한만큼 당연히 지향하는 바도 다르다. 


좀 전에 필자가 예를 들었던 것들은, 결국 '사회적 운동' 그 자체에서 일어나는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함이었다.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타인의 평가거부 운동으로서의 문제점이다. 애초에 탈코르셋 운동의 본질을 평가거부로 규정지음으로써 출발했으니까.


하나의 운동 속에 담겨진 여러 생각들은 문제의식의 출발점이 다르나 그 생각들의 인식은 공통적으로 탈코르셋을 향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분명히 이 운동은 '타인의 억압'으로 작용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우려스럽다.


p.s.

탈코르셋 운동을 지지않는 이들과 지지하는 이들의 차이는 주체적인 선택에 시각차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어볼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