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의 글도 우울하게 끝났는데.
새해를 시작하는 2021년의 첫 글도 우울한 글로 시작하네요.
착잡한 심정입니다.
작년에 사이다 패스니, 살인죄, 사형이니, 어쩔 수 없는 조약이 뭐니 조금은 이성적인 척, 또는 냉소적으로 이런저런 글을 써왔지만 이런 크나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속이 착잡해지곤 합니다.
범죄인 인도 조약 및 교역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사형을 폐지했다지만, 사실상 사형을 유지하고 있는 미국은 EU와 잘만 교역하고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EU니까요. 중국 역시도 EU와 교류를 잘하고 있는 걸 보면 EU는 점잖은 척 시늉만 할 뿐입니다. 뭐, 나라 대 나라와의 교역에서 선이니 악이니 따질 것 있나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법이지요. 꼬장 부릴 수 있는 국가에는 자신들의 신념을 강요하고, 아쉬운 국가에는 눈 감고 넘어가는거지요.
그와는 별개로 대한민국의 지난 역사를 바라보면 사형제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해보면 참 그래요.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 얼마 안됐어요. 불과 부모님 세대에요. 없는 죄 만들어서 누명 씌우고, 정적 제거용으로 쓰이던 그 사형집행 말이에요. 사법부와 경찰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인 나라에서 사형제를 실시한다는 것은 또 다른 걸 의미하지요. 경찰의 자치권만 해도 벌써 난리인 걸요.
인간이 가장 크게 내릴 수 있는 엄벌이 바로 생명을 박탈하는 사형이긴 한데요.
사형에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들을 죽여봐야 얻는 것은 일순간의 사이다 뿐이죠. 피해자는 돌아오지 않아요. 저는 인간 같지도 않은 짐승들을 볼 때마다 '저런 인간 같지도 않은 사람을 인간으로 존중해줘야 하나?'라는 회의감과 함께 속 시원한 사이다를 강렬하게 원하게 돼요. 그렇지만 그들을 사형시키는 걸로 끝내버리면 약간의 사이다를 얻는 대신에 제도나 시스템은 유야무야 넘어갈 테지요. 제도나 시스템의 문제가 아닌, 그 짐승들만의 일탈이라는 핑계삼아서요.
전 차라리 노예제는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해요.
21세기에 그 무슨 소리냐고 할 테지요. 사형을 시키면요, 그들은 금방 잊혀져요. 사람들도 답답함이 해소되고 나서는 잊어버리겠죠. 곁에 두고서 두고두고 조져야, 사람들은 잊지 않을 거에요. 각인은 예방효과를 만들어내요. 그리고 이것은 집행하면 되돌릴 수 없다는 사형의 가장 큰 문제점을 해소시켜 줄 테지요. 그래서 일부 국가들이 행하는 '태형'이 그렇게 재범율을 낮추는데 크게 기여 하나 봐요. 채찍으로 때리고, 치유하고, 상처가 나으면 다시 집행을 하지요. 태형을 당한 사람은 평생 그 트라우마에 범죄를 다시 저지를 생각을 못한다고 하지요. 물론 이 '비인간적'이라는 제도를 허용한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녀요. 이렇듯 감정적 해소를 위해 비인간적인 제도들을 하나씩 하나씩 도입하다보면 우리 역시 짐승이 되고 말테지요. EU가, 인류가 '비인간적'이라는 말에 과잉반응을 보이는 것은 지난 역사에서 다 드러났잖아요?
참 어려워요.
사람 같지도 않은 짐승들을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 같아서는 이미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찢어 죽였을텐데 말이죠. 뭔가 일방적인 관계죠. 짐슬들은 마음대로 짐승같은 짓을 하는데, 우린 사람이라는 이유로, 저들과 같아지면 안된다는 이유로 행동에 제약을 당한 채, 참을 인을 수백번 쓰면서 저들을 대해야 하니까요. 이러니 저러니 생각하다가도 이런 사건들이 하나씩 하나씩 터질 때마다 회의감이 들게 되죠. 아직도 터지지 않은 큰 사건들이 있을테지요.
.......전 사형제를 반대해요. 대신 노예제를 찬성해요. 그리고 우린 그 노예들이 살아있는 동안 보면서 기억해야 해요. 저들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그리고 그들은 평생을 노예로 살면서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야만 해요. 그래야만 해요. 유명무실해져가는 규제와 도덕성이 무너져 가는 현실 앞에서 처벌에 대한 망각들은 결국 끔찍한 짐승들을 만들어내고 말거에요. 우린 인권이라는 핑계로, 짐승과 인간은 달라야 한다는 핑계로, 치안과 엄벌에 대한 의무를 등한시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