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대학생들에 다들 꼭 한 번씩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공감가는 부분이 많기도 하고, 현재 대한민국의 20대들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어떻게 됐는지, 그리고 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렴풋이 나 자신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가 냉철하게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줄 것이다. 이 책에 다룬 사례의 여러 부분들이 어렴풋하게나마 기존에 들던 생각들을 되짚어 주었다.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한 학기동안 대학생을 대상으로 레포트를 받고, 심층분석을 하고, 따로 인터뷰도 하였다고 하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 일반화시키는 거 아닌가? 하고 비판할 지도 모르겠다. 충격적인 내용에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하기에...나 같은 경우는 이 책을 읽으면서 충격을 받은 부분도 꽤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대학생들이 실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화 자체를 떠나서, 어떤 경우든 무의식 중에 '차별'이 체득되어 말과 행동에 드러나 있는 대학생이 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충격적이고, 그 대학생들의 행동과 말에 모순을 느끼지 못하고 암묵적 동의를 하고 있는 학생들이 뒤에 있다는 것 또한 충격이었다. 정녕 그들은 그들 자신의 모순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일까?.....아니면, 믿고자 하는, 보고자 하는 것만은 바라보는, 그런 '신념'에 가까운 현실왜곡과 그것을 당연히 체득화하고 있는 20대들. (아, 나도 20대 대학생 중 한명이다.)
대학생들에게 한번씩이라도 읽어보라고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나는 종종 이 티스토리 블로그에 내 생각을 정리할겸 해서 글을 올린다. 대부분은 '보호'로 설정해서 올리는데.....
과거에 썼던 글 중 하나가 바로 '소시오패스를 만드는 사회'였다.
공감이라는 능력이 점차 희박해지고,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니 죽든 말든. 단지, 인터넷 세상이나 영화 속 이야기에서 눈물을 흘리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매서운 눈으로 상대를 바라본다. 니 능력부족, 니 노력부족인 것은 내 알 바 아니지. 나도 힘들어 숨이 턱턱 막히는 현실과 경제학적 사고의 경영가적 마인드 열풍이 소시오패스를 양산하고 있다고 글을 쓴 적이 있다.
....나는 경제라는 과목을 좋아한다. 전체적으로 분석하고, 흐름을 파악하는, 그런 거시경제를 좋아한다. 여지껏 경제관련 과목을 들으면서 느낀 것은 경제학적인 사고방식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경제학적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한 경영가적 마인드지만....한 가지 예로 들자면, 그 경제학적 사고방식에 매몰되어 버린 사람들은 '객관적이고 수치'적인 면만을 바탕으로 어떠한 현실도 바라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은 해야만 한다. 왜? 회사가 살아야 하니까. 회사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것이기에. 그러나 구조조정한다는 미명 아래에 서류에 적힌 싸인 하나에는 수 백명의 노동자들의 삶과 가족들이 달려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다른 방법은 없을까, 너도 나도 살 수 있는 비용 축소 방안은 없을까 하는 그런 방안은 고려되지 않는다. 인건비를 줄이는 것이야말로 최대 효율을 낼 수 있는 방안이기에....그리고 놀랍게도 사람들은 수긍한다. 회사가 어렵다는데, 능력이 부족해서 짤리는 건데, 그거야 짤리는 니사정이고, 회사도 살아야지. 등등...그런데 솔직히 자신들을 보라. 당신들, 사회에 나가면 적어도 80%는 노동자다. 그런데 왜 당신들은 경영가의 입장만을 대변해주는가?
.....이야기가 옆으로 좀 샜다.
이 책에서는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대학생들이 많이 보인다.(결코 이들이 소시오패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 영화, 인터넷에서 약자가 힘들어함에 있어 눈물도 흘리고, 동정도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전혀 반대 입장을 보이는 학생들. 그리고 앞뒤가 안 맞는 모순.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맞다고 확신을 받기 위해서 현실마저도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과연 이 학생들이 정말 그래도 소위 명문대라고 불리는 학생들이 맞는가?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논리적이지 못한 학생들.(물론 이 발언에도 편견이 숨어있다.) 그리고 그 색안경으로 사람을 판단내려 버린 후에 그 판단에 맞춰서 현실을 받아들인다. 이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20대들은 학력위계사회의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다. 그들은 자기방어를 철저히 하되, 타인에게는 매우 혹독하리만큼 공격적이다. 자기계발서적이 만들어낸 이 혹독한 사회와 이 혹독한 사회를 받아들이라는 치유,힐링 도서에 혹독한 비판을 가한다. 아니, 이 혹독한 사회 속에서의 냉혹해진 20대들을 샅샅이 파헤치고 있다. 그들의 생각, 심리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사실...나도 왠지 나보다 낮은 대학교 애들에서는 살짝, 자부심이 생기기도 하고, 명문대생 앞에서는 심적으로 위축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수능이라는 것이 그 사람의 능력 자체라 생각치 않았다. 왜냐면, 모의고사에서 만점받고, 490점대를 넘나드는 사람이 수능날만 되면 시험을 망치는 경우를 봤기에....수능이라는 것 자체가 워낙 변수가 많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회에서는 학교 이름, 학벌사회.학벌을 해체되고 있다고 말하지만, 20대들 사이에서 학벌은 이미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이미 사람의 90%는 학교이름으로 판단을 세운다. 왜? 취업하기 위해서. 학교이름에 더 목을 맨다. 너? 지방대. 나? 서울권에 있는 대학. 너?서울권에 있는 대학.나?서울에서도 명문대. 너?서울명문대? 나? 서울대. 20대들 사이에서는 끝없는 학교이름의 줄세우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모교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사회에 나가면 '나랑 동등한 학교위치에 있는 경쟁자'로 인식된다. 모교내에서도 정시, 수시, 편입생 등으로 나누어 서로를 평가한다. 나는 특균충, 지균충...이라는 말을 나는 여기서 처음 알았다. 특별균형전형선발 = 특균충 / 지역균형선발 = 지균충이라는 말이 그렇게도 충격적이었다. 그 후 어디에 취직했느냐, 연봉에 따라서 성공한 삶/실패한 삶으로 재단되어지고, 서로가 서로를 눈치보며 감시하는, 타인의 시선에 꽁꽁 묶인 20대들이다. 마치 도가니처럼 좁은 밥그릇 안에서 치고 받고 싸우고, 싸우고, 싸우고.....그 안에서라도 어떡해서는 살아남아야겠기에, 밥그릇을 챙겨야 겠기에.......차별은 당연하다고 여겨버리게 된 20대. 그 차별은 오로지 개인의 능력에만 달려 있기에 정당화되고, 그 능력은 니가 노력을 안 한 것으로 치부된다. 자기방어를 위해 펼치는 차별이, 또 다른 차별을 낳는 그런 사회.
그런 사회에 대한 대안은 있냐고?
그 대안에 대해서 이 책은 명쾌하게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그 점에 대해서도 저자는 인정하고 있으며, 그러나 자신의 이 사회적 분석이 앞으로의 대안을 모색하는데 한 걸음이 되리라고 믿고 있다.
................
인간이라는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많은 것들을 내려놓아야 하는 사회.
그로 인한 박탈감, 열등감을 인터넷에서 배설함으로써 풀어내는 그런 기형적인 사회.
........능력에 따른 보상과 구별은 이루어져야 하나 차별은 안된다. 나는 구별과 차별이라는 말을 분명히 가려서 쓰는 것이 하나의 첫 물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구별과 차별을 혼용해서 쓴다. 예를 들어, 여자친구나 남자친구, 연인들이 남들과 나를 차별해주길 원한다고 말하거나, 그리 생각한다. 아니다. 차별이 아니라 구별해주길 바란다고 생각해야 한다. 차별은 까닭없이 타인을 깎아내려보는 행동이나 생각이다. 우리는 서로 구분되어져야 할 대상이지, 결코 차별 대우를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다. 이러한 용어 사용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칠지는 미지수이지만 언어가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치듯, 이 또한 기여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또 하나, 능력에 따른 보상이 왜 자꾸 신분과 계급을 결정짓고, 그로 인한 차별로 도달하게 되는가는 바로 보상의 문제가 가장 강한 것 같다. 19년간 피나는 노력해서 얻은 점수는 대학교 간판 하나뿐. 최대한 이 간판에 대한 대가와 대우를 받기 위한 차별이 시작된다. 취업 후에도 마찬가지다. 이 회사에 들어오기 위한 엄청난 스펙과 노력들....그로 인한 회사 간판과 연봉. 그러니 서로가 서로에게 넌 그만큼밖에 안되는 인간으로 취급하며 나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노력에 대한 적절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노력에 걸맞는 대우는 타인의 기준과 평가가 동반되고, 이 노력에 대한 대우는 매우 짜다. 매우 짜디짠 보상과 대우를 만들어낸 것은 누구인가.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 이는 누구일까. 우리는 우리의 노력에 대한 최소한만큼의 보상과 대우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이 이루어졌을때야 말로 20대의 차별은 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
추가1.
혹여나,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문득 추가해본다.
나는 차별(구별)을 아예 없애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물론 여기서 말하는 차별의 의미는 '구별'의 의미로 썼다.) 회사에서 학벌 좋은 사람을 선호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회사가 학벌을 보는 것에 대해 전적으로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충분한 대가와 보상없이 (이에 대해 경제적으로 말하면 인력시장에 대한... '수요와 공급'으로 태클을 걸어오겠지만, 어쨌든.) 날로 노동력을 착취하려는 세태를 비판하는 것이다. 여기 대학생들도 자주 언급하는 것중 하나인, 나는 남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명문대 왔는데, 그만한 대접을 받아야지요. -> 쉽게 말하면, 사회에서 대접받고, 남들보다 더 취업도 잘 되어야 하고, 가산점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 말인데, 이해한다. 당연하다. 당연히 더 노력했으니 그만큼 대접받는게 맞고, 뭐 남들에 비해 가산점이라든지 메리트가 있어야 하는 것 맞다고 본다. 흔히들 '성실성'이라든지의 척도에서 그것 활용하지 않는가.(과연 그게 그 사람의 모든 성실성을 반영하는가는 의구심이 들지만..)
하지만 예를 들어 '지방대'생을 무시하고 깔본다고 해서, '명문대'생으로서의 대접을 받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말이다. 상대적인 비교로서 차별을 하는 것은 심리적 우월감이라는 사소한 만족감만을 깔아줄뿐 절대로 '대우'해준다고 말할 수 없다. 대우와 차별은 같이 가는 것이 절대 아니다. 능력과 보상의 체계를 통한 구별지어지는 것이 있을지언정,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그 사람 전적인 모든 것을 재단해버리고 단정짓고, 판단해버리는 시각과 차별적인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서울 상위권 대학생 A에게 월 300만원 주고, 훨씬 스펙이 뛰어나고 실제로 일 잘하는, 서울대 출신의 B는 월 600만원 받는다면, 이것은 능력에 따른 보상의 구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각자의 노력에 따른, 능력에 따른, 정당한 대가니까. (다소 주관적이지만..)
그런데 서울 상위권 대학 A에게 월 100만원 주고, 훨씬 스펙이 뛰어나고 실제로 일 잘하는, 서울대 출신의 B에게 월 200만원 주면서 이것도 능력에 따른 보상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찌됐건,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 '차별적 대우' (능력에 따른 차별)을 주고 있지 않는가? 개인의 노력에 따른 100만원과 200만원 아닌가?
모든 것은 개인의 노력으로 치환되어버리고, 이 상황에서 B는 아, 어찌됐건 A보다 더 많이 받으니까....서울대 나온만큼 대우받네. 라고 생각할 사람 손 들어보라. A를 깎아버린다고 해서 결코 B가 그만큼 대우받는 것은 절대 아니다. A도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적정수준으로 받고, 그보다 정말 A에 비해 노력을 많이 해서 무언가 결과를 내보이고, 능력도 더 뛰어난 B에 걸맞는 적정수준으로 받는다는 것. 그것이 바로 '걸맞는 대우'다.(아마 여기서 또 반박이 들어올듯 싶다. 요즘 취업시장이 얼마나 코딱지만한데....이 수준에서는 서울대생이더라도 월 200도 감지덕지로 받아야지. 그리고 서울대보다 더 못한 A는 월 100만원 받는게 당연하지. 살기 퍽퍽하든 말든 그건 순전 개인의 능력부족 아닌가. 라면서...이 말대로라면 우리는 평생 어떠한 연봉에 대해서 불만을 갖지 말고 주는대로 받아야 한다.)
결론 : 보상과 능력에 따른 '구별된 대우'는 어느 정도 필요하다. 그래야 노력하고, 좀 더 발전적이게 되니까. 그러나 상대적으로 학벌이든 스펙이든, 무언가에서 밀리는 사람을 무시하고, 깔보는 차별적 행위를 한다고 해서 내가 대우받는 것도 아니고, 나와 상대를 순위매겨놓고 평가의 잣대를 일방적으로 들이밀어 이만큼 받아라고 하는 것이야 말로 상대와 나 둘 다 대우받지 못하는 것이다.
추가2.
어느 적 이런 생각을 한번 나눈적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본질적인 문제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의 <추가1> 쓴 말처럼 말도 안되는 개소리가 없다는 것도.....내가 말했듯 차별과 구별은 구분되어지고, 구별을 필요하다고 했지만...다시 한번 묻고자 한다. 과연, 차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말하는 구별이란 것도 결국엔 차별아닌가....하는 물음이다. 사회적으로, 정의적으로,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말에는 대부분이 동의한다. (물론 차별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간에.) 내가 말하는 구별은...아주 사소한 것일지언정 결국 차별과 같은 것이다. 차별에는 정도가 있는 것이고...
가령 생각해보았다.
어떤 회사가 사원을 모집하는데, 단 1명만 모집을 한다. 최종적으로 2명이 남았는데, 한명은 서울대생이고 모든 점수에서 100점이다. 다른 한명은 지방대생이고 모든점수에서 100점이다. 즉, 서울대생과 똑같다. 이럴 경우에는 누굴 뽑아야 하는가?...많은 이들이 이리 말할 것이다. 당연히 전자 아니냐고....모든것이 똑같다면, 당연히 과거일지라도 학벌 좋은, 노력했었던 이르 뽑아야 하지 않겠냐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회사는 현재 능력을 원하고 있고, 그 능력에서 다 똑같다면, 굳이 학교로 떨어뜨리는 것은 문제가 아닌가. 현재 능력과 아무 상관없는 학교 이름으로 떨어진다는 것이 차별 아닌가.(여기서 뭐, 배운것이 많고, 교수님이 출중하고..뭐..그리 말할 수 있지만, 현재능력과는 아무상관없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회사에서는 결국 1명을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내 생각은 여기서 서울대생을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반사람들과 같은 마인드다...내가 생각했던 것은, 현재 능력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서울대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뽑는 것은 차별이고, 이 차별을 없어져야 하며, 구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 구별도 궁극적으로 가면 사소한 차별이다. 결국 나는 차별을 용인하는 사람인 것이다....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애초에 구별과 차별이라는 것을 과연 우리는 나눌 수 있을까? 그 경계의 모호성에서....우리는 어떡해야 하나. 현실을 보면, 결국 그 애매성 위에 세워져 있기에 우리는 '사소한' 차별(물론 취업당사자들에게는 결코 사소하지 않을..)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첨언으로, 현재능력이 똑같다면, 지방대생은 대학교 다닐동안 서울대생의 몇 배는 더 노력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인생은 리셋할 수 없기에, 처음부터 스탯을 완벽하게 찍지 않으면 결국 나중에 스탯이 아무리 좋아도, 망해버리는 것처럼 게임과 똑같은 것일까...그러나 현실은 게임이 아니다. 후에라도 얼마든지 커버할 수 있는 것이 인생이고, 그렇기에 인생의 굴곡이 있고 사는 맛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추가3.
내 생각에는 결국 현대 사람들은 노골적인, 혹은 차별의 정도가 매우 심해진 것 같다. 대놓고 차별하는 것이 당연시하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또 하나, 왜 사람들이 차별을 용인하는가....생각 해 본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1. 보상이 너무 적다. 2. 결국 교육문제겠으나, 우리는 너무 평가'당하는데' 익숙해져 버렸다. 초등학교 때부터 각종 시험과, 점수, 능력, 수치로 평가받아온 끝에 자신의 본질보다는 주변과 타인에 의해 평가되는 것으로 자신의 본질을 대체시켜버렸다. 자신이 진정하고 싶어서 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묻는다. 얼마 벌어? 살기 힘들지 않냐? 이렇게. 그리고 반대로 성공하면, 대단하다고 추켜세우고, 그 성공한 사람의 인생은 또 다르게 포장되어 집중을 받는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뚫었더니 성공했다. 여러분도 열정만 가지면 가능하다고.. 그리고 우리는 다른 것들도 본질이 점철된 우리의 삶에서 동경과 부러움을 보낸다. 그리고 그 성공 또한 오로지 수치화된, '돈'을 얼마나 벌었냐 이다. 경쟁과 경쟁 속에서 우리는 절벽을 향해 달리고 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경쟁을 한다고?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경쟁은 불행을 향해 가고 있다. 그래서 진정 행복을 위해 탐색할 시간이 없다.
우리는 행복의 본질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안 된다. 먹고 사는 것, 욕구 충족은 무시못할 것이긴 하다. 그러나 그 먹고 사는 것을 넘어선, 소비와 소유를 행복의 본질로 생각하면, 우리는 돈이 성공의 기준이 되고, 돈을 벌기 위한 스펙쌓기에만 몰두하게 된다. 물론, 정말 돈이 좋은 사람들이면 그것이 기준이라고 해서 나쁠 것은 없다. 정말 자신의 원하는 것, 행복의 본질, 자신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으로 돌아가 모두가 다시 고민하게 될 때, 좀 더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추가4.
2018. 3. 23 댓글 보고서 이 글을 읽어본 후 다시 글을 추가해본다.
행복을 찾는 것은 중요하다. 그 행복은 욕망과도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평가받는데 익숙해졌고, 평가받는 방식으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렬해졌다. 타인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고통을 감내한다. 하지만 결국 스스로의 만족감을 채울 수 없기에 다시 고통받는다.
하지만 행복 찾기 이전에 이젠 '생존'이다. 다들 기를 쓰고 좋은 직장을 얻으려는 이유는 '먹고 살기 위한 생존' 때문에 그렇다. 이젠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30년 가까이 노력해서 20년정도 일해서 나머지 50년을 살아야만 한다. 죽을 때까지 경쟁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게 되었다. 행복도 생존을 한 후에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글을 쓸 때가 벌써 4년 전이었는데, 지난 4년 동안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리고 우리 사히는 일본처럼 가고 있다. 일본은 이제 구직자를 구하지 못해서 난리다. 대한민국의 미래도 그렇게 점쳐지고 있고, 대학 진학율도 실제로 떨어지고 있다. '구태여 경쟁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이래나 저래나 노예로 살긴 마찬가지인데....' 대학가는 것은 손해라는 인식도 서서히 생기고 있을거라 생각한다. 어중간한 대학가봐야 대책없으니, 일찌감치 안정적인 대책을 마련해보자는 각자도생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사실, 이러한 생각 이면에도 여전히 대학 서열을 나누고, 그에 따른 사회적 보상, 차별을 당연시 하는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프라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사실이니.... 하지만,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대우'를 못 받는다고 해서, 내 대우가 더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애초에 우리가 사람으로서 받는 대우가 어디를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 차이와 구분에 따른 보상은 당연하지만, 그 기준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 그것부터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대학 진학이 이제 필수가 되지 않게 된다면, 경쟁이 완화된다면, 우리는 좀 더 차별적 시각을 거둘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그 경쟁 완화가 부의 양극화로 인한 희망이 사라진 데서 온다는 것이 유감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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