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타인을 배려해야 한다','공감을 할 줄 알아야 한다'라는 명분으로 스스로의 감정을 검열하고, 타인의 감정을 검열하며, 사회를 검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의 감정마저도 일종의 선(line)을 그어놓고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악인과 선인을 나누는 구분점 비슷하게 되어버렸다.
사람은 저마다 그릇이 달라서, 어떤 이는 제 3자에게도 쉽사리 공감하지만, 어떤 이는 자신과 친밀한 사람에게만 공감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냉정하게 말해서 저 먼 이국땅에 고통받고 있는 아이를 생각했을 때 그 아이의 고통을 슬퍼할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그래서 수 많은 미디어들은 빈곤과 고통의 이미지를 가져와서 공익광고를 한다. 아무래도 눈 앞에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 사람의 행동과 마음을 이끌어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것과 비슷한 것이다. 단지 공감해야 할 대상이 먼 이국땅이 아닌,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사람이거나 혹은 내 주변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좀 더 넓은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지만, 결코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이상하거나 악인은 아니다. 다만 그 상당한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사람이 내 주변에 없길 바랄 뿐이고, 애써 지나치는 것 뿐이다.
우리 사회는 어느 순간부터 저마다의 그릇을 인정하지 않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릇마다 지니고 있는 저마다의 공감능력, 감정들을 주변 환경과 연관지어 검열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외모가 잘난 사람들이 외모에 대해 컴플렉스를 이야기하면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버린다거나, 집이 잘 사는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 걱정하면 대수롭지 않게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서 그들을 향해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기만자라는 타이틀을 달아서 그들의 감정을 검열해버리는 것이다. 그들이 느끼는 감정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한없이 가벼운 것이며, 타인을 배려하지 못한 감정들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감정들이 '배부른 소리'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배부르다'라는 것도 또 다른 이들의 기준에 서서 하는 소리일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는 고민이 누군가에게는 겪을 수도 있는 고민이다. 그것을 떠나서 저마다 지니고 있는 그릇에 따라 얼마든지 감정은 달라질 수 있는 법이다. 애초에 감정을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결국,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것도 결과적으로 본인이 안고 가는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에 대한 책임을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한 타인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에 대한 배려심, 공감을 강조하지만, 또 다른 기준에서 강요하고 있을 뿐이다.
p.s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만 한다. 그 감정은 본연히 자신만의 것이다. 타인의 (나를 향하지 않은) 자유로운 감정표현이 나를 자극할 때, 그 자극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판단하고 넘길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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