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존실/잡념들-생각정리

만족을 죄악시하는 사회

어둠속검은고양이 2021. 5. 20. 13:37

살아가다 보면 종종 왜 살지? 사는 이유가 뭘까? 하는 생각이 할 때가 있다.

우리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기 위한 원동력을 찾기 위해서다. 살아가는데 이유가 없으면 이렇게까지 아둥바둥 대면서 고단하게 살아가야 할 의지가 생기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왜 살아가는지도 모르는 채 사회의 거친 풍파를 겪고서 지친 몸을 이끌고 자식과 아내가 있는 집에 들어서면 그곳엔 내가 이렇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일본에는 사토리 세대라는 것이 있다.
득도 세대라고도 불리는 이 세대는 앞으로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버림으로써 지금의 불행한 상황에 만족하고 그대로 안주하는 세대를 말한다. 욕망이라는 것은 무언가를 원하는 것인즉, 현재 결핍된 상태를 말하며, 욕망이 충족된다는 것은 반대로 충족되기 전까지 끝없이 결핍의 고통을 받을 것이라는 걸 의미한다. 사토리 세대는 앞날에 대한 희망을 버렸으니, 나의 이 욕망들이 내가 노력한다면 충족될 거라는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득도해버린 것이다. 그들은 1마일족으로 살아간다. 집에서 반경 1마일 내에서 모든 의식주를 해결한다. 옷도 편하고 최소한으로, 음식도 적당하게 맛있고 배가 찰 정도로. 더 좋고 멋진 명품 옷이라든지, 세계적인 진미라든지 그런 걸 굳이 찾지 않는다. 그들에겐 사는 이유가 중요치 않다. 사는 이유를 찾을 정도로 삶이 치열하지도 않고, 그냥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인생인 것이다. 그들은 온갖 인터넷과 미디어가 쏟아내는 욕망과 자극에서 벗어나 있다. 내 삶과 다른 어떤 세계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최소화함으로써 만족감을 극대화하여 행복을 찾는다.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학파가 추구했던 아파테이아와 같은 경지다.

그러나 경쟁이 치열한 한국에서 사토리 세대는 존재할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만족은 그야말로 죄악시 된다. 일본이 득도 세대라 부르는 것을 한국에선 n포 세대로 부른다. 포기해버렸다는 것이다. 포기는 무능력, 나약함, 패배자로 둔갑된다. 치열한 삶이 디폴트 상태이기에 그것에 벗어난 것을 만족감, 득도와 같이 좋게 보지 않는다. 그냥 적응하지 못한, 포기한 인간일 뿐이다.

경쟁이 디폴트인 한국사회는 개인들이 경쟁의식을 삶의 원동력으로 살아가게 만들고 부모가 된 후로는 자식들이 이 험난한 경쟁사회에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하는 것을 삶의 원동력으로 삼게 만든다. 자식들을 인질로 만든다. 한국인의 거대한 두 삶의 원동력이 바로 자식과 능력 경쟁인 것이다. 내가 사회의 부품으로서 얼마나 능력이 뛰어난가. 또한 이 험난한 세상 내 자식은 어떻게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까. 이 두 가지다.

늘 경쟁상태에 있기에 만족이라는 건 있을 수 없다. 내가 능력이 올라가는만큼 남들도 능력을 키우고 있으니. 그러니 늘 불안한 상태로, 만족이 없는 결핍된 상태로 남아있게 만든다. 이런 사회에 만족이라는 건 삶의 원동력을 상실한 것을 의미한다.

한국 사회는 그러한 자들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본인이 그냥 그렇게 만족하고 살겠다는데 가만두지를 않는다. 한국 사회는 그들을 향해 실패자, 패배자 낙인을 씌운다. 미친듯이 눈치를 주고 끝없는 비교를 통해 그들이 다시 욕망에 뛰어들길 요구한다. 자본주의는 욕망을 바탕으로 돌아간다. 만족이라는 것이 생기는 순간 성장은 멈춘다. 그래서 한국사회는 만족이나 안일함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평균이 50프로가 아닌 상위 10프로로 정의되는 사회.
절대 다수의 80프로가 패배자인 사회.
안일함과 만족은 죄악시 되는 사회.
오직 경쟁과 승리만이 존재하고 패배자, 실패자들은 지워내는 사회.

그것이 바로 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