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어릴 땐 체벌을 받으면서 자랐지만, 커가면서 '체벌은 나쁘다'는 말을 배우며 자랐다. 그리고 성인이 될 때 쯤엔 체벌은 상당수 사라지는 추세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지금, 필자 스스로 생각해보고 내린 결론은 '체벌은 필요하다'였다.
전에 필자는 '문명인들은 무례한 말을 해도 머리가 쪼개지지 않는다'는 글을 통해서 한 명의 사회적 인간을 만들어 낸다는 것과 체벌의 필요성에 고찰한 적이 있다.
우린 폭력을 야만적이라고 배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돌아가서 '폭력이 과연 야만적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해보자. 어째서 폭력은 야만적인가?
남에게 상처를 입히므로? 육체적인 힘으로 상하관계를 결정지으므로? 폭력은 신체적 폭력 뿐만 아니라 정신적 폭력도 있는데? 어쩌면 순간적 육체적 폭력보다 사람을 자살로 몰고 가는 정신적 폭력이 더 잔인할지도 모른다.
우선, 체벌에 해당하는 '육체적 폭력'이 야만적인 것으로 불리는 까닭은 인간과 동물의 구분짓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적자생존, 약육강식, 힘의 논리.
이는 육체적 차이로 상하 관계가 분명해지는 자연의 동물들을 가리키는 특징으로서, 예로부터 인간은 이러한 것들로부터 멀어짐으로써 동물들과 '다른'. '우월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그것에서부터 나온 것이 바로 폭력은 야만적이라는 사고이며, 이는 체벌은 야만적이며 인간 사이에선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사고로 이어졌다. 나약한 인간이 자연을 극복하기 위해선 뭉쳐야 했으므로 통합을 위해 권한을 한 사람에게 이양하므로서 서로간의 폭력을 금지했다는 것도 일리 있는 주장이다. 필자가 보기엔 복합적으로 섞여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좀 더 근원적으로 '인간은 동물과 구분되어야만 하는가?'라는 생각해볼 수 있지만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 이 생각은 잠시 중단하며, 체벌 반대론자들의 주장을 생각해보자.
체벌이 반대되는 이유는 인간이 인간을 때리는 것은 야만적이며, 교화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요지다.
어떤 제도가 사회에 도입된다는 것은 그 제도의 근원적 질문과 사상이 사회적, 현실적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제도를 도입할 땐 그 제도의 사회적 현실적 형태의 이득과 손해관계만을 따져야지, 그것의 사상적 배경과 도덕성을 제도 도입 당시에 따질 필요가 없다. 배경과 도덕성의 이러이러한 제도를 만들자는 발의 단계에서나 논의될 법하므로, 실질적으로 체벌 반대론자들이 말하는 인간이 인간을 때리는 것은 야만적이라는 도덕성은 고려할 사항조차 되지 못한다. 차라리 축척된 데이터를 통해 교화에 도움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일리가 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체벌하는 이유는 즉각적인 억제력 때문이다. 체벌을 통해 교화가 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거야 체벌의 대상만이 알 수 있는 문제며, 어차피 마음속의 여부는 상관없다. 세상은 결국 겉으로 드러나는, 행하는 행동으로 돌아가니까.
애초에 체벌로 교화된다는 것이 웃긴 소리다. 그건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나쁜 짓하면 맞는구나 와 같은 조건 반사적인 판단일 뿐이라 생각한다. 교화는 끊임없는 교육과 역지사지의 마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는 상당한 시간을 요한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은 선악구분이 분명치 못해 사건 사고는 늘 일어나기 마련이니, 그러한 행동들이 교화되기 전까지 억제할 수 있는 어떠한 수단이 필요하지 않을까.
단순히 체벌은 야만적이고, 교화의 가능성이 없다며 덮어버리기엔 그들이 교화되기 전까지 발생하는 피해자들은 누가 챙겨준다는 말인가.
교화와 교육은 오랜 시간을 요한다.
그 긴 시간동안 억제력으로서 체벌은 분명히 필요하다.
체벌을 악용하는 것은 다른 방법을 통해 보완해야 할 문제다.
이상이 필자가 내린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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