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존실/잡념들-생각정리

갑과 을을 상징하는 사랑

어둠속검은고양이 2020. 10. 26. 18:30

우린 종종 '너는 쓸데없이 눈만 높아'라거나 '눈 좀 낮춰'라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쓸데없이 눈만 높다는 말은 취향이 까다롭다는 걸 이야기하는 것인데, 과연 사람을 좋아하는 취향이라는 걸 본인이 원하는대로 조절할 수 있는가.

여성을 좋아하는 남성보고 남성을 좋아해보라고 노력하라고 한들, 남성을 좋아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물론 취향-이상형과는 무관하게 지대다보니 상대방에게 매력을 느낄 수는 있다. 실제로도 많은 연인들이 그렇게 사귀고 있고. 여튼 간에 사람을 보는 눈, 취향이라는 건 원한다고 해서 조절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자, 그럼 다시 돌아와서 과연 사람보는 눈에 높낮이가 있을 수 있을까. 눈이 높다거나 눈을 낮추라고 말하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 말의 뜻은 잘난 사람들은 잘난 사람들끼리만 사귀고, 못난 사람들은 못난 사람들끼리 사귀라는 말과 같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자신보다 더 매력적인 사람을 연인으로 삼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데, 마치 넌 2등급이니 1등급 탐내지 말고 2등급에 어울릴만한 사람이나 찾으라는 것과 같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하지도 않을테고, 이런 의도를 갖고 말한 것도 아닐 테지만, 말 속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고들이 포함되는 법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우리가 사람을 평가하고 사랑을 계산하기 시작한 것은.

네가 더 아까운데.
네가 더 어린데.
네가 더 능력 있는데.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사랑을 갑과 을의 관계로 치환시켜 버린다. 그러고선 외모에서, 나이에서, 능력에서 위아래로 나눠놓고 위쪽은 위쪽끼리, 아래쪽은 아래쪽끼리 어울려야 한다는 듯이 말한다. 앞서 말한 사람 보는 눈에 대한 높낮이도 여기서 비롯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종종 (외모든 능력이든) 네가 더 아깝다고 말하거나, 네가 왜 아쉬워하냐는 듯한 반응을 가져온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상대와 나의 매력도의 높낮이와는 관계없이 더 원하고, 더 바라는 쪽이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는 법이다. 그것이 돈을 더 쓰는 것이든, 더 연락하는 것이든, 표현을 더 자주하든 것이든, 어떤 것이든 간에.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이런 사랑조차도 갑과 을에서 거래하는 관계로 사고하게 된 듯하다. 더 비극적인 것은 이러한 사고화 과정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당연한듯이 발언하게 됐다는 점이다. 그리고선 타인의 연애에서까지도 이런 사고방식대로 판단하고 조언한다.

팍팍해져가는 현실 앞에서 갑과 을의 위치를 상징하는 아이템이 되어 버린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