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현실이지만, 현실은 결과다.
경쟁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고,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 밖에 없을지라도, 모두들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결과는 늘 한정되어 있기에 결과값에는 노력, 기회, 배경, 운까지 모든 것이 걸릴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운도 실력'이라는 말이 가혹하지만,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경쟁에서 '운'이라는 외부요인을 최대한 배제하고 순수 노력으로만 결과가 나오길 바란다. 개인의 노력이야말로 그나마 가장 공평한 요인이라는 사고방식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마다 노력의 한계는 다 다른 법인데,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주자고, 존중해주자고 주장만 할 뿐, 인정과 존중으로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노력이라는 것도 깊게 파고들면, 노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외부환경도 분명히 존재하는 법인데, 그러한 외부환경에 대해 우리는 침묵하고, 오로지 개인의 노력에 대해서 비판적 자세를 취한다.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 깊은 환경까지 고려해줄 여유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그거야 네 사정이고, 네 환경이고, 어차피 출발점은 다 다르고, 그것까지 내가 왜 고려해줘야 하는가다. 출발점이 다른 것을 문제삼아 봐야 피곤만 하지, 고쳐질 게 없는 것이 현실이니까.
맞다.
잔혹한 현실이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운도 실력이고, 원래부터 출발선은 불공평하며, 절대적 평등한 출발선은 불가능하다. 그저 자신의 출발선에서 최선을 다해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인생이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결과다. 하지만, 적어도 '스스로 노력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향해 돌을 던질 필요가 있을까 싶다. 노력의 한계는 사람마다 달라서, 정말로 본인 생각에는 할만큼 했다고 하는데, 안되는 경우를 두고, 우리는 그 사람을 비웃는다. 우리만의 '노력'의 잣대로 그 사람을 깔아뭉갠다.
노력에는 기준이 없다. 미의 기준이 없듯이.
하지만 우리는 깔아뭉갠다. 존중해달라고 아우성치면서, 자신만의 잣대를 기준으로 평가하고, 평가하고, 평가해서 깔아뭉갠다. 평가받는 것을 그리도 싫어하고, 그런 세상을 만든 기존 세대들을 증오하면서, 똑같이 타인을 평가하고, 줄을 세운다.
우리가 평가할 수 있는 노력은 오로지 자신의 노력에 대한 것 뿐이다.
타인의 노력에 대해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우리가 타인에 대해 평가내릴 수 있는 것은 결과와 결과의 연장선으로서 태도, 단 두 가지다. 타인의 노력은 오로지 내 삶의 참조로써만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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