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피를 못 잡다.
갈피란 겹치거나 포갠 물건 하나하나의 사이를 뜻하는 말로, 대표적으로 쓰이는 단어로 책갈피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이 책갈피를 통해 책을 어디까지 읽었는가 표시를 하고, 또 그 표시를 찾는다. 책장과 책장 사이의 틈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찾아내는 것. 그렇기에 갈피란 어떤 일의 갈래나 방향을 뜻한다. 어디까지 읽었는지, 어디서부터 읽어갈 것인지, 그 지점 명확히 하는데서 앞으로의 방향이나 갈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이 꼬여서 복잡할때 사람들은 갈피를 못 잡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어떻게 풀어가야 할 지 도통 해결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갈피를 못 잡겠다는 말보다 갈피를 못 찾겠다는 말이 더 좋다. 틈이나 지점을 잡기보단 찾아내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나 하는 생각 때문이다.
갈피를 못 찾는 것은 바로 이 편지와 같다. 어디서부터 글을 쓸 지, 어떻게 풀어야 할 지 이 감정들과 생각들이 뒤엉켜 있기에. 그래서 이 편지는 다소 두서가 없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복잡한 마음을 글로 쓰는 것은, 글을 써가며 점점 그것들이 해소되고, 정제되고, 명확해져 가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해서 이 글을 불친철하다. 감정과 생각을 정제하고, 명확하게 정리한 상태에서 글을 써야 글을 읽는 사람이 편안할 터인데, 이 글의 시작과 목적은 글쓰기에 정확히 위배되기 때문이다. 읽는 사람은 불편하고, 쓰는 사람은 편안해지는 글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글이라는 건 쓰는 이가 읽는 이를 통해 만들어내는 것인데 말이다. 잡설이 길었다.
부정.
부정당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들고 자신을 의심하게 만들지요. 확신을 거두어 갑니다. 오래 전에 저는 자존감에 대해 이야기했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자기 확신은 무척 중요하다고 말했어요. 부정은 그 자기 확신을 무너뜨리고, 결국엔 자존감마저도 떨어뜨립니다. 물론 세상에 긍정만 있을 순 없어요. 넓은 세상만큼이나 다양한 사람, 다양한 의견이 있을 테니까요. 그 다양함 속에서 긍정과 부정의 뒤섞임이 균형을 잡아가게 되지요. 적절한 부정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답니다.
그래도요. 그래도 부정은 여전히 가슴 아파요. 아픈 건 아픈 거니까. .......전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전 항상 무언가 애매해요. 그래서 이도저도 아니고, 결국 개성도 없어지고, 수동적이게 되어 버렸어요. 내 인생인데, 되어 버렸다는 말조차도 이상하네요. 결국 내가 나를 그렇게 만들어 간건데요. 여튼 어디서부터 제가 잘못 살아왔는가 싶어요. 어쩌다 나라는 캐릭터가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물론 이런 캐릭터로 지내며 한탄한 것도 오래됐네요. 그 긴 시간동안 변화하질 못했다는 것이 더 문제겠다 싶네요. 현실을 욕했고, 변화를 회피했어요. 그 결과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긴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불만투성이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그 단순하지만 확고한, 누구나 다 아는 진리를 깨달았지만, 여전히 달라지지 못했네요. 몇 달 전쯤엔가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겠다고 한 적 있죠. 그리고 실패했다고 한 것까지도. 애초에 코스프레를 해야 한다는 것 자체부터가 글러먹은거죠. 그렇다고 이런 나 자신을 받아들이지도 못해 고통을 받고 있는거죠. 받아들이지 못할거면 노오력이라도 해야 하는데 말이에요.
지나버린 건 지나버린거에요. 내가 꿈꿔왔던 학창시절이나 대학시절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죠. 그 땐 왜 그리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했는지. 그럼에도 그 시절이 그리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철없는 어른인거죠. 맞아요. 어른. 전 이제 어른이 되어 버렸어요. 내 사고방식과 내 꿈과 내 욕망은 여전히 그 시절을 못 벗어난 어린애인데. 나이만 쓸데없이 먹어버렸어요. 난 아직 어린이 하고 싶어! 라고 주장해도 씨알도 안 먹힐 나이가 되어버렸죠.
모르겠어요.
어디가 문제인지. 글을 이렇게 쓰고 있지만, 문제를 다 아는 듯이 분석해봐도 그것은 근본적인 원인이 되질 못해요. 뭐 그런 것들 있잖아요. 회피형 성격이라느니, 아직도 생각이 나이대 맞지 않는다느니, 애매한 포지션이라느니, 뭐 그러한 것들이요. 변화를 회피하고, 도전을 등한시한 결과, 나는 더욱 어려워진 난이도로 관계맺음에 도전하게 됐어요. 청각 장애인에게 소리를 좀 더 잘 들어보라고, 노력해보라고 하지 않아요. 연애 고자라는 사람에게 네가 노력을 안해서 그래, 노력하면 연애할 수 있어! 라고 말하는 것은 앞서 말한 것과 다름없어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거든요. 그것은 스스로 체화해야 하는 것이에요. 체화는 누가 대신 해줄 수 없어요. 부딪쳐가면서 배워야하는 거죠. 하지만 까막눈이 글자를 놓고 배울 수 없듯이, 연애 고자는 부딪쳐보더라도 배울 수 가 없어요. 어디서 복기를 해봐야 하는지 알 수가 없거든요.
기껏 이리저리 글을 써본 것이 결국 연애 못해서 그런 것이냐 하고 헛웃음이 치실지도 모르겠네요. 허나 그 연애는 인간 관계 맺음에 있어서 긍정과 부정이라는 한 축과 맞닿아 있기에 생각보다 중요해요. 이는 자신을 둘러보고 자신을 의심하게 만들죠. 많은 이들이 어디서 어떻게 연애를 시작해야 할 지 고민하고, 그래서 어플이나 인터넷에서 자기PR을 해요. 수 많은 사람들 속에서 자신과 맞는 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요. 그러나 역설적이게 그 어플이나 인터넷이 더욱 더 조건을 따지지요. 그만큼 많은 이들에게 자신을 선보이니, 자신과 맞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요. 타협이 없어요. 타협이 되지 않아 주변에서 인연을 찾지 못해서 더 타협하기 어려운, 조건을 따지는 어플이나 인터넷을 시작하다니요. 그래서 보면 많은 이들이 자신과 티키타카가 잘 되는 걸 추가적인 조건으로 내세워요. 그런데 티키타카가 잘 되는지 안 되는지는 만나봐야 대화를 해봐야 알 수 있어요. 그것도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탐색이 이루어져 공통적인 드립이나 화제거리가 있는 경우에 말이에요. 그러나 사람들은 탐색을 위해 만나는 것의 조건으로 티키타카를 내세우고 있으니 마치 회사가 경험있는 신입을 원하는 것과 같지요.
글이 좀 옆으로 샜네요.
시도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냐는 말도, 노오력을 해보란 말도, 그냥 그대로 변화하지 않을 거면 괴로워하질 말라는 말도. 전 모르겠어요. 오랫동안 이 티스토리를 하며 글을 썼듯이 여러번의 썸을 타봤고, 사랑도 해봤지만, 결국 뭐하나 제대로 사귀지 못하고 흐지부지 됐지만, 그럼에도 이 나이 먹도록 제대로 된 시작조차 못하고 부정만 당하는 것이. 연애가 발화점이 됐지만, 이건 결국 인간 관계, 사회성의 문제에요. 싫으면 변화해야 하는데, 결국 싫다고 떼만 쓰고 있는 아이인거죠. 그리고 이 글은 그 떼씀에 대한 핑계인거구요. 관계 맺음이라는 건 누군가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이 나이 먹도록 그걸 제대로 못 익혀서 괴로워 하고 있으니,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갈등을 회피하려는 이 성격을 고치지 않는 한 영원히 관계맺음은 개선되지 않겠지요. 회피적이고 수동적이고 그냥 흐르는대로 살아가는 삶이. 이 삶이.
삶엔 의미가 없고, 그저 선택과 선택에 대한 책임만 있을 뿐인데. 선택하지도 않은 삶이 지속된다는 건 슬픈 일이지요. 아니, 선택을 해도 그 선택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삶은 괴로울 뿐이에요. 남들에게 자연스러운 것들이. 그 평범한 것들이. 나에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유감이에요. '포기하면 편해.'라는 말처럼 정말 내려놓으면 편할텐데 끝내 내려놓지 못하고 그 평범함들을 슬쩍 슬쩍 쳐다보니 힘든 거겠죠.
재능이 닿지 않는 곳을 바라보며 아쉬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어요. 누군가에겐 평범한 것들이 나에겐 재능이 없는 거겠죠. 돈은 네 발이 달려서 두 발로 쫓아가면 못 잡는다는 말처럼 사랑 역시 쫓아가면 오히려 달아나는 거라 생각해요. 재능이 없음을 인정하고 그냥 내려놓고 오직 본인의 삶에 치중해야만 겠어요. 그것이 평범하든, 평범하지 않든 간에. 관계는 억지로 노오력 한다고 이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사회성이든 관계 맺음이든 일반인 코스프레든 노력이든 뭐든. 노력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노력하는 것도 아니고,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저 흘러가듯이 내 삶에 충실하게. 그 끝이 무엇일지라도 그냥 살아갈 거예요. 되는대로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