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존실/잡념들-생각정리

잠깐의 묵념과 오만함

어둠속검은고양이 2019. 11. 29. 04:31

며칠 전에 떠올렸던 글을 이제서야 써내려간다.

얼마전 일가족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을 두고 기사에서는 과거의 또 다른 일가족 자살 사건에 대한 언급과 함께 달라지지 않은 정부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현 사건에서 그들이 어째서 자살했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연일 보도했다.

어느 새 죽음에 대해 무감각해졌는지 그럼에도 나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개인이 아닌 일가족이 자살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경종을 울릴만한 일이긴 하지만, 일가족이든 개인이든 어차피 기사에는 자살이라는 단어 한 마디와 하나의 사건으로 언급되고 말 일이니까. 그냥 기사를 보면서 무미건조한 빈말로 '안타깝네'라고 말할 정도 였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당시에 짤막하게 글을 썼으나, 여지껏 미루다가 이제서야 글을 마무리 지어 올리는 걸 보면 확실히 나에겐 그 정도의 일이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내가 글을 쓰게 된 것은 죽음을 마주하는 이들의 그 결심과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그들이 이곳을 떠나기 전 음식을 잔뜩 배달해서 먹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죽음을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두려움과 비통함이 있었을까.

마치 결전의 순간을 기다리는 이들처럼 그들은 주문한 마지막 만찬이 오기까지 그 긴 시간 속에서 생사를 다짐하고 또 다짐했을 것이다. 떠나기로 굳게 결심했고 그에 대한 마지막 행동으로 음식을 주문을 했으니, 그들의 결심은 이제 방아쇠가 당겨졌다 생각했을 것이다. 평소에 먹고 싶었지만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함부로 먹을 수 없었던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말하면서 '죽을 때가 되서야 돈 걱정 안 하고 음식 주문하네'라고 생각했을거라 상상해보면 가슴이 먹먹하다. 곧 떠날 것이라 그들 딴에는 돈 걱정 안하고 주문을 했을테지만, 그럼에도 그 피치 못할 죽음의 선택 앞에서조차도 주문의 폭이 한정된 금액에 맞춰졌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내 추측과 상상일 뿐이다.
우리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의미로 자살이라 부르지만, 죽음을 택하게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그건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가깝다. 외부인은 분명히 길은 있을 거라고, 죽느냐 사느냐 두 선택지에서 산다는 선택을 하라고 말할 테지만, 죽음을 마주하는 사람에게는 죽는다는 하나의 선택지 앞에서 차마 머뭇거리고 있는 것뿐이다.

이렇듯 남겨진 흔적들로 추측해보는 그 때의 심정과 슬픔은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타인의 죽음을 두고서 함부로 추측하고, 글로 쓰고 털어낼 정도로 가벼이 바라보는 오만함이 아닐까 한다.

저기 머나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듣고 1초의 고민도 없이 넘기는 것처럼, 그나마 한국이라는 단어 때문에 일본과의 외교마찰이니 미국과의 방위비 협상이니 하는 소리에 내 미래를 잠깐 걱정하지만 이내 잊어버리는 것처럼, 이들의 죽음 역시도 나의 현 일상에 어떠한 영향도 닿지 않기에 잠깐의 동요와 함께 잊혀질 것이며 내 일상은 그래왔던 것처럼 그대로 굴러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