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편지

어둠속검은고양이 2024. 12. 25. 20:55

강원도에 계시다던 당신께

우리가 필담을 나눈지도 꽤 오래됐군요.

지금도 잘 계신지 궁금합니다. 강원도에 계신다고 들었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 계신지요. 강원도엔 지금 눈이 내리고 있나요. 여긴 눈의 흔적이 사라진 지 오래라, 대신 강원도에 내릴 눈을 생각하며 편지를 씁니다. 저는 여전히 고향에 머물고 있습니다. 남쪽 끝자락이지요. 그래도 작년엔 눈을 제법 봤던 것 같은데. 올해는 눈이 쌓이질 않네요. 아름다움은 한순간이지만, 불편함은 지속되기에 상당수의 어른들은 눈을 좋아하지 않지요. 그래도 그 아름다운 한순간을 볼 수 있다면 때때로 그 지속되는 불편함을 감내할만하지도 않겠냐는 게 제 생각이기도 합니다. 전 여전히 눈을 좋아하고, 눈 내리는 장면을, 눈 내린 뒤 풍경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눈 내린 강원도의 산을 생각하며 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지만,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현실은 녹록치 않을테지요.

글을 쓰며 잠깐 강원도 날씨를 검색했습니다. 11월 중순쯤에 대설주의보가 내렸던 걸 보면, 눈 내린 강원도의 산을 보고 싶다는 제 발언은 실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 발언을 지우는 대신, 11월은 무탈하게 잘 지내셨는지 안부부터 다시 묻는 걸로 갈음하겠습니다. 제 편지를 읽고 계시다면 11월을 나름대로 잘 지나쳐 왔다는 것일 테니, 당신이 잘 지내고 있을거라 믿겠습니다. 그래도 직접 대답을 듣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믿음보단 필담으로, 필담보단 대화로 말이지요.

제가 편지를 쓰는 이유는 알 수 없음이 주는 매력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비주의와는 결이 다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알 수 없음에서 서서히 알아가는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신속, 정확, 효율. 이것은 현대 사회에 접어들면서 최고의 가치가 됐습니다. 제가 당신께 편지를 쓰면서 바로 강원도 날씨를 알 수 있듯이, 이는 저희의 궁금증을 빠르게 해소해줍니다. 그러나 빠르게 해소되는 궁금증만큼이나 우리네 상상력도 빠르게 사라져버리는 듯합니다. 우리의 상상력은 알 수 없음에서 비롯되고, 기다림에서 지속됩니다. 허나 기다림이 사라져버리니 상상력도 사라지는 수 밖에 없습니다. 편지를 보내고 당신이 이를 읽어보고 답장을 하기까지. 그 긴 시간 동안 상상하고, 또 받아본 답장에서 상상이 현실로 되는 순간을, 혹은 상상이 어긋나는 순간을 겪는 것이 묘한 즐거움을 주지요. 어쩌면 제가 느낀다는 편지의 매력은 신비주의에서 신비주의가 벗겨지는 순간까지를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오늘의 모처럼 휴일이기도 하니 문득 당신께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저 제멋대로 쓰고 싶어서 쓰는 편지입니다.

오늘 하루 저는 평범하게 보냈습니다. 오전엔 간단한 일을 했고, 오후엔 어제 늦게 퇴근하느라 밀렸던 잠을 좀 잤습니다. 휴일을 잠으로 보낸 것이 못내 아깝긴 했지만, 가끔 이리 쉬어가는 것도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번 잠으로 보내는 것은 문제겠지만요. 갈증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물 한방울이 그리 달콤한 것처럼, 일부러라도 공휴일도 좀 더 부지런하게 활동하고 바삐 보내야겠습니다. 그러다 이렇게 가끔 휴식으로 보내는 것이지요. 해야할 것과 하고 싶은 것과 해야만 하는 것들 모두 다 하면서도 진정한 휴식을 즐기려면 말이지요. 요즘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티비와 유튜브와 담을 쌓고 지낸지 오래라 어떤 걸 봐도 무미건조했는데, 막상 보니 무척 재밌어서 정주행하고 있습니다. 다 보고 나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아서 정주행 속도를 줄이고 있습니다. 다음 주나 이번 주말엔 촬영지에 놀러가려고 합니다. 행동보다 귀찮음이 더 커져 버린 제게, 이렇게 재미를 느끼고, 일부러 외부 활동까지 하게 만드는 경우는 정말 오랜만이라 즐겨보려 합니다. 부디 이러한 것들이 한순간에 끝나지 않고 지속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메리크리스마스.

p.s
추천곡 - 눈물 아닌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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