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푸스의 시지프스처럼 굴러떨어지는 돌을 끝없이 올려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가끔씩 다 놓아버리고 쉬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은 마치 열정이라는 것을 한껏 태우기 전에, '태우고 남으면 남는 것이 무엇인가?'와 같은 회의감을 먼저 익혀버린 것과 같은 것이다.
이 회의감은 세상이 노력보다 결과만을 알아본다는 현실과 노력의 무력함에 대한 서글픔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노력을 일일히 바라봐줄만큼 여유도, 자비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력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참으로 고마운 생각이 든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럴 여유도 사정도 안 되기에, 오로지 결과로써 내놔야만 한다.
그나마, 한 가지 희망적인 것은 노력은 과정이고, 결과는 완성이라는 점이다.
결과가 없으면 노력은 없어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노력이 없으면 결과도 없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나마 노력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달까. 요행의 대부분은 노력과 노력 사이에 존재하지만, 말그대로 뜬금없이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니 삶이 예측불가능하기도 하지만서도..뭐..여튼간에.
노력보다 결과가 앞서는 것, 요행이 있다는 것이 좋든 싫든 간에 사회는 계속 굴러간다.
인생도 그 사회 속에서 굴러갈 것이고,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든, 어떤 방식으로 결과를 내든 간에 무상하게도 계속 흘러갈 뿐이다.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휩쓸리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끝없는 노력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운명인 것이다.
우리는 시지프스처럼 끝없이 돌을 아래서 위로 옮겨야만 한다. 그 돌은 내려놓는 순간, 다시 떨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돌을 올려놓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까닭은 돌을 올리는 것을 멈추는 순간, 그 돌과 함께 끝없이 추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돌은 우리가 죽고 난 후에야 추락하기를 멈출 것이다. 포기의 대가가 가혹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노력이 헛되게도 끝없다는 사실은, 우리를 회의감과 무력감, 우울감으로 인도하여 포기라는 결과로 유혹한다.
한평생 돌만을 옮기다 끝날 인생이지만, 이 시지프스의 돌의 무게만큼은 스스로 무겁게, 혹은 가볍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은 그나마 희망적이다. 돌의 무게를 무겁게 만들어 버티지 못하고 포기하든, 가볍게 만들어 좀 더 편하게 굴리든,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발버둥 치느냐에 달렸다. 이러한 발버둥이 무엇이 됐든 간에, 우린 살아야 하고, 살기 위해서 끝없이 발버둥 치는 것이다. 비록 그 발버둥이 우리의 인생을 처절하고, 처량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줄지라도 말이다.
이 발버둥은 불완전에서 출발하기에 완벽이란 존재할 수 없다.
완벽을 기하지 말 것. 완벽은 시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통한 결과로만 도출될 뿐이고, 그 결과마저도 죽음으로서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지난날 속에서 가져가야 할 것은 가져가고, 버려야할 것은 버릴 것.
과거에 갇히지 말고, 끝없이 현재를 도모할 것.
현재 할 수 있는 것을 할 것. 그냥 할 것.
느긋하게 열심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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