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존실/떠오르는

치중해서 살되, 생각하자.

어둠속검은고양이 2019. 9. 2. 06:47

을 새벽의 차분함에 조용히 펜을 들어 글을 써봅니다.
이젠 완연한 가을이네요. 지금 시간 때쯤이면 해가 떠오르곤 했었는데 말이지요.

'나의 삶은 저  빛처럼 돼야 해. 끝없이 올라가야 하지.'
- 영화 위대한 개츠비, 디카프리오 대사 中

벌써 6년 전이네요. 영화 위대한 개츠비(2013)를 보신 적 있나요. 상당히 재밌게 봤었는데, 저 대사와는 달리 흥행실패를 했다는 사실이 감회가 새롭네요. 마치 개츠비의 최후를 보는 것 같군요.

그래요. 우린 개츠비처럼 끝없이 나아져야만 하고, 끝없이 올라가야만 해요. 과거에 제가 썼던 여럿 글에서 강조했던 바로 그 향상심이죠. 비록 고인물 게임처럼 되어버린 대한민국이지만 말이에요. 캐릭터를 리셋 시킬 수는 없잖아요? 그저 묵묵히 '어제보단 좀 더 낫겠지, 좀 더 낫겠지' 스스로 채찍질하면서 가는 수 밖에요. 세상이 불안해질수록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그래서 더욱 자신에게로만 움츠러 드는 것 같아요. 주변 시야는 어떻구요. 자신 앞길도 안 보이는 판인데.

얼마 전에 선택적 정의라고 쓴 글이 있지요.
우린 필연적으로 선택적 정의를 할 수 밖에 없어요.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만이 유일 정의다'라는 마음가짐이지요.

과거의 외환위기와 비관적인 미래와 현재의 불안정한 정세는 우리를 공동체에서 멀어지게 만들어요. 우리 삶은 각자도생의 길로 들어선지 오래구요, 우리의 선택적 정의는 더더욱 잘게 쪼개졌버렸지요. 현실 앞에서 결국 우린 내 삶에만 치중하게 되고, 정의 또한 취사선택용 정의를 내세울 수 밖에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살아있는 자들은 모두 죄인이 되는 셈이에요. 그러나 우린 이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유일한 정의인양 뻔뻔하게 행동하곤 해요.

사실 이러한 태도라면 누가 떳떳하게 비판할 수 있겠냐며 전형적인 우물에 독풀기식 논리 오류라고 지적하실지도 모르겠네요. 원래 세상은 서로 똥칠하며 사는 거에요. 내 잘못은 감추고 상대 잘못은 지적하지요. 내 떡은 작아보이고 상대 떡은 커보여요. 물론 이것을 당연시해선 안되고, 지양해야 할 태도인건 맞아요. 내 허물은 허물대로 인정하고, 타인의 허물도 허물대로 지적하는 거지요.

'똥 물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라는 속담이 있어요. 원래 이 속담은 타인을 지적하기 전에 자기를 되돌아보기 위해 쓰이는 건데, 오히려 타인을 지적하기 위해 많이 쓰이는 속담이지요. 또 그만큼 잘 통하는 논리이기도 해요. 어찌보면 우린 완벽한 인간을 찾지 못해서 안달난 것 같아요.

다시 돌아와서, 우린 선택적 정의만을 행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된 이 대한민국을 그저 하릴없이 바라만 보다가, 서로 부등켜 안은 채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울면서 대한민국 속으로 걸어들어 갈에요. 그리고 다시 관계도 손절하고, 대화를 단절하며, 이해심은 선택적으로 발휘하게 되겠지요. 우리가 때때로 공동체를, 과거를 그리워하는 이유가 이런 비참한 현실을 무의식적으로라도 느끼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네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에요. 힘들더라도 우린 끝없이 올라가야만 해요. 좀 더 스스로의 삶을 향상시켜야만 하지요. 내 삶을 반석 위에 올릴 때까지 본인에게 치중해야 해요. 다만 그래도 때때로 타인에게 관심갖고 손을 내밀 수 있는 그런 여유로움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번 새로운 한 주도 파이팅!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