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끔씩 두근거릴 때가 있다.
있을까, 없을까. yes or no와 같은 상반된 두 결과를 놓고, 내 손으로 직접 확인해야 할 때다. 그래서 나는 가끔씩 의도적으로 확인하는 것을 주저하곤 한다. 자신의 눈을 가리면 자신이 숨은 것이라 믿는 아이처럼, 두려움에 눈과 귀를 막고서 모른 척 하려는 것이다.
2.
썸을 탄다.
썸이 즐거운 이유는 설렘과 두근거림을 가져다 주기 때문인데, 이 설렘과 두근거림은 알 수 없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즐거움으로 다가올 수 있는 이유는 결과에 대한 공포감이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끝이 있는 놀이기구를 타는 것과 같다. 롤러코스터와 같은 놀이기구는 분명히 타는 동안에 짜릿함과 두려움을 선사하지만,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고, 안전하다는 점에 있어서 확신을 주기 때문에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검증된 모험으로서, 우린 더 많이 탈지, 조금만 탈지 '중간' 결과에 대해서만 결정하면 된다. 마찬가지로 썸은 너도 나에게 마음이 있고, 나도 너에게 마음이 있다는 확신(결과)이 있을 때 발생한다. 서로 시그널이 어긋날 수도 있겠지만,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본인 마음속에 (상대방의 마음이 어떻든 간에) 그런 확신(확실한 결과)이 들었다는 것이다.
3.
(짝)사랑을 한다.
썸은 서로에 대한 마음이 다 끝나 있는 상황이고, 그저 과정을 즐기기만 하면 될 뿐이지만, 사랑은 결과를 알 수 없다. 이것 역시도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지만, 이 두려움은 공포감으로 다가온다. 이 결과는 오로지 yes or no라는 두 가지 결과만을 가져온다. 이러한 공포감을 극복하고 '고백'을 하고 나서야 연인 사이로 발전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일종의 시련을 이겨내는 의식이랄까....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면 '용기 있는 자 만이 미녀를 얻는다.'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닌듯 하다. 좀 더 현대식으로 말하면 '용기 있는 사람이 사랑을 쟁취한다.' 고 볼 수 있지만, 용기가 있다고 사랑을 전부 쟁취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출발선에 설 수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완전한 모험과도 같다.
4.
협상을 시작하지.
썸과 사랑의 차이는 미지에서 오는 두려움에 대한 태도 차이라고 할까.
썸은 자연스럽고, 친숙하다. 결과는 정해져 있으니 눈치껏 시기조율만 하면 된다. 최악의 경우 협상이 결렬될 수 도 있지만, 그것은 확률상 매우 낮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마음에 여유를 두고 좀 더 부드럽게, 안정적으로 서로를 탐색할 수 있게 된다. 안정적인 협상 속에서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검증된 모험을 하는 것과도 같으며, 성공확률은 높다.
썸과 달리 (짝)사랑은 좀 더 직접적이고, 거칠다. 이것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 단지 내가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확신만이 있을 뿐이다. 결과는 둘째치고, 상대방이 협상테이블에 앉는다는 보장조차도 없다. 그렇기에 협상 전단계서부터 일방적인 구애와 기나긴 설득이 시작되는데, 이는 사랑을 고백하는 쪽이 완전한 모험을 한다는 것과 같으며, 성공확률 역시 낮다.
5.
우리들이 영업하는 사람들을 불편해하듯, 이 역시 일방적인 구애와 설득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고, 그것을 행하는 쪽의 매력도 떨어지게 만든다. 아무 생각도 없는 상대를 협상테이블에 이끌고 와서, 협상까지 무난하게 끝내고 사랑을 쟁취한 사람은 위의 기나긴 과정을 완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 대부분이 협상할 기회조차도 얻지 못한 채 침몰할 것이며, 협상을 하게 되었더라도 갑-을 관계가 확실한 상황에서 을은 바싹 엎드려 갑의 통보를 기다려야만 한다. 대체적으로 일반적인 (짝)사랑이 실패하는 이유다.
6.
썸-게임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는 현대 사회에서는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막아주는 썸을 선호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썸과 사랑이 이처럼 확연히 나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시작 방식 차이일 뿐이며, 연애에 있어서 이것들은 서로 상호연계되어 작동하고 있다. 모든 사랑은 시기의 차이로 (짝)사랑에서 시작된다. 썸이 대체적으로 결과가 정해져 있는 안정된 모험이라 할지라도, 서로를 향한 어필-협상은 계속 이루어지는데, 이는 갑과 을이 미묘한 썸에서 갑과 을을 정하려는 게임인 것이다. 그것은 누가 먼저 못 견디고 고백을 먼저 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데, 사실 썸 타는 관계에서 승패 자체는 말 그대로 게임의 결과에 지나지 않을 뿐, 크게 중요치 않다. 그러나 승패에 몰두하게 되면서 '승패 = 나의 가치'로 착각하여 과한 밀당을 하다가 판 자체가 깨지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합의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결과가 엎어진 충격은 생각보다 크다. 연인 사이에서도 마음이 식으면 얼마든지 엎어지는 마당에 썸이라고 엎어지지 않을까.
'기록보존실 > 떠오르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은 대우받은 만큼 (0) | 2018.07.25 |
---|---|
중요한 것은 문화적, 인적 네트워크 기반 (0) | 2018.07.23 |
사이다와 속앓이 (0) | 2018.07.19 |
소설에서 인물을 창조한다는 것 (0) | 2018.07.17 |
타인의 무덤을 팔 땐, 내 무덤까지. (0) | 2018.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