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존실/떠오르는

refuse와 목소리

어둠속검은고양이 2018. 3. 14. 15:48

refuse.

쓰레기.


넌 웃으며 나에게 refuse! 장난치듯 말했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은 refuse라는 단어는 강세에 따라서 거절하다가 아닌 쓰레기로 불린다고 알려주셨고, 넌 장난끼 가득한 목소리로 나에게 refuse! 하고 말했다. 아마도 넌 기억하지 못할 것이지만, 너의 그 장난끼 가득한 목소리만큼은 각인이라도 된 듯 1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뚜렷하다.


너의 그 목소리는 초봄이나 초여름 같은 싱그러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머리를 뒤로 묶고,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쓰고, 화장기 하나 없는 모습에, 문제집이나 교과서 대신 소설책을 가지고 다녔던 너는 자습시간엔 엎드려 자기만 했다. 순수한 시골소녀라든지 문학소녀라든지 그런 분위기를 풍기던 네가 갑작스레 장난을 치는 것이 퍽이나 인상이 깊었나보다.


대학교를 가서도 넌 늘 그대로였다.

오랜만에 만났을 때도, 화장기 없는 수수한 모습과 조곤조곤한 말투는 여전히 풋풋함을 자랑했다. 서로 다른 대학교를 갔었기에 네가 대학교를 다닐 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넌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다니지 않았을까 한다. 원래부터 꾸미는 것 자체에도 별 관심이 없었던 너니까.


어느 새 넌 애엄마가 되었다.

얼굴을 본 지도, 연락을 한 지도 꽤나 오래다.

언젠가 만나게 된다면 널 알아볼 수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왠지 넌 그대로일 것만 같다. 아닌가?


어느 덧 봄이다.

하나둘 만물의 활동이 시작되고, 계절의 칙칙함은 툇마루로 내려앉았다. 벚꽃 엔딩도 슬슬 차트에 입성하고 있다. 이런 초봄이나 싱그러운 초여름이 오는 계절이면, 어째서인지 너의 그 장난끼 가득한 목소리를 종종 떠올리곤 한다.  봄이 와버린 오늘, 문득 네 목소리가 생각나서 글을 써본다. 


ref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