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존실/떠오르는

추억을 회상한다는 것

어둠속검은고양이 2018. 3. 22. 04:51

그런 날이 있다.


뭔가 기분이 착 내려 앉아서, 담담하게 무언가라도 좋으니 글을 쓰고 싶은 날.

그림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 끄적끄적 낙서를 한다거나 하염없이 붓질만 하고 싶은 것처럼.

하지만 소재도, 할 말도 없이 글을 끄적이는 것만큼 고역인 것은 없다.

가야할 곳을 모른 채 무작정 뛰쳐나와 하염없이 방황하는 것처럼.

방황하는 것은 무작정 걷기라도 하면 그만일테지만, 글 쓰는 것은 머리를 헤짚어야 한다.

그런 날에는 어김없이 오랜된 기억들을 억지로 끄집어 내 펼쳐놓는다.

하지만 그런 것도 한두번이지...


사람들은 저마다 사연을 안고 살아간다는데, 나는 사연을 내려놓은지 좀 오래다.

돌이켜보면 무의미했단 느낌이 강렬하지만, 그것이 추억으로 남겨져 있는 것에 때론 안도한다.


추억은 이미 내 손을 떠났다. 

그 날의 진실들은 이제 어느 누구도 말할 수가 없다.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기록하고, 저장하고, 대화하는 방식으로 저마다 안간힘을 쓸 뿐이다.

보내야 할 것들을 보내지 못하고 안간힘을 쓰는 나 자신은 얼마나 추하며, 얼마나 인간다운지..

추억을 더듬어 가며 끄집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인간미를 확인하는 작업에 불과하다.

자꾸만 그것을 끄집어 오는 것은 현재 나 자신을 구차하게만 만든다.

허나, 우리는 그 인간미를 나누고, 얻는 알량한 온기로 삶을 유지하곤 한다.

저 너머의 진실은 이제 중요치 않게 되고, 중요한 것은 지금 그것을 공유하는 나 자신이다.


채색하듯이 추억을 회상한다.

슬픈 기분으로 한 번, 즐거운 기분으로 또 한 번, 그렇게 조금씩 색을 입힌다.

흐릿해져버린 스케치 위를 한번씩, 두번씩 붓질하며, 현재 나의 색으로 채운다.

그렇게 인간미가 담긴 그림을 완성하는 순간, 새로이 스케치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번 스케치는 어떤 색으로 붓질을 하게 될 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것은 또 먼 훗날의 이야기이므로.


허나, 분명한 것은 붓질할 땐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꾸만 반복되는 붓질로 인해 스케치마저 뒤덮어버리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