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뭔가 기분이 착 내려 앉아서, 담담하게 무언가라도 좋으니 글을 쓰고 싶은 날.
그림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 끄적끄적 낙서를 한다거나 하염없이 붓질만 하고 싶은 것처럼.
하지만 소재도, 할 말도 없이 글을 끄적이는 것만큼 고역인 것은 없다.
가야할 곳을 모른 채 무작정 뛰쳐나와 하염없이 방황하는 것처럼.
방황하는 것은 무작정 걷기라도 하면 그만일테지만, 글 쓰는 것은 머리를 헤짚어야 한다.
그런 날에는 어김없이 오랜된 기억들을 억지로 끄집어 내 펼쳐놓는다.
하지만 그런 것도 한두번이지...
사람들은 저마다 사연을 안고 살아간다는데, 나는 사연을 내려놓은지 좀 오래다.
돌이켜보면 무의미했단 느낌이 강렬하지만, 그것이 추억으로 남겨져 있는 것에 때론 안도한다.
추억은 이미 내 손을 떠났다.
그 날의 진실들은 이제 어느 누구도 말할 수가 없다.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기록하고, 저장하고, 대화하는 방식으로 저마다 안간힘을 쓸 뿐이다.
보내야 할 것들을 보내지 못하고 안간힘을 쓰는 나 자신은 얼마나 추하며, 얼마나 인간다운지..
추억을 더듬어 가며 끄집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인간미를 확인하는 작업에 불과하다.
자꾸만 그것을 끄집어 오는 것은 현재 나 자신을 구차하게만 만든다.
허나, 우리는 그 인간미를 나누고, 얻는 알량한 온기로 삶을 유지하곤 한다.
저 너머의 진실은 이제 중요치 않게 되고, 중요한 것은 지금 그것을 공유하는 나 자신이다.
채색하듯이 추억을 회상한다.
슬픈 기분으로 한 번, 즐거운 기분으로 또 한 번, 그렇게 조금씩 색을 입힌다.
흐릿해져버린 스케치 위를 한번씩, 두번씩 붓질하며, 현재 나의 색으로 채운다.
이번 스케치는 어떤 색으로 붓질을 하게 될 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것은 또 먼 훗날의 이야기이므로.
허나, 분명한 것은 붓질할 땐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꾸만 반복되는 붓질로 인해 스케치마저 뒤덮어버리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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