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불안정해지면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나게 된다.
하나는 연대를 통해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공동체적인 문제에 관심을 끊고, 일신의 안정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대승불교(대중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와 소승불교(개인의 깨달음만을 추구하는 불교) 같은 것이다.
연대를 통한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이들은 '공감'을 통해서 '인간다움', '감성'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사회문제는 모두의 문제이며, 이것을 해결하면 모두에게 이득이 돌아갈 것이라는 걸 강조한다. 하지만 실상 사회문제는 특정 집단들의 입장이 얽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해결 안되는 것보단 해결되는 것이 그나마 대중에겐 이익이긴 하지만, 그것은 굉장히 미미하며, 오히려 특정 손해로 다가올 가능성이 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일부분의 문제를 어떻게 '다수의 문제로 포장할 것인가' 이며, 이것에 성공한 순간, 이러한 문제에 관심갖지 않는 이들을 감성이 부족한 인간, 인간답지 않은 인간, 이기적인 인간 등의 꼬리표를 붙이고 매도하기 시작한다. 결국 공동체 의식을 통해 삶의 불안정성을 해결하려는 방법이 오히려 공동체를 망가뜨리고 특정 집단을 위한 파시즘적 사고로 이어지게 된다.
공동체적인 문제에 관심을 끊고 개개인의 삶에 집중하는 이들은 갈수록 파편화 되어가는 관계와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이 강조되는 사회 흐름에 편승하여, 자신들의 이익만을 적극적으로 챙기기 시작한다. 이에 대한 문제는 당연하게도 공동체 의식의 부재이며, 이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 정치권, 특정 이익집단의 카르텔 등에 대한 견제가 부재하게 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국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그리고 개인을 압박하는 그러한 문제들이 내버려둠으로써 불안정한 삶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든다. 이러한 행동방향은 '뭉치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을 지경'이 되기 전까지 지속된다. 결국 이런 불안정한 삶이 벼랑에 몰리고 나서야 비로소 적을 향해 싸운다고나 할까. 문제는 그 때쯤이면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거나, 그 때까지도 적의 실체가 모호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는 구조라는 것이 명확하게 어떤 실체를 띠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고, 연대를 통한 구조의 변동만이 이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늘 변동하기에, 사회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이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사회구조적 변동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고, 이러한 영향은 개인의 삶을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간에 변동함으로써) 불안정하게 만든다. 그러나 삶의 불안정을 해소하기 위한 각각의 행동방향들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끝나버릴 가능성은 농후하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상충적인 행동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사회적 혼돈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p.s
이러한 변동이 다수에 영향을 주는데 반해, 소수의 집단에 의해 이루어지거나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는 것 - 변동을 받는 자와 변동을 일으키는 자가 불일치한다는 점은 그 자체로 이미 문제이며, 이는 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이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이정표 역할을 되기도 하는데, 문제는 이러한 영향을 일으키는 소수집단은 결코 이를 좌시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이 역시도 긍정적이라 보기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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