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존실 991

세월의 무게

나이먹은 것을 핑계로 실수를 당연시 하지 말고 변화하지 않으려는 것을 정당화하지 말고 나이를 먹어갈수록 주의를 기울이고 변화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세월의 무게다. 우리 모두 알고는 있지만 지키기 어렵다. 세월의 무게는 참으로 버겁다. p.s 어떤 어르신을 보고 든 생각. p.s 2 과연 나는 시대를 따라갈 수 있을까. 이미 조금씩 뒤쳐지는 것 같은데.

만남에 의미가 생기는 나이 -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

어릴 때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새롭고 특별했기에 의미가 깃들지 않았다. 특별하다는 것은 다른 모든 것들 중에서 어떠한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뜻하니까. 모든 것이 특별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그냥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나이를 먹은 지금, 이젠 어떠한 것들이, 어떠한 행동들이 의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옆집에 산다는 것만으로, 나이가 같다는 것만으로, 같은 장소에서 논다는 것만으로도 만남은 자연스레 이루어졌고,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젠 만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됐다. 특별히 시간을 써서, 수고를 곁들일 정도가 된 사이. 만난다는 것은 이제 그런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우산을 함께 쓰는 것도 이젠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친구나 지인 정도..

대한민국, 불안과 신격화하는 경향

살아가다보니 한국 사람들은 무언가를 신격화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좀 더 정확하게 보자면, 삶이 불안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절대화 시키는 것이 아닐까. 불안감은 명확하지 않은 것, 알 수 없는 무언가에서부터 나타난다. 자신이 믿고 있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생겨나는 순간, 자신의 삶의 모든 것들에 대해 설명이 가능해지고 불안감은 해소되니까. 그리고 자신의 삶은 그 절대적인 것을 기준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것은 심리적인 이유가 크다. 지능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종종 사이비에 빠진 이들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멍청하다고 비난하곤 한다. 불안감 사람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의심의 씨앗을 뿌린다. 어느것 하나 믿을 수 없을 때, 믿음직스러운 무언가가 나타난다면 우린 그것을 의심없이 집어들 것이다..

추억은 추억으로

추억은 추억으로 남기는 것이 낫다는 말. 추억은 오직 마음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에 추억엔 늘 기대나 환상이 들어있을 수 밖에 없다. 또한 추억은 현실이 아니기에 내가 생각했던 것과 100프로 일치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인 이상 우리는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우리의 기대가 깨져나가면 실망하게 된다. 추억이 추억으로 남기 위해선 추억을 추억으로 남기는게 낫다.

누군가의 불행이 행복이 되는 시대

누군가의 불행이 누군가의 행복이 되는 이 시대. 이해관계에 따라 입장이 다를 수 밖에 없는 사실이 이해가면서도 개인들이 그러한 사회의 부품들로서만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깝다. 멀어지면 춥고 가까우면 한 줌 재로만 남아버릴 불꽃처럼 멀어지기도, 가까워지기도 어려운 사회다. 우린 평생을 입장에 따라서 타인의 불행에 대해 울고 웃을 것이다.

문득 그리고 달콤쌉싸름

따스한 봄날. 뿌옇게 흩날리는 대기를 보고 있노라면 문득 당신이 떠오르곤 한다.뿌연 흙먼지에 반사된 햇빛들이 당신을 향한 아련함과 비슷하기 때문일까.되돌아 생각해보면, 당신과 있던 그 때가 참 그립다고 생각한다. p.s 사진을 봐도 우울함만 더해지는 이 때. 유일하게 달콤쌉싸름함이 느껴지는 것은 당신과의 추억뿐이다.

그 정도뿐인 인간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는 사람들에게 무력감을 학습시키며 도덕적인 비판 보단 그 편에 서는 것이 이득이라는 것을 점차 각인시킨다. 그러한 사실들은 사회를 좀 더 낮게 이끈다. 법을 넘나드는 자들이 되려 큰소리 치고, 잘못된 것을 교정하자는 목소리는 작아지며, 사회적 신뢰도는 완전히 망가지기 시작한다. 이제 사람들도 그러려니 하는 마인드와 자신의 이익만을 최우선으로 좇아 나쁜 쪽으로 변화한다. 최근 들어 제대로 된 처벌을 본 적이 없다. 법이 사람에 따라 경중이 달라진다. 더 노골적으로 변했고 사람들은 양분됐다. 법 위에서 조롱하는 사람들과 눈 가리고 아웅하며 이에 편승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러려니 하며 수긍하고 냉소적이게 되어버린 사람들과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풀이로 상대방의 꼬투리 잡기에..

필연적인 도덕적 비용

모든 사회적 변화에는 비용을 요구한다. 모든 사회적 도덕성은 돈을 필요로 한다. 도덕적 비용에 대한 허들과 부담은 사람마다 다르다. 발전된 문명에 살아가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쉽게 망각하곤 한다. 그리고선 자연스레 이루어지던 문명의 혜택처럼 입으로 도덕을 외치면 알아서 해결될거라 착각한다. 직접적인 길보다 우회적인 길이 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인 주장은 너무나도 하기 쉽다. 도덕적인 길을 닦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세상이 도덕적일 수 없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 시대의 자기연민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누구나 자기연민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대게 나의 이 감정들을 어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궁극적으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우리 자신도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자기 연민은 일종의 자기애와 맞닿아있는데, 이는 "이 세상에서 어느 누가 나를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나 자신이라도 스스로 이해해줘야지." 와 같은 것이다. 이것이 심해지면 우울한 나르시시스트가 된다. 우리가 종종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자아도취, 심각한 자기애, 비련의 주인공이라 여기는 마인드가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이것을 견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합리화나 주지화를 통해 본인을 포장한다. 그리고 이는 슬프게도 자기..

누가 누굴 비웃었는가. 아프간과 대한민국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고 했다. 그냥 "고생 많았다. 수고했다." 말해주는 것이 그리 어려울까? 상대방의 고생을 인정해주면 뭐 싸움에서 지는 걸로 생각하는 걸까? 사건 사고는 매일매일 터지고, 그것에 대해 신경 써봐야 내 정신만 피곤해질 뿐. 구태여 글도 쓰지 않고, 관심도 갖지 않으려 해도, 하도 시끌시끌해서 몇 자 써보게 된다. 과거 필자는 여성 징병제와 모병제 대해 이야기 한 적 있고, 직업군인과 의무병에 대한 이야기도 한 적 있다. 직업군인으로서 여성이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달라는 것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했으며, 그들이 굳이 의무병으로서 보내달라고 하지 않는 것은 의무 부과를 구태여 요구하지 않는 것으로서, 둘을 다른 맥락으로 이해했었다. 다만 의무를 ..

각자의 삶

결국 서로에 대한 이해는 영원히 평행선인 셈이다. 세상으로부터의 부정을 먼저 배운 사람과 세상으로부터의 긍정을 먼저 배운 사람의 관점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것은 경험으로, 환경으로, 습관으로 무의식에 남을 것이고, 결국 서로에 대한 이해는 평행선인 것이다. 그저 각자의 삶 속에 충실히 살아가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저 그 뿐이다. 가난은 정신과 몸을 갉아먹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뒤틀리게 만든다. 하지만 부유함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르게 만든다. 이것은 부를 떠나서 외모, 매력, 능력, 계층, 계급 그 어떤 것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가난을 이해할 수 없고, 미인은 못 생긴 사람을 이해할 수 없으며, 천재는 범인들을 이해할 수 ..

속내

나이를 먹을수록 말을 아끼게 된다. 글을 쓰는 것조차도. 속을 내비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외부의 상황에 대해 의연해지고 구태여 힘을 낭비하지 않는다. 내 삶 챙기기도 바쁜 마당에. 갈수록 가면을 두텁게 쓰고 적당히 모션을 취하며 연극한다. 우리가 하는 것이 연극이라는 걸 상대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가 알지만 그렇게 그냥 적당히 넘어간다. 서로 힘 빼지 않기 위해서. 당하는 입장이든, 행하는 입장이든, 어느 쪽이든 간에.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해야 하는 이유 - 공동체의 이해

경험이 많으면 사람을 더 잘 이해하지만 경험이 좁으면 아집과 편견만 남는다. 이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주의해야 하는 것과도 연관 있는데, 커뮤니티 특성상 끼리끼리 뭉친다. 그것은 소수의 과잉대표, 편견의 강화, 자신들의 의견이 주류라는 착각을 만들어 낸다. 아집만이 남는다. 이는 경험 부족의 대표적인 예다. 인터넷 밖으로 나오라는 말은 분명히 옳은 말이다. 세상엔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다는걸. 저런 삶도, 이런 삶도 있다는 걸. 이런 미친놈도 있고, 이런 멍청이도 있으며, 순수한 이도 있으며, 굉장히 똑똑한 이도 있다는 걸.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것과 지하실 밑에도 지하실이 있다는 것. 사람을 더 잘 이해할수록 공동체와 사회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다. p.s 그러나 그 이해가 혼자만의 일방통행이라..

외부로부터의 삶

삶이 버거워지면, 사람들은 신을 찾거나, 술을 찾거나, 원망의 대상을 찾는다. 외부로부터 무언갈 찾지 않고는 못 견디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의존하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며 내 삶을 찾아가는 것을 충분히 괴롭다. 그러나 신이든, 술이든, 원망의 대상이든 그 어떠한 것도 자신의 삶을 바꿔주지 못한다. 오직 자신만이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다. 어떤 형태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삶은 우리의 의지와는 별개로 외부요인에 의해 많은 변화를 맞이할 것이고, 그로 인해 우리는 계속 우리의 삶을 외부에 의탁하려는 유혹에 시달릴 것이다. 그러나 외부요인에 대처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대처방식에 따라 우리의 삶을 의도치 않게 변화시킬 테지만, 결국 외부요인은 외부요인일 뿐, 우리의 삶 자체가..

양가적 감정과 이심전심

사람들이 살아가다 보면 양가적 감정을 지니는 순간들이 있다. 대게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교류하는 도중에 나타난다. 감정이라는 것은 교류를 통해서 형성되니까. 특히 사랑이 그렇다. 미운데 보고 싶다. 사랑하는데 밉다. 잡고 싶은데 잡을 수 없다. 잡아선 안되는데 붙잡고 싶다 등등. 그래서 이심전심이라는 말이 나왔나 보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말을 해야 알지 말하지 않고 어떻게 알아! 라고 탓을 하고 싶지만,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이 있다. 은연중에 알고 있는 것과 입 밖으로 내뱉는다는 것은 그 무게와 의미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차마 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행동으로, 눈빛으로 새어 나오는 그 감정들이, 그 시그널이 참으로 애틋하다. 나 조차도 알지 못하는 이 마음을, 알아채고 잡아주길 바..

사랑은 특별하지 않다.

사랑이라는 게 특별하지 않음을. 그건 밥 먹고, 잠자고, 화장실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임을. 전혀 다른 두 삶의 사람이 한 공간에 지내면서 불편하고 다투고 어색하게 될지언정 그것이 자연스러운 삶임을. 가슴 뛰는 두근거림과 설렘이 그 순간을 특별하게 할지라도. 결국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자연스러워짐을. 비록 너와 나, 몸은 두 개일지언정 세상 풍파를 같이 이겨내는 하나의 삶이라는 것을. 사랑하고 사랑받고.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사랑이 없는 삶은 삶의 어느 한 부분이 비어버린 것과 같다는 것을. 그래서 다들 고통에 시달리며 독을 품게 되는 것이지도. 어쩌다가, 삶의 한 부분을 포기하게 만드는 사회가 됐을까. 모두들 삶의 한 부분을 포기한 채 어디로 흘러가며 살아가는 걸..

불안감 - 부에 따른 계급의 분화

'광에서 인심난다', '부유할수록 심적 여유가 있다'는 말은 자신이 지닌 부에 대한 자신감 - 자신의 부의 계급이 절대 추락할리 없다는 그 자신감에서 기인한 여유가 아닐까 한다. 반대로 말하면, 제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 불안감이 해소되지 않은 사람은 인심이 야박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계급이 하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그것이 사회적 권력에 기인힌 계급이든, 부에 기인한 재산적 계급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계급이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계급의 불안정성이 경쟁을 통한 끝없는 발전과 번영을 가져다 준 대가로 인류는 죽을 때까지 경쟁 속에서 이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믿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다니게 되었다. 그것은 누군가에겐 신이고, 누군가에게 부이며, 누군가에겐 절대적 권력..

도전

나이를 먹으면 도전이 두렵다. 젊을 때 도전해봐라. 어릴 땐, 젊다고 해서 도전이 안 두려운 것도 아니고, 도전해서 실패했을 때 대신 책임져 줄 것도 아니면서, 참으로 무책임하고 꼰대 같은 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 먹으니 저 말을 조금 이해할 것 같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의 무게 때문에 도전하는게 어려워진다. 대한민국은 어린 나이에 참으로 관대해서 실수를 해도 '어리니까. 젊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라며 젊음의 특권으로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이먹은 사람의 실수에는 관대하지 않다. 오히려 엄격한 자격을 요구하며,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 실패하면 이젠 도전의 기회 조차 없어질까봐 머뭇거리며 늘 각을 재게 된다.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되고... 하면서. 물론 감..

대화

대화는 이해의 과정이지만 오해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 당신 앞에선 입을 다물곤 합니다. 당신의 신경질적인 태도와 화가 난 모습에선 어떤 말도 이해의 과정을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방적인 감정의 해소만 있을뿐. 말을 해봐야 오해만 깊어질 뿐입니다. "말을 해야 알지!"하며 당신은 답답해하지만, 당신의 말 한 마디가, 태도가 입을 다물게 만듭니다. 입을 열어도 당신에게 그것은 핑계며, 변명일 뿐입니다. ..... 대화는 대등한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대등한 관계에서 시작되어야 이해가 이루어집니다. 감정이 격해졌을 땐 입을 다물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당신도. 나도.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것.

어느 새부턴가 평범한 것이란 평범하지 못한 걸 의미하게 된 이 때, 대한민국의 평범한 삶이란 허들은 너무나도 높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에선 평범한 삶을 살아야 대한민국의 어엿한 국민이 될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한 명의 국민으로 살아가기란 너무나도 어렵다. 대한민국에서 국민이란 최소 수도권을 살아가는 중산층을 일컫는다. 우선 지방사람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되지 못한다. 여기서 지방이란 서울과 수도권을 제외한 모든 곳으로서, 광역시 정도는 그래도 도시가 아니냐고 의문을 할테지만 광역시는 다른 시,도에 비해 좀 더 친밀한 느낌의 인접국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대중매체와 중앙 정부, 그리고 정부를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지방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그냥 지방이라는 딴 나라에서 발생하는 일일 뿐이다. 수도권에서 지방에 ..

믿음

우린 종종 믿는다는 말로 어떤 상황을 그냥 지나치곤 한다. 과연 믿는다는 말로 넘어가는 것이 진정 믿는 것일까. 확인의 두려움을 애써 넘기는 것은 아닐까. 혹은 확인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귀찮아서 게으름 피우는 것은 아닐까. 믿을수록 우린 확인해야만 한다. 의심이라는 마음이 티끌조차 일렁이지 않도록. 우리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우리가 믿는 결론이 현실인지 확인해야만 한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두려움과 의심을 만들어 낸다. 의심은 끝내 관계의 끝을 가져온다. 믿는다는 것은 명확해야만 한다.

줄어드는 인간관계과 삶의 지루함

어렸을 땐 뭐가 그리 좋았던 것일까. 사회인이 된다고 삶이 크게 변화한 것도 아닌데. 카페를 가든, 영화를 보든, 컴퓨터를 하든, 남는 시간은 늘 보내던대로 보낸다. 특별하게 달라지는 건 없다. 그냥 가던 곳들이 좀 더 좋아졌다거나 씀씀이가 조금 커진 것 외엔. 내일 일해야 하기에 좀 더 일찍 잠자리에 든다거나 만나는 사람이 줄어들었다는 것 정도. 시간을 보내는 건 똑같은데 대학생 시절은 왜 그리 즐거웠던 것일까. 아마 대학생 시절이 즐거웠던 까닭은 언제든지 연락해서 볼 수 있었던 지인들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똑같은 활동이라도 한명보단 둘이, 둘보단 셋, 넷이 더 즐거운 법이니까. 취업하면서 한 번.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한 번. 아이를 낳고 가족을 꾸리면서 한 번. 이렇게 한 단계 한 단계 지낼..

나아갈 길

삶에 회한이 들거나 우울함에 빠지지 않으려면 계속 나아갈 길만을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생각한다는 것은 앞날에 대한 방법을 찾는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해 가치 판단을 내리는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치 판단은 필연적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것과 그것에 대해 도달한 정도의 평가를 내리게 만들고, 나아가 비교까지 하게 만든다. 그 비교는 만족을 가져 오는 것이 아니라 결핍을 가져오게 만든다. 불행을 만들어 낸다. 반대로 나아길 길을 생각하는 것은 앞날에 대한 방법을 찾게 만들고, 나아가 자신의 삶에 대해 객관적 위치를 판단하게 만든다. 평가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도달 정도,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것, 버려야 할 것 등 강구책을 생각하게 만든다. 평가는 불행과 행복으로 나누지만, 판단..

소심과 야만성

어렸을 땐, 수틀리면 '한번 붙어보겠다', 선을 넘으면 '한 대 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상황 판단보다 내 감정이 좀 더 앞섰고, 조금은 전투적이었다. 나이를 먹으니 소심해졌다. 마치 '애도 아니고, 주먹을 뻗는 게 유치하고, 싸우는 것은 귀찮고, 어른이 되었으니 자제해야겠다.' 라는 그런 겸허한 마음으로 참는 것이 아니다. 그냥 손해가 두려워서 감정 해소보단 잃을 것이, 걱정이 앞서 생각나서 소심해졌다. 나도 모르는 새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나이에 따른 육체적 쇠락에 의한 것이 아니다. 과거에 육체를 믿고 과시할만큼 육체가 대단한 것도 아니었고. 애써 포장하면, 성격이 유해졌다고 말하지만 유해진 게 아니라 야만성을 잃고 겁쟁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어느 누군가는 문명인이라면 야만성이 ..

사람은 가챠에요.

못 생겼다고 해서 마음 착한 거 아니에요. 예쁘다고 해서 마음 나쁜 것도 아니구요. 누군가는 예쁜 사람이 사랑받고 자라서 마음도 예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아니에요. 그냥 사람은 가챠에요. 얼굴이 못 생겼는데 마음도 못 생긴 사람도 있어요. 얼굴과 마음도 둘 다 예쁜 사람도 있고, 얼굴이 예쁜데 못된 사람도 있어요. 못 생겼지만 마음만은 예쁜 사람도 있지요. 얼굴과 마음은 별개에요. 단지 80억명 중에 하나로 제가 최악이 아니길 바랄 뿐이고, 나의 사람으로서 최악의 사람을 뽑지 않길 바랄 뿐이죠. 사람은 가챠에요. 사람은 겪어봐야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