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존실 991

행복의 역치가 높아져 버린 시대

행복의 역치가 너무 높아져 버린 시대다.문득, 내가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그 때가 잘나서가 아니라, 200원 300원 용돈으로 학교 앞 문방구점에서 간식만 사먹어도 행복감을 느꼈던,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하교만 해도 즐거웠던, 그 때 그 감정이 그립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행복 역치는 너무나도 높아져 버린 것 같다.

독선의 시대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은 없다. 도덕 자체가 상대적이기에. 그렇기에 공인에 대한 평가는, 공적인 부분과 사생활은 분리되어 이루어져야 하는데, 도덕적 정당성이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무기가 되는 상황에선 절대로 불가능하다. 무기는 구분하지 않으니까.대한민국은 손가락 살인으로 사이버 불링이 어느 때보다 심각한데도 불구하고,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그냥 가벼운 글이라 하여, 책임감은 분산되고, 처벌은 힘들다. 그리고 손가락 살인마들은 도덕적 정당성을 무기삼아 독재를 하려 든다.독선의 시대 : 도덕적 무결성 추구는 모든 것을 검열하는 이슬람국가로 돌아올 것이다.

돈에 집착하는 이유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그토록 돈에 집착하는 것은 돈이 우리의 욕망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욕망이라는 것은 결핍과 필요의 합작으로, 우린 끊임없이 무언가 욕망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무엇인가 욕망한다는 것은 결핍을 해소하려는 목적 의식을 넘어, 어떤 방식으로든 생각과 행동이 그것에 얽매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돈을 갈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욕망을 이루기 위한 강력한 수단을 소유한다는 것(결핍 해소)을 넘어 나의 사고 방식들이 돈에 얽매여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우리가 돈에 집착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경제적 자유를 통해 돈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생각과 행동을 하고 싶다는, 자본주의 하에서 진정한 자유를 맛보기 위한 노예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아닐까 싶다.

이해하지 않는 사회

우린 조금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이해하려는 연극을 하고 있을 뿐.우리 사회는 다른 의견을 수용치 못한다.의견이 나뉘었을 때 우린, 내가 진실을 잘못 전달했기에 혹은 상대가 잘못 이해했기에 결론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꾸만 추가 설명하려 하고, 설득하려 하고, 답답해하다 멍청하다며 공격 한다. 아니다.상대는 나와 같은 사람이다.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다. 그렇기에 때때로 내 의견에 동조하지 않더라도, 설령 내 의도와 달리 받아들여 그렇게 됐더라도 우린 그것을 수용하면서 내 의견을 펼쳐야 한다. 설득이 아니라 주장이다. 주장을 해야 한다.

그리움

퇴근하고 집에 가는 길, 함박 눈을 맞으며 걸으면 문득 외롭거나 그리워진다.아니, 외로운지 잘 모르겠다. 분명 그리운 것과 고독은 별개의 감정인데.그립다는 것이 외로운 것을 나타내는 것일까.외로움을 다른 매체로 떠넘기는데 익숙해져 버려서, 외롭다는 감정도 잊혀지는 것 같다.그러나 그립다는 감정만큼은 분명하다. 오자마자 글을 쓰는 것이 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니까.날씨가 추워서 그리운 것일까. 아니면 내리는 함박 눈이 그립게 만드는 것일까.그리운 감정을 느껴보는 것도 오랜만이다.난...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일까.명확한 대상은 없는데 그냥 막연히 그립다는 느낌이 든다.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시절일까. 그 사람일까. 그 상황일까. 무엇일까........글을 써야겠다 체크해놓은 것도 몇 번. 결국 지금까지 글을..

멋진 사람이 되려면

상상은 구체화다.구체화는 경험이 많을수록 선명해진다.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면멋지다고 생각한 사람을 떠올려라.그리고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끊임없이 생각하라.행동도, 사고도 그 사람 자체가 되어라.p.s경험이 중요한 이유다.p.s2경험은 지식적 측면이든, 행동적 측면이든 내재화하지 않으면 의미없다.p.s3롤 모델의 중요성이다.

설득

설득은 이해의 강요가 아니라 선택의 기다림이다.요즘 말할 수 있는 창구가 많아져서 그런가.말할 자격이 없는 이들이 말을 많이 한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말하는데 무슨 자격이 필요해요? 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나 역시 말하는데 무슨 자격이 필요하나. 하는 생각이다.그러나 요즘 손가락으로 말하는 이들의 언어 행위를 보고 있자면, 언어 행위에도 자격증 시험을 도입해야 할 정도로 그저 배설만 하는 인간들이 참으로 많다. 그들의 언어 행위는 언어가 아니라 배설이다. 손가락으로 배설하고, 상처 입히고, 상대를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오만하게도 자신이 옳다는 확신에 차 있다. 아니,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기에 폭력을 저지르는 것이다.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이 옳다고 확신할 수 없다.오캄의..

언어의 힘

사람들은 말하는 것이 당연해서 말의 중요성과 힘을 쉽게 생각하곤 한다. 공기가 흔해 공기의 소중함과 중요성을 잊고 지내는 것처럼. 자신만의 언어가 있다는 것. 그래서 그 언어로 표현하고, 상대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있는지 깨닫는다면, 큰 힘에 큰 책임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헛소리로 상대방을 매도하거나 상처 주는 일이 반으로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말이라는 것, 글이라는 것을 인터넷을 통해 너무나도 손쉽게 내뱉고, 또 손쉽게 파급력을 미치기에 우린 언어의 힘과 중요성을 쉬이 잊어버린 것 같다.

유일한

그가 가진 건 돈 뿐이었다.이것은 그에 대한 상태를 표헌한 하나의 문장이지만 받아들여지는 의미는 저마다 다르다. 그가 가진 건 돈뿐이었다-라는 문장에서 돈의 소유가 강조되었으면 그는 부러운 대상이 되지만, 돈 이외의 것에 대한 무소유가 강조되었으면 안타까운, 동정의 대상이  된다. 어느 것에 강조의 방점이 찍히느냐는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에 저 글을 쓴 이의 의도, 주변 맥락, 상황 또는 받아들이는 이가 어떻게 상황을 상상하는가 등 매우 다채롭다.이처럼 유일한 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는 가치 중립적이지만 담긴 의미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그렇기에 우린 말과 글만큼은 담긴 의미를 중시한다. 물론 말과 글은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와 상관없이 그저 드러나는게 다다.그 드러남에서 우린 어떻게 의미를 부여할..

돈의 독주시대, 명예와 권력이 사라진 사회

오래전에도 썼던 것 같은데. 편지에 잠깐 언급했던 것 같다. 한국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뭐 끝도 없는 화수분이니까. 사회를 분석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지금 대한민국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돈의 독주라고 말하고 싶다. 모든 것은 돈으로 귀결되어 버리고 있다. 그래서 뭐?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돈보다 중요한 가치가 사라져버리고 있다거나 뭐 그러한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가치란 주관적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런들 저런들 도덕, 윤리적으로 접근하면 소모적 논쟁만 될 가능성이 크다. 돈의 독주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비교적 명확하다. 정확히 말해, '독주' 상태가 문제다. 민주주의에서 삼권분립을 외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제갈량이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를 중..

언어의 중요성

어떤 언어도 감정을 정확히 나타낼 순 없지만, 그 비스무리한 지점에서 지칭할, 표현할 단어가 생겨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바로 이 언어의 문제기 때문이다.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나와 타인으로 나뉘어진 이상 우린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비스무리한 동류를 가리키는 언어가 있기에 우린 서로를 이해한다고 믿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있기에 나 자신을 넘어 우리, 사회라는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언어의 문제는 단순히 표현할 수단이 생긴다는 것을 넘어 더 복잡하고 중요하다.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많아지고, 정교해질수록 자신을 더 명확히 표현할 수 있고, 그 명확함 끝에서 우리는 서로에 대한 이해의 간극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

민주주의 정책 결정의 역설

백수는 시간이 남아돌아 행동을 통해 온갖 정책적 분탕을 치지만 정작 살기 바쁜 시민들은 시간이 없어 중요한 정책에서 밀려난다. 고대 그리스가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노예가 온갖 업무를 맡았다는 것이다. 원래 토론이니 정책 결정이니 그 고상한 일들은 언변과 글이 쓰여진 서류가 있어야 가능하다. 노예제가 사라지고 만민이 평등하게 된, 모두가 유권자인, 현대 사회에 들어 민주주의는 과연 잘 흘러가고 있을까. 백수든 시민이든 똑같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원칙이 지켜져야 하는 것은 맞으나, 이것들이 사회적 비용과 혼란만 가중시키고 민의가 왜곡된다는 점에서 참으로 역설적인 비극이구나 싶다. (물론 백수의 의견도 하나의 민의다. 허나 경제적 상황으로 인한 시민과 백수의 정책..

복잡하게 나쁜 사람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 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p.s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132p~133p 중 p.s2 저 문구 하나로도 이 책은 가치가 충분히 있다 생각한다. 저 문구로 보고 이번에 책을 샀다. 아쉽게도 아직 읽진 못했다. p.s3 이만큼 요즘 사회에 관계맺음에 대한 사람의 접근방식-사고를 제대로 말해주는 문구가 있을까. 난 '원래 안 그러는데. 어쩔 수 없어서.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주변 여건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선택을 한 사람'이지만, 상대는 '그냥 개x끼인 것을. 피치 못할 사정이니 환경이..

강자의 기분이 약자의 질서다.

강자의 기분이 곧 약자의 질서다. 이만큼 사회 관계를 꿰뚫는 말이 있을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늘 수직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의 정도가 어느 정도냐, 어떠한 것이 기준(돈,권력,직급,매력,폭력 등)이냐 차이만 있을 뿐. p.s 맹수의 기분이 곧 약자의 질서다. 캐슬2:만인지상 57화 중 p.s2 사회 생활을 하다보니 느끼는 것이 있다. 1.직급이 높을수록 무례한 인간이 많다. 평소엔 점잖은 척 가면을 쓰지만, 자신보다 직급이 낮거나 약한 인간에게 자신의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그래도 뭐라할 사람이 없으니까. (회사는 결코 이성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결재 받을 때 상사의 기분을 살피는 건 기본이다. 상사의 취향이나 비위에 맞추는 건 사회생활능력이다.) 2.나이먹을수록 무례한 인간이 많다. 비슷하..

맞춤형 인간을 권하는 사회

요즘 필자의 티스토리에 들어오면 티키타카에 관해 검색하다 들어오는 이들이 참 많다는 걸 느꼈다. 또, 연인을 찾는다는 사람들을 보면 상당수가 대화가 잘 되는, 티키타카가 잘 되는 이를 조건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아졌다. 물론 대화가 되는 것은 중요하다. 사람들은 상호작용 하는 동물이니까, 평생을 같이 할 반려자라면 대화가 되어야지 않겠는가. 필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외모나 재력, 능력을 더 중시하던 과거와는 달리 소통을 중시하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강해졌다는 말이다. .....소통을 중시하는 건 문제가 안된다. 문제는 나와 소통이 완성된 사람을 구한다는 것이다. 맞춤형 추천, 맞춤형 구독, 맞춤형 서비스가 일상화 돼서 그런가. 연인도 맞춤식으로 구한다. 물론 안 맞는 것을 억지로 맞추는 것보다 첨부터 잘 ..

원하던 삶 생각하기

내가 원하던 삶은 무엇이었을까. 왜 사는가와 같은 질문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어떤 삶을 원했는가지. 말과 행동은 이유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이유는 늘 질문을 만들어내지만 그 질문의 답은 항상 정해져 있다. 바로 내가 원했다는 것. 살아가는 것은 결국 내가 원하던 것들을 이루는 과정이니까. 때론 우린 타의에 의해, 환경에 의해 원치 않는 말과 행동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삶에 일시적일 뿐이니 그저 보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삶은 결국 우리의 뜻대로 - 마음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실현시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하지만 그 전에 내가 원하던 삶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살아가는 이가 상당하다. 병 속 벼룩 이야기처럼, 현실적 제약으로 생..

최저 임금 1 만원 시대, 이것은 독일까.

필자는 오래전 올리케 헤르만이 지은 책의 리뷰를 통해 임금 상승에 대해 일부 이야기한 적이 있다. 다시금 생각해보아도 책에 말한 임금 상승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최저임금이 드디어 1만원을 넘어섰다. 이에 대해 자영업자나 생산자들의 말이 많다. 당연하다. 인건비는 어느 제품이나 서비스에서든 많은 비중을 차지 한다. 인건비는 지속적으로 들어가는 돈이고, 그것은 해가 지날수록 숙련이라는 이름하에 가격이 올라가기까지 한다.대한민국은 지금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한쪽에서는 먹고 살기 힘들다고 하고 있고, 한쪽에서는 비용이 부담된다고 난리다. 얼마전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비행기 항로가 가격이 배로 비싸도 전부 완판이 되었고, 인기가 치솟고 있어서 운항 횟수를 늘릴 계획이라는 기사를 본..

사라져가는 책임의식들

필자는 오래 전에 공동체주의가 바탕인 개인주의와 개인주의가 바탕인 공동체주의에 대한 글을 썼고,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집단주의와 개인주의가 바탕인 집단주의에 대해 언급했으며, 서양과 동양의 자본주의에 대해 공동체 의식과 개인주의를 엮어 글을 쓴 적이 있다. 세 주제 모두 다른 것 같으면서도 유사한 점이 많은데, 결국 말하던 것은 집단과 개인에 대한 접근 방식의 차이로 인한 동서양의 차이점 분석이었다. 공동체주의 하에서 발생된 개인주의는 한국사회의 흐름과 유사한데, 공동체주의에선 공동체가 개인에 우선하기에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하고, 오히려 그걸 강요한다. 그 결과 사회가 개인주의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공공을 위한 희생은 비웃음거리로 전락하며 공공 직업들은 니가 돈 벌기 위한, 능력 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유튜버의 책임의식과 사회적 비용들

오랜만에 낮잠을 잔 후, 늦게서야 글을 쓰기 시작한다.내일 출근 하려면 일찍 자야만 하는데. 12시가 지났으니 오늘인가. 그러고 보니 글을 쓴 지도 오래 되었구나 싶다. 그나마 쓴 것도 편지뿐이다. 여전히 난 편지를 쓰는게 좋다.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터놓는듯한 글들은 나름의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니까. 물론 그 편지로 늘 읽어주시는 분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의 소소한 일상들이, 글들이 그 분께 소소한 즐거움을 준다면 더욱 좋고.살다보니 점점 단순해지는 것 같다. 흐르는대로 살아왔고, 흐르는대로 살아가다보니. 그나마 있던 어릴 적 취미는 점차 시들어졌다. 누군가 평생 살아가려면 평생 취미로 즐길 수 있는 악기 하나, 활동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정말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단순히 감상..

적응

....결국 나도 사람이다.사회에 적응해야지.비판은 힘의 역학관계가 명확할 때, 가능성이 있을 때 하는 것이다. 변화시킬 힘이 있을 때. 그전까진 사회를 아무리 비판해봐야 끝에 남은 건 도태뿐. 사회를 개인이 이길 수 없으니까. 비판하는 이가 없는 사회는 죽어버린 사회지만 알 게 뭔가.외모나 과열된 경쟁 의식이 문제라는 걸 알지만, 그 흐름 속에서 그걸 비판해봐야 본인만 실패자, 투정 부리는 도태남이 될 뿐.고고히 홀로 이 사회를 완전히 벗어날 것이 아니면 대세에 맞추는게 편한 길이다.정상은 정상이고, 비정상은 비정상이다.제 아무리 비정상이라 외쳐봐야 본인만 도태다.사회에 순응하면 안된다.비판의식을 가져라.뭐 이런 것들이 나쁘진 않는데, 결국 사회 속에 살아갈 사람이라면 적응했어야 한다는 걸.이 사실을 ..

당연함과 익숙함의 대가

익숙하다는 건 당연시 된다는 것.당연하다는 것은 소중함을 잊게 된다는 것.당연한 일상 생활이라는 것은 없음에도 우린 일상 생활은 당연하다는 듯이 영위한다. 늘 하던 것이고, 늘 이루어지던 것이므로.깨끗한 옷, 깨끗한 집, 늘 맛있는 식사.그리고 편리한 사회적 인프라까지도.그것들은 모두 당연한 일상에 가려진 사소함이다.그 사소함들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을 당연하게 잊는다.망가진 인프라.망가진 삶의 양식.익숙함과 당연함으로 사소함을 잊은 대가를 우린 비일상이라는 미래로서 분명하게 치루게 될 것이다.p.s그래서 옛 사람들이 이성을 중시하고 감각을 그렇게 경계했는지도 모르겠다.p.s1이성이 광기의 시대를 가져오고, 그 이성이 돈의 가치로만 일의 가치를 측정하는 걸 보면 또 모르겠다.

감성의 시대

사람들은 요즘 시대를 감성의 시대라고 말한다. 애플이 감성적인 디자인으로 성공했고, 삼성이 갤럭시 플립으로 성공했듯이. 그러나 요즘 사람들이 감성을 찾는 것은 역으로 감성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인류가 야만의 시대에 확고한 기준점이 되어주었던 이성을 찾았듯이. 사람은 결핍된 것을 원하는 법이다. p.s 누군가는 그럼 왜 연대의식을 찾지 않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결핍은 원하는데 있지 아니한 것이다. 연대의식은 결핍된 것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무쓸모해진 것이다. 사회적 편의성이 잘 이루어질수록 사람들이 파편화되는 건 필연적일 수 밖에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