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존실/잡념들-생각정리 360

어릴 때가 좋은 거다.

어렸을 땐 '어릴 때가 좋은 거다'라는 말을 이해 못 했는데 이젠 알 거 같다. 어느 새 나이를 먹어버린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케케묵은 꼰대일려나. 각자의 입장이란게 있으니까. 나도 학생이었던 시절이 있었고 그 땐 나름대로 학교-집-학교-집으로 성실하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시절엔 그 나름대로의 고민이 많았다. 교우관계와 이성문제, 그리고 성적표와 대학 등등. 단일한 목표아래 친구들과 경쟁하며, 뭔가 해내간다는 것이 나쁘진 않았던 것 같다. 물론 그 당시에는 충분히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그 땐 주변에 신경써야 할 것들이 없어서 내 시간들을 온전히 내 통제하에 놓고 쓸 수 있다는 것이 어른이 되어버린 내게 가장 큰 매력으로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건 아니었다. 해야 할..

자신의 속죄에 타인을 끌어들이는 사람들

사람은 생각보다 도덕적이어서 나쁜 짓을 하면 죄책감을 갖는다. 그러나 사람은 생각보다 용기가 없어서 나쁜 짓에 대해직접적으로 마주하고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람은 생각보다 나약해서 죄책감으로부터 도망치고, 회피하려 든다. 사람은 생각보다 단순해서 마치 덧셈-뺄셈처럼 착한 일을 하면 그만큼 상당한 나쁜 짓이 용서가 될 거라 믿는다. 나쁜 짓을 했으면 그에 대해 직접 마주하고 당사자에 책임을 져야 하지만, 그럴 용기는 없어서 괜시리 타인까지 끌어들여 합리화하고 속죄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컨텐츠 과잉 시대 - 쉽게 생각되어지는 타인의 노력들

컨텐츠 과잉 시대에 우린 컨텐츠를 너무나도 쉽게 구하고 소비한다.그래서일까.우린 종종 컨텐츠 생산활동을 만만히 보는 경향이 있다. 컨텐츠를 쉽게 구할 수 있는 만큼 컨텐츠를 제작하는 것도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컨텐츠 생산에 들어가는 노동력들은 모두 값싼 것들로 치부되고, 오로지 결과만 남는다. 혹자는 이게 무엇이 문제냐고 되묻는다. 공급과 수요 법칙에 의해 공급이 넘쳐나는 시대인데, 값이 싸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냐고 말한다. 원래 모든 이들은 결과물을 소비할 뿐이니, 수고로움을 우리가 왜 고려해야 하냐고 질문한다.사실 맞는 말이다.그들의 노동력은 우리가 고려해줄 필요가 없다. 어차피 모든 사람들은 서로 일정부분의 도구나 부품으로써 존재할 뿐이고, 우린 그 중에서 가장 효율적인, 가성비 좋은 부품을 선택할..

시선과 체면, 그리고 인터넷 - 현대판 파놉티콘

오래 전에 필자는 대한민국의 사회적 시선-눈치가 어떤 식으로 작동되는지 리포트를 쓴 적이 있다. 해당 리포트에서 필자는 남의 시선, 체면을 신경쓰는 문화가 마치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콘처럼 모양생를 띠게 된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세월이 지난 지금도 이에 대한 결론은 확고하다.현대사회에 들어 SNS가 팔달하면서 우리는 너무나도 서로를 잘 감시하고 있다. 오히려 감시당한다는 느낌없이 자신의 일상들을 익명의 누군가에게 공유한다. 서로서로 공유하기에 SNS가 양뱡향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실상은 시선의 비대칭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무수한 가십거리를 보면 알 수 있다.어느 한 쪽에서 무언가 일이 터지면 하루가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박제된다. 온갖 커뮤니티에서부터 유튜..

맞는 말이긴 한데... 도구화되는 인간들

능력에 따른 차등은 당연한 것이다.이루어놓은 결과물이 다른데 그에 따른 보상도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단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더 주거나, 보상을 더 얹는 방식으로 나름의 공동체를 유지해나가고 있다.그러나 근래에 들면서 이 '능력에 따른 차등은 당연하다'는 사고방식은 신화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절대적 믿음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 것은 문제가 되질 않는다. 그러나 절대적 믿음 수준으로 격상 되어버리는 것은 위험하다. 더구나 그것이 정당한 주장이기 때문에 반박할 수 없는 경우라면 더욱 더.이제 사람들은 '능력에 따른 차등은 당연한 것이다'라는 믿음 아래 모든 사람들은 서로를 효율적인..

맞춤형 욕구 충족의 이면들 -소통의 단절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터넷은 더 빨라졌고, 컨텐츠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그래서일까. 우린 이제 세상에 우리를 맞추려 들지 않는다. 세상을 우리의 입맛에 맞게 맞추려 든다. 이젠 우리는 우리의 취향에 맞게 TV 프로를 담아서 보고, 보고 싶은 사진이나 글만을 모아서 본다. 보기 싫은 작품들을 우리의 시야에서 배제시키 버리거나 항의를 하기도 한다. 우린 우리의 욕구들을 빠르고 쉽게, 그리고 세세하게 충족할 수 있게 됐다. 우린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 이러한 쉽고 빠른 욕구 충족의 기술들은 우릴 단절시키고 있다. 우린 더 이상 세계를 우리와 다른 객체로 판단하며 세상과 소통하려 들지 않고, 내가 사용하는 도구의 연장선에서 세상을 재구성하려 든다. 그 세상에는 나와 동등한 인격체인 타인 역시 포함되어 있다..

과거는 잊어야만 한다.

우린 역사에서 교훈을 찾고,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흔히 유명한 말로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였던가. 이 문구는 신채호 선생의 말씀으로 흔한 관용구로 쓰이지만, 실상 출처는 불분명한 말이다.그러나 과거는 잊어야 한다. 우린 과거를 잊고, 현재에, 그리고 미래를 향한 그림을 그려야만 한다.세월은 흐르고, 인간은 망각한다. 그래서 우린 철저하게 기록을 해놓는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기록물로서 존재할 뿐,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그 당시의 생생함과 감정, 교훈, 경험들을 알려주지 못한다. 그건 마치 고고학자가 오래된 화석을 발견해서 '과거에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하고 추정하는 그저 약간의 흥미로운 옛날 이야기와 비슷하다. 망각은 인간의 숙명이고, 그로 인해 역사가 어..

메시지에서 메신저가 갖는 의미

권위에 호소하는 논증적 오류. 메시지를 반박할 수 없을 때는 메신저를 공격하라는 고전적 정치 전술.그러나 대화나 설득에 있어서 메신저(발화자)는 생각보다 매우 중요하다.중요하기 때문에 위와 같은 논증적 오류나 정치 전술이 등장하는 것이겠지만, 인터넷에선 위와 같은 말들이 무적의 쉴드 논리로 쓰이곤 하는데, 메시지만을 보고, 메신저를 무조건 배제하는 것 역시도 별로 좋은 것은 아니다.대부분의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주장들은 그 주장에 대한 논증과정의 참, 거짓을 밝혀달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옳다고 지지받는 것(믿어주길)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믿음'이라는 부분은 얼마나 신뢰도가 있느냐가 핵심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관게나 논증과정을 따지는 이유도 이것이 얼마나 말이 되느냐를 따지는 것이고, ..

아직은

감각보다 생각이 먼저 앞설 때 노래 가사에 공감하기 보단 표피적인 이해가 앞설 때 순수하고 서정적이라는 이유로 좋아했던 작품들에게서 문득 무뎌지는 느낌을 받았을 때 그럴 때 문득 난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세월은 흐르고, 사회는 변하고, 사람은 달라진다. 난 어렸을 때 '나이 먹으면 과자나 빵, 떡보단 밥과 국을 좋아하게 된다'는 소리를 듣곤 했다. 그 때마다 '난 내가 빵과 떡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아마 난 나이 먹어서도 좋아할거야.'라고 생각했었다. 이젠 신기하게도 이젠 빵이나 떡에 선뜻 손이 가질 않는다. 과자도 잘 먹지 않는다. 그것을 싫어하는건 아니지만서도.정확히 말하자면, 간식을 여전히 좋아하는 편이라 사면 끝장을 보는 편인데, 애초에 잘 사지 않게 된다. 하긴 누가 과자를 쌓아놓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해 관심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해 관심이 없다.사람들이 관심있는 것은 상대방 그 자체가 아니라 상대방이 말하고 있는 주제뿐이다. 대화에서 상대방은 그저 그 관심사들을 펼쳐 놓게 만드는 도구일 뿐이다.하물며 그 도구가 펼쳐놓는 대화의 주제가 내가 1도 관심없는 주제라면? 그건 그저 소음과 소음 공해를 일으키는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사람들이 묻는 안부들도 대부분 소식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대화하기 위한 시작점일 뿐이다. 마치 '우리 언제 밥 한번 먹자!'와 같은 하등 의미없는 말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상대방 그 자체에 관심이 생기는 경우는 크게 2가지다.첫 번째는 상대방에 호감이 생겨서 호기심이 생기는 경우인데, 여기서 호감이란 단순히 사랑(love)뿐만 아니라, 의리나 팬심과 같은 것들도 ..

어떻게든 되겠지

나이를 먹을수록 교류는 점차 줄어들고 생각은 점점 완고해진다. 대화라든지, 이해와 교류라든지, 그런 것들은 점점 거추장스러워진다.예전에는 외로움와 그리움의 고통이 소통에서 오는 피곤함보다 컸기에 그리 매달렸지만, 홀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젠 혼자가 더 편해져 버린 나다.관계에서 오는 피곤함과 불편함이 이젠 거추장스럽다. 어차피 모두가 부품으로 이루어진 세상, 혼자 산다면 혼자 사는건데.생각보다 외로움의 고통은 크다는 것을 잘 안다. 모두가 나이를 먹어갈 때, 세상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지는 외로움은 상상외로 가혹하다.그러나 관계맺음이라는 것이 뜻대로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홀로 남겨지는 것은 먼 미래의 일이다. 때가 되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가짐이 안일한 것인 줄은 알지만,..

이상도 하지요.

이상도 하지요.날씨가 더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면 당신이 떠오르곤 해요.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못했던 당신이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당신과 수없이 지낸 한여름 날들이 인상 깊었기 때문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그저 당신이 아름다웠다는 그 단순한 이유 때문일까요.에어컨 하나 없이 창문 하나 덩그러니 달린 단칸방에서 당신과 나는 밤을 지새우곤 했죠. 옥상 위에 지어진 벽돌 건물 위로 태양이 내리 쬐고 사라지면, 달궈진 벽돌들은 열기를 내뿜곤 했죠. 우린 그 더운 방안에서 꾸역꾸역 앉아서 탁자를 놓고선 노트북으로 당신이 좋아하던 공포 영화를 봤죠.그거 알아요? 그 탁자도 당신이 탁자 같은 거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해서 산 걸요. 꽤나 고심했어요. 안 그래도 좁아터진 방인데, 너무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으..

지적 우월감과 자존감을 위한 하잘 것 없는 다툼들

인터넷에서 다툼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가르치려 드는 태도 때문이다.어떤 분야의 전문가들도 함부로 확언을 하지 않는다.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인터넷에선 확언을 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어설피 아는 지식과 용어를 써가며, 너무도 당당하게 지적하려 든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참된 지식의 전파와 설득이 아니라, 타인을 지적함으로써 얻는 그 알량한 지적 우월감, 지적 허영심 충족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의 말을 들어주세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의 말을 듣지 않는 '너네들은 정말 멍청한 인간들이다!' 고 말하길 좋아한다.논리적인 척 포장하는 것은 설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럴듯해 보여서'다. 그러다가 간혹 그 어설픈 논리적 포장에 동조해주는 이들이 나오면 그들은 무려 선민의식까지 ..

아싸라는 컨텐츠에 관한 생각

일주일 전쯤엔가.일명 아싸의 브이로그라는 컨텐츠가 약간의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이것이 논란이 된 것은 소위 말하는 '기만질'이라는 것인데, 이건 과거 필자가 썼던 '가난이 패션인가'라는 글과 맥락이 비슷하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서 이 '아싸'라는 단어에 대해서 좀 짚어보자.'아싸'. 아웃사이더의 준말(?). 예전에 필자가 인싸템이라는 단어를 이야기하면서 인싸와 아싸를 구분짓는 단어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 때, 원래 아싸는 자발적인 아싸와 비자발적인 아싸가 있으며, 대체적으로 이 모든 것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나홀로족을 지칭하는 단어에 가까웠지만, 인싸라는 단어로 사람을 구분짓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요즘에 아싸라는 단어는 단순히 나홀로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비자발적 아..

논란을 두려워하는 사회는 모든 것을 통제하려 든다. by 대한민국

선과 악이 분명하게 구분되면 좋겠지만, 세상은 불분명하게 대부분이다.그래서인지 '논란'이 되는 대부분의 것들은 '분명한 문제'라서 논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기준이 다른 지점이기 때문에 논란이 된다. 결국 어느 정도까지인지가 문제인 셈인데, 이 문제는 대부분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 즉, 뭉쳐서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소리다. 그러나 이렇게 뭉쳐서 한 목소리를 내서 결정되는 일종의 기준들은 생각보다 대다수를 만족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것은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인데, 적극적으로 정치적 의사를 내비치는 사람은 매우 소수에 불과하며, 대다수는 방관 혹은 침묵하기 때문이다. 방관, 침묵하는 대다수의 이유는 생계 문제, 무관심, 귀찮음, 방법에 대한 무지 등 다양하다.정치적 의견 표출을 할 창구..

트라우마

트라우마. 큰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겪는 심리적 외상.종종 사람들은 트라우마라는 단어의 정의에 써져 있는 '큰 정신적 충격'라는 문구 때문에 본인들이 겪었던 마음의 상처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버리곤 한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감기가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호흡기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는 감기가 위협이 될 수 있듯이 마음의 상처 역시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웃고 넘길 사소한 상처들이 누군가에게는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은 상처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더 전문의와 지속적인 상담을 통해서 파악해야만 한다.차라리 눈에 보이는 외상이면 좋으련만, 트라우마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상처다. 외상이야 수술하고, 깁스를 하고, 부목을 대고 나면 상처가 점차 아물어간다. 그..

출입국통제, 외부방역에 대한 고찰들

지금 상황이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이렇게까지 전염병이 확산된 경우는 전대미문이다. 여지껏 두 번정도 전염병이 있었지만, 대한민국은 나름대로 방역이 우수한 편에 속했다. 사스 때는 공항에서의 철저한 방역을 통해 대한민국은 감염자만 3명, 사망자는 0명이었으며, 주변국가로부터 방역에 대해 우수한 국가로 인정받았다. 메르스 때는 다소 사망자가 발생하긴 했으나, 그래도 잘 견뎌왔다.그러나 이번 코로나는 전대미문의 위험이 발생하고 있다. 현재는 의료진과 공무원들 사이에서도 확진자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국가기관과 의료시설 마비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정말로 자뭇 심각한 상황이다.지금은 원인보다 대책 마련에 고심해야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다. 이것은 정부와 방역 ..

관계에서 중요한 티키타카

티키타카.이건 생각보다 굉장히 중요한데, 특히 연인관계에서 매우 중요하다. 티키타가는 스페인어로 탁구공이 왔다갔다 한다는 뜻인데, 일상에서 주거니 받거니 대화가 잘 이루어지는 걸 의미로 사용한다.친구들이나 지인들, 사회활동을 같이 하는 사람들은 평생을 같이 지낼 일이 없다. 가끔씩 만나다 보니 밀린 근황 이야기를 하나둘 하다보면 시간이야 금방 간다. 그러나 연인 - 부부 사이에는 꽤 많은 시간을 함께 공유하므로, 이것이 생각보다 굉장히 중요하다.혼자 지내게 되는 시간이 많아져서일까. 아니면 사회가 바쁘게 흘러가는 탓일까. 이 티키타카가 맞는 사람을 찾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 같다.어릴 때는 학교라는 틀속에서 강제로 같이 지내다보니, 어떻게서든 접점을 찾아가게 된다. 처음부터 개그코드가 맞아서 티키타..

코로나와 군상들, 그 종교에 대한 생각들

정확히 2일이다.필자가 코로나에 대한 정부 대책의 변화를 예상하며 쓴 글이 말이다. 뭐, 일단은 심각 단계에 준할 정도로 대응하겠다고 했으니 지켜봐야겠지만, 이젠 외부 방역이고 내부 방역이고 따질 틈도 없어졌다. 이정도면 통제 불가능한 상태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강한 전염력으로 인한 인력,행정력의 부족을 뜻하지, 무정부 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여튼 간에 근 2일 만에 정말 빠른 속도로 확진자가 늘고 있다.위기 상황에 빠지게 되면 사람들의 대처 능력이나 본성의 밑바닥을 알 수 있는데, 뜻하지 않은 이 위기로 인해 사람들의 실태를 자세히 알아가고 있다. 일단 정부가 초기 대응에 실패한 것은 맞다. 솔직히 말해서 대처를 잘해왔었다. 현장팀에서 정말 고생하셨고. 하지만 9가지를 잘해도 1가지 못하..

솜사탕

그 무더운 날 나와 함께 솜사탕을 먹으며 넌 무슨 생각을 했을까?그 날은 가을이라 하기엔 덥고, 여름이라 하기엔 한더위의 기운이 높지는 않은 그런 날이었다. 그래, 굳이 말하자면 여름과 가을 사이에 아주 잠깐 숨겨진 봄과 같은 날씨라고 할까.나와 같은 동아리였던 그 아이는 종종 나와 함께 대학로를 걷곤 했다. 동아리 모임에 때문에, 대학교 과제 때문에, 그리고 공모전 준비 때문에, 혹은 간단한 상담을 이유로 그렇게 함께 걸으며 이야기하곤 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생각보다 너와 많이도 다녔구나. 너의 그 특유의 예의바름과 화장기 없는 단아한 외모를 난 좋아했던 것 같다."어, 혹시 솜사탕 좋아해? 솜사탕 한번 먹을래?"먼저 말을 꺼낸 것은 나였다.그 날은 대학교에서 우연히 너와 마주친 날이었다. 나는 집으..

외부 방역과 내부 방역, 출입국통제에 대한 정부의 선택은?

근 이틀 사이에 엄청나게 큰 사건이 터졌다.사건이 너무나도 빠르게 진전되어 대처하는데만 엄청난 인력과 비용이 소모될 전망이다. 그 와중에 사건은 해결될 기미가 안 보인다. 해당 원인을 명확히 짚어야 대처도 빨라질 터인데, 원인에 해당되는 인물에 여러가지가 얽혀 있어서 대처하는데 애를 먹고 있다.이 사건을 계기로 국민의 여론이 들썩이고 있는데, 이로 인해 정부의 대처 방향이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일련의 흐름을 보았을 때, 코헨, 마치, 올센이 주장한 쓰레기통 모형이나 킹던이 주장한 정책의 창문모형이 떠오른다. 그냥 간단히 말해서 여러 정책의사결정이 지지부진하게 소모적으로 이루어지다가 특정한 사건(점화 계기)을 통해 순식간에 통과되어 버린다는 이론이다.최근까진 대한민국은 나름 방역을 잘하고 있었다. 불과 ..

해방, 행복이란 무엇일까.

행복이란 무엇일까. 이 글은 무거운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 질문이 좀 무겁고, 답변하기 어렵다면, '당신은 어떨 때 행복하다고 느끼는가?"로 바꾸어 질문하고 싶다. 이에 대한 답변은 모두 사람마다 다르게 나올 것이다."치킨을 먹을 때요.", "제 애완 동물이 애교부릴 때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요.", "제가 한 음식을 누군가 맛있게 먹어 줄 때요.", "일 끝나고 돌아와 맥주 한 잔 할 때요.", "돈 모아서 여행을 다녀올 때요.", "게임에서 이겼을 때요.", "꽁돈 생겼을 때요.", "재밌는 영상 볼 때요.", "야식으로 라면 끓여먹을 때요", "성적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을 때요.". "대회에서 우승했을 때요.", "자습시간에 친구들과 몰래 매점 갔을 때요.", "내가 사랑받고 있다고..

연철(軟鐵)

연철(軟鐵).연할 연(軟)에 쇠 철(鐵)을 써서 연철(軟鐵)이라고 부른다. 탄소가 거의 함유되어 있지 않아, 무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나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이 연철(軟鐵)이 아닐까 싶다.나는 아직 나의 밑바닥을 본 적이 없다네. 내가 진정 나의 밑바닥을 보길 원했다면 내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꼭대기를 경험하기는 어렵지만, 밑바닥을 경험해보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오르는 것은 힘들지만, 내려가는 것은 금방이니까. 몇 번이고 두드린 끝에서야 단단한 강철이 탄생하지만, 난 그러질 못했다. 그것이 두려움에서든, 방법의 무지에 의한 것이든, 어느 쪽이든 간에.롤러코스터가 무서워서 타질 못하는 사람이 있듯이, 제 아무리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 맛깔나는 인생이라 하지만 앞으로 내려갈 것을 생각..

살다보니 느낀 것 몇 가지 - 꼰대를 위한 변명

살다가 이제와서 느끼게 된 것이 몇 가지 있다.1. 학생 때 공부해라.2. 젊을 때 경험을 많이 해라.3. 생각보다 인생은 짧다.4.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은 그게 어느 정도 보장이 되어 있다는 소리다.5.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인생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하지 않기 위해 사는 것이다. 대략 이정도?어렸을 때는 1번과 2번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지금도 많은 학생들이 듣고 있는 말일 거라 생각한다. 나름 어른들이 조언이랍시고 학생들에게 저런 말을 많이 하는데, 학생들 입장에서는 잔소리 밖에 되지 않는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자신이 느낀 한 가지만을 가지고 설교를 늘어놓는 것은 꼰대에 지나지 않지만, 생각보다 그 '꼰대'가 하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통용이 된다. 옛날 속담이나 격억도 아직까지 통..

이것이 삶이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오래 전에 이야기 했던 것을 다시 꺼내보고자 한다. 우리는 늘 완벽한 살을 살길 바라고, 완벽한 삶을 갖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흰 종이 위에 그리는 단 한 번뿐인 그림과도 같아서 결코 완벽할 수가 없다. 수 많은 예술가들이 무수히 많은 그림을 그리고 나서야, 단 한번에 완벽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지만, 우리 삶은 단 한 번뿐이라 그럴 수가 없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에게 도화지 단 한장과 붓을 쥐어주고서 멋진 풍경화를 그리라는 것은 너무한 처사 아닌가! 하고 신에게 항변해보고 싶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우리는 궁여지책으로 그 인생의 도화지를 잘게 쪼개서 연습하면서 점차 좋게 좋게 그려나간다. 삐뚤빼뚤하던 선이 점차 반듯해지고, 그 위에 색들이 칠해진다. ..

우한 폐렴, WHO 비상사태 선포, 그리고 정부

오랜만에 쓰는 시사관련 글이다.이는 일종의 기록이므로 주제가 혼합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여러 생각들이 들어있다. 물론 생각들은 필자의 추정(뇌피셜)에 불과하다. 다만 판단을 내리는 정보는 뉴스를 기반으로 했다. 2020. 1. 31 자로 WHO의 국제적 비상사태가 선포됐다.최근 들어 우한 폐렴으로 인해 전세계가 들썩이고 있다. 우한 페렴이 집단 발병하기 시작한 것은 한 달 전, 작년 12월부터 였던 것으로 안다. 정확히 이 병이 시작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잠복기가 2주 정도이므로, 12월 중순쯤부터 발생하지 않았나 싶다.우선, WHO의 국제적 비상사태의 선포에도 불구하고, WHO는 교역과 이동을 제한하는 것을 권고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이에 대한 이유는 필자는 2가지를 근거로 두고 있는 것으로 보..

내 삶의 의지

필자가 좋아하는 만화책 중에 타카하시 신의 '좋은 사람'이라는 책이 있다. 장르는 드라마가 되겠다. 뭔가 이상과 현실을 합쳐놓은 듯한 드라마인데, 읽는 동안 힐링도 되는 듯하다. 매번 읽을 때마다 즐거움도 느끼고, 내 마음도 다잡게 되는 걸 봐선 내 인생작 중 하나인 것 같다. 맨날 마음만 다잡는 것 같아보이긴 하는데, 여튼 이 만화책을 보며 든 생각을 여기에 적는다. - 언제부터였더라? 내가 설렁설렁하게 살아가게 된 때가. '어려우니까, 해봐야지.'와 같은 도전정신을 불태웠던 때가 언제였는지. 어느 순간부터 병 속에 갇힌 벼룩처럼 딱 그정도까지만 살아가는 내가 있었다. 언제부터 두려워하게 됐을까. 실패를 두려워하게 됐고, 꼼짝 못하게 됐다. 그리고 되는대로 살아가던 내가 있었다..........살아간다..

생의 감각

감각을 뚜렷하게 느껴본 적이 언제였더라?생의 감각이 옅어진다는 느낌이 들때가 있다. 하루하루는 그냥 흐드러지고, 속시원하게 화내거나, 울거나, 웃어본 지도 오래다.그런 의미에서 익숙해진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아, 새해부터 이러면 안되는데.어느 순간부터 먹는 것도 그냥 배고픔을 달래기 위한 하나의 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가끔씩 어떤 음식이 먹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것 역시 피상적인 느낌에 그칠 뿐이다.옅어지는 생의 감각 만큼 삶의 경계는 희미해져 간다. 내가 살아가는 것인지, 살아가고 있는 것이 나인지. 도통 알 수 없다.아니면 살아지고 있는 것인가? 왜 사는가?와 같은 현실도피적 생각들이 내 머리를 맴돈다. 그렇게 무기력은 서서히 내 몸을 감싸 안는다.생의 감각의 실종 무기력해진 나 왜 사는..

이해하려 하지 말고, 이해 받으려 하지 말라.

사람의 저마다 이해의 허용 범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허용 범위는 일종의 선(line)과도 같은데, 이 선을 넘느냐 마느냐가 이해의 가능여부를 가른다. 단적으로 말해서 이정도까지는 이해가 '가능' 한데, 이 이상은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의 가능 여부는 매우 매우 복합적이다.이해라는 것이 머리로 이해한 것과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다르듯, 이해의 작용도 상황과 분야, 대상의 지적수준, 심적인 수용력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매우 복잡한 과학에 대해 이야기 한다고 했을 때, 이것에 대한 이해는 발화자의 전달 능력, 수화자의 지적수준에 따라 달라질 것이고, 이것에 대한 이해능력은 '머리로 하는 이해'를 가리킬 것이다. 물이 100도에서 기화가 된다는 사실은 객관적인 관찰의 사실로..

집착, 그만두기, 혼재

집착, 그만두기, 그리고 혼재.이 글을 세 가지 키워드로 나타낸다면 이정도가 아닐까 싶다.시인 윤동주는 일제 치하에 놓인 대한민국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라는 시를 통해 나타냈다고 한다. 그가 느끼는 감정들은 좀 더 대승적인 차원이었겠지만, 암울한 현실을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나 역시 그와 같지 않을까하고 감히 생각해본다. 자기 인생을 살아내지 못하는 것은 분명히 자신에게 있어 암울한 현실이자, 쉬이 부끄러운 일이다. 이 티스토리에 매번 글을 썼던 것처럼 자기 인생을 살아내지 못하는 나 자신이 매우 부끄럽다........그렇기에 더욱 집착했는지도 모른다.분명히 버킷리스트를 만들고 꿈을 찾아가는 행위는 생산적이며,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희망적..